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민소현!''일요일 낮. 깨끗한 햇빛이 반짝거리는 거리는 한산하니 여유로워 보였다. 새로 색을 칠한 듯 깔끔한 초록색의 790번 버스가 덜컹거리며 다음 정류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여름이 코앞까지 다가온지라 날씨는 꽤 덥지만 달리는 버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소현의 머리를 시원하게 날려주고 있었다. 버스 맨 뒷자리에 분홍색 야구 모자를 쓰고 하얀 트레이닝복을 입은 그녀는 거리만큼 한산한 버스가 참 맘에 들었다. ''[이번 정류장은 세륜 아파트입니다.]''언제 들어도 여성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딱딱하게 느껴지는 복잡 미묘한 목소리. 기계음이겠지? 그나저나 세륜 아파트라. 이번에는 잘생긴 남자가 좀 타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방금 전 정류장은 소현을 정말 암울하게 만들었었다. 버스를 자주 이용하는 소현은 오늘도 버스에서 마주칠 멋진 남자를 기대하고 있었다. ' ‘저, 이번에 내려요.’ '귀여운 것들. 소현은 오래전 유행했던 광고 속 여자모델이 자신이라고 상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소현은 언제쯤이면 자신에게도 그런 풋풋하고 싱그러운 사랑이 찾아올까 기대하며 오른손으로 턱을 괴었다.'저 멀리 버스정류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버스정류장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커다란 광고판속의 화장품모델 뿐이었다. 이번에도 허탕인가. 오늘 소현이 버스에서 본 남자라고는 아버지뻘 되는 아저씨들과 여드름투성이에 어마어마한 가방을 메고 있던 남학생이 전부였다. '아니! 내가 많은 걸 바란 것도 아니잖아? 그냥 내 또래의 남자한명 버스에 태워주면 되는데 도대체 그들은 모두 어디에 모여 있는 거냐고. '소현은 저도 모르게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소개팅도 싫다. 맞선도 싫다. 소현이 원하는 건 오로지 우연히 이루어진 로맨틱한 첫 만남과 필연이 더해진 운명적 인연이었다. 이런 자신의 의지를 주장할 때마다 엄마나 친구 은미는 혀를 차며 소현의 등을 후려치곤 했지만.'그때였다. 화장품광고 뒤에서 키가 훤칠한 남자가 불쑥 앞으로 한걸음 걸어 나온 것은. 헛! 드디어?'소현의 얼굴을 창문에 최대한 바짝 붙이고 남자를 유심히 살폈다. 키가 아주 큰 180은 넘어 보이는 남자였다. 카키색 비니모자에 적당히 맞는 흰색 라운드 티셔츠. 그리고 멋들어진 청바지가 남자의 긴 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하얀 운동화가 햇빛을 받아 유난히도 눈에 띄었다. '진짜 킹카는 흰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어도 빛이 난다더니. 바로 저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가? 아 저분 어깨에 걸린 가방이 되고 싶다!'지금껏 지루함과 실망감으로 시무룩하던 소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버스가 덜컹거리며 그분이 기다리시는 정류장에 도착하자 소현은 재빨리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했다. 관심도 없는 것처럼 그녀는 창밖을 보고 있는 척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모자의 그늘 아래로 출입구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드디어 남자가 버스에 오르기 시작했다. 평범한 버스가 황금마차가 되는 순간. 남자가 버스에 오르는 그 모습을 소현은 슬로우 모션으로 재생시키고 있었다. 드라마고수들만 습득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스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