“폐하?”'비류와 초고를 처음 본 노병은 두 사람을 쳐다보고만 있다가 예련의 입에서 나온 말에 허겁지겁 납작 엎드렸다.'“폐하, 용서하십시오. 미천한 것이 폐하를 알아 뵙지 못해 무례를 범했습니다.”'“그만 일어나라.”'일어나라는 비류의 말에도 병사는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굳은 채로 있었다.'“강녕하셨습니까, 폐하?”'그제야 예련은 정신을 추스르고 무릎을 굽혀 비류에게 예를 갖추었다.'“변방을 지키라 보냈더니 약초꾼으로도 모자라 이젠 사냥꾼까지 되었군.”'예련은 터질 것 같은 약초 망태를, 또 하나의 병사는 고라니를 어깨에 메고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다.'병사는 예련을 보며 객쩍은 미소를 지었다. 평소 잘 웃어주고 인자한 미소를 보이던 예련은 표정을 잃은 것처럼 차갑기만 했다. 마치 황제와 이렇게 마주 서 있는 자체를 빨리 피하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지만 황제가 예련을 싫어해 변방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예련이 황제를 싫어해 변방으로 온 것 같은 표정이었다. '“병사들의 배앓이가 심해 약초를 구하러 나왔습니다.”'형식적인 내용을 보고하듯 예련의 음색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도사 마려에게 들었다." '반갑게 아는 척을 하려던 초고도 예련의 태도에 한숨을 쉬었다. 예련을 변방에 보내놓고, 내색은 안 했지만 비류는 늘 노심초사했다. 비류가 예년보다 이르게 변방 순찰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초고는 다행이다 싶었다. 초고는 순찰을 핑계로 왔다가 예련을 데리고 도성으로 갈 생각이었다. 헌데 예련은 전보다 더 말이 줄었고 그나마 가끔씩 짓던 미소마저 없어졌다.'“다친 병사는 먼저 말을 타고 내려갔다.”'초고가 살얼음판 같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폐하, 오늘 밤은 저놈으로 포식을 해도 되겠습니다.”'초고는 과장되게 행동하며 고라니를 짊어진 병사와 앞장서서 갔다. 무거운 침묵이 초고의 뒷머리를 쭈뼛 서게 만들 정도였다. 그 정도로 비류와 예련은 한마디도 없이 걷기만 했다.'두 사람은 멀리 숭인성이 보일 때까지 한 마디도 없었다. 마려의 병사들이 비류 일행을 알아보고 달려왔다. 이미 날은 어두웠고 다친 병사가 초고의 말을 타고 먼저 내려 온 것에 마려는 걱정하며 비류와 예련 일행을 기다렸던 모양이었다.'“폐하, 괜찮으십니까?”'마려가 비류에게 물었다.'“난 괜찮다.”'“너도 다친 데 없느냐?”'마려는 예련이 지고 있던 약초를 받아 부장에게 던지듯 넘겼다.'“예, 도사 어른. 저는 이만 약초를 달여 몸이 좋지 않은 병사들에게 가 보겠습니다.”'마려의 부장이 들고 있는 약초를 예련은 빼앗듯 되가져 갔다.'“폐하, 그만 물러가겠습니다.”'비류 역시 고개만 끄덕여 그녀를 보내주었다.'“안으로 드십시오. 저녁이 준비되었습니다.”'안에서는 많은 사람이 비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숭인성의 귀족들이 음식이며 술을 가지고 비류를 찾아 왔고 마려의 부하 장수도 참석해 있었다.'식사가 시작한 후로 마려도 부장들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굳은 얼굴로 앉아 있는 비류의 눈치를 살피느라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예련의 덕에 토성 관리도 잘 되어 있고 무기도 넉넉하게 준비하고 정리했다. 책잡힐 일이 올해는 없었다. 그럼에도 비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저녁을 먹으며 초고는 무거운 침묵에 체할 것 같아 먼저 입을 열었다. '“예련의 얼굴이 전보다는 좋아 보입니다.”'“나를 보지 않으니 살맛나는 모양이지.”'“폐하께서 그리 무섭게 덕위를 궁에서 쫓아 내셨으니 어디 말이나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나는 내쫓은 적 없다.”'마려와 부장들은 초고와 비류의 대화 내용에 귀 기울였다.'“사람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폐하께 미움을 받아 덕위 예련이 이 변방으로 쫓겨났다고들 여기고 있으니까요.”'비류는 탁 소리가 나도록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너희도 그리 생각하느냐?”'비류가 마려의 부장들을 휘 둘러 봤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지만 그리 생각하는 눈치였다.'“폐하, 술이라도 한잔 하자고 덕위 예련을 부를까요?”'마려가 비류에게 의견을 물었지만 비류는 대답하지 않았다.'“도사, 예련을 불러 주십시오.”'초고가 비류를 대신해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다.”'마려가 사람을 보내기도 전에 비류가 잘라 말하는 바람에 예련을 부르려던 초고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불러도 안 왔을 겁니다, 폐하. 원래 술도 안 마시는데다가, 조금 전에 가져온 약초를 씻고 달이는 법을 병사들에게까지 알려주고 있거든요. 날이 더워지면서 병사들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까지 물을 먹고 배탈이 많이 났습니다.”'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해 보려고 마려가 말을 꺼냈지만 안 하느니만 못했다.'초고는 사람들 몰래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둘이 그렇게 똑같은지 모르겠다. 어려운 점을 토로하는 지방 귀족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비류를 보다가 초고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예련이 있다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그녀가 있는 곳은 약초를 삶느라 후덥지근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데, 이곳에 오래 있다가는 몸에서 물이 다 빠져나가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모두가 밖과 안을 오가며 열기를 식히는데 예련 혼자만 부뚜막 앞에 미련스럽게 꿈쩍도 않고 앉아있었다.'“뭐 하는가?”'“아, 나리.”'예련이 벌떡 일어섰다.'“무척 덥군.”'초고는 견딜 수 없어 예련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폐하께 서운해서 그런가? 이런 곳으로 보내서 말이야.”'초고는 슬그머니 예련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질문을 했다. 비류가 왜 예련을 멀리 보냈는지 모르는 초고였다. 그렇게 아끼던 예련을 왜 갑자기 내쳤는지 초고는 궁금하기만 했다.'“아닙니다.”'“몸은 어떤가?”'“좋습니다.”'예련에게서 단답형의 말만 되돌아오고 있었다. 초고는 예련을 궁으로 다시 데려갈 명분을 찾아 볼까하고 있는데 그녀는 힘든 것도 없고 좋다고만 했다.'“도성으로 갈 생각은 없느냐?”'“전쟁이 끝나면 돌아가게 되겠지요.”'예련의 대답은 참 태평하기만 했다. 그가 보기에는 예련은 도성으로 갈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덕위 나리, 병자의 구토가 멈추지 않습니다.”'병사 하나가 화급하게 달려와 예련을 찾았다.'“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초고는 자꾸 한숨만 쉬게 되었다. 예련은 그녀를 찾는 병사를 따라 가 버렸다.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도 못하고 말이다. 오히려 예련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감사하는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