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영아, 내가 말한 거 다 이해했니?”'“대충은 알겠는데, 언니.”'“그 정도만 알아도 앞으로 일하는 데 문제없을 거야.”'은희는 노트북을 닫으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6개월만 대신할 건데 뭐.”'긴 머리를 질끈 묶은 세영은 임시라는 명목을 내세우며, 은희의 걱정과는 달리 시큰둥한 반응을 내보였다. 그런 그녀의 무덤덤함이 안심되는 한편 불안하기도 한 은희는 세영의 귓가에 유혹의 속삭임을 불어넣었다. '“야야, 그래도 혹 아니? 잘하면 정식으로 채용할지?”'“그럼 언니는 아기 낳고 그대로 집에서 눌러있어야 할걸? 그래도 괜찮겠어?”'“계집애, 농담이라도 끔찍하다 얘!”'“그러게, 맘에 없는 소릴 하덜 말아.”'돌려 말하는 법 없이 항상 직구로 날아오는 세영의 솔직함에 은희는 너털웃음을 뱉으며 일어섰다.'“그나저나 널 여기에 두고 내가 편히 쉴 수나 있을는지.”'“언니도 참, 걱정 마셔, 발바닥에 땀나도록 분골쇄신 할 테니!”'팔뚝까지 들어 보이며 걱정 말라는 세영의 말에 은희는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대학 때부터 알고 지낸 세영은 언제나 씩씩했다. 사막에 내놓아도 전갈을 벗 삼으며 살아갈 아이, 남녀 할 거 없이 늘 똑같은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런 대담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던지 졸업 후, 갑자기 인터넷으로 구두장사를 덜컥 벌여 모두를 놀라게 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현재는 집에서 뒹굴뒹굴 놀고 있는 거였다. 은희는 때마침 출산휴가를 얻기 위해 임시로 자신을 대신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세영은 그야말로 천사가 데려다 준 하늘의 선물이었다. '“그래, 세영아. 내가 올 때까지 꼭 붙어 있어야 한다.”'“그야 당연하지.”'아무것도 모르고 싱그러운 웃음을 짓는 세영을 보자 은희의 양심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은희 역시 높은 연봉만 아니었다면 일분일초도 이곳에 있지 않았을 터였다.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내저으며 마다하는 일명 ‘개부사장’의 비서노릇이 옛날 백정의 대우만큼이나 혹독하였으니 그녀가 4년 동안 버텨온 것은 신선도 놀랄 만큼의 끈기와 오기의 결실이었다. '부사장은 한마디로 인간을 가장한 악마였다. 일에 미쳐 날뛰는 개념 없는 악마. 자신의 비서를 끊임없이 괴롭히며 일을 시키는 악당 중의 악당. 은희를 제외하고 그동안 이곳에서 일주일을 버틴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 그리고 비서를 개처럼 부리는 상식 없는 상사 밑에서 누가 일을 하겠는가? 그나마 높은 연봉이 이 자리를 노리게 하는 유일한 이유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개부사장을 만나는 순간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연약한 유리잔에 불과했다. '“근데 언니, 진짜로 월급 이만큼 주는 거 맞아?”'아무것도 모르는 세영이 기다란 손가락 세 개를 보기 좋게 펼치며 은희 눈앞을 왔다 갔다 했다. 은희는 순간 앞으로 세영이 겪어야 할 모진 일들이 떠올라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하지만 평소 세영의 천하태평, 낙천적인 성격을 생각해 가까스로 흐트러진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실수하지 말고 잘해야 해.”'“하하, 걱정 마시라니까.”'세영의 듬직한 대답에도 은희의 얼굴에선 먹구름이 가시질 못했다. 은희는 일주일간 세영에게 인수인계 겸 비서교육을 시키긴 하였으나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치지 못했다. '“하필이면 이런 중요한 때에…….”'“뭐가?”'“부사장님 말이야. 해외출장이 걸리는 바람에 아직 얼굴도 못 봤잖니.”'“괜찮아. 내일 보면 되지. 내일은 출근하는 거 맞지?”'“일정으로 보면 내일 오실 예정인데, 또 모르지? 일이 더 지연될 수도 있으니.”'“많이 지연돼 한 달 정도 있다오면 좋겠다. 그럼 난 완전 편할 텐데.”'“뭐? 하하, 세영이 너도 참…….”'은희가 세영의 터무니없는 바람에 너털웃음을 날리며 책상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자, 우리도 이제 슬슬 퇴근할 준비를…….”'그 때였다. 쾅!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있던 비서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곤 짙은 잿빛 정장을 차려입은 장신의 남자가 그녀들 앞을 성큼성큼 지나갔다. 기척도 없이 들이닥친 남자를 보더니 은희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앗, 부사장님!”'작지 않은 목소리였음에도 부사장이란 사람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는지 쌩하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언니! 저 사람이 부사장?”'부사장의 갑작스런 등장에 세영이 궁금하다는 듯 은희에게 달려들었으나 은희는 대답 대신 탕비실로 재빨리 몸을 옮겼다. 그리고 그 뒤를 세영이 졸졸 따랐다.'“언니? 저 사람 부사장 아니야?”'“맞아.”'은희는 원두를 기계 안에 넣고 작동 버튼을 눌렀다. '“근데 부사장치고는 너무 젊은 것 아닌가? 이거야 언니한테 들은 것보다 더 젊어 보이잖아! 얼핏 보니까 얼굴도 잘 생긴 것 같더만.”'“왜 관심 있니?”'은희는 부사장 전용 컵을 준비한 뒤 빠르게 내려오기 시작한 원두커피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언니도 참! 내가 잘 생긴 놈 좋아하는 거 봤어? 잘 생긴 것들이 꼭 인물값 해요. 남자란 말이야, 인물보다 성격이거든. 자고로…….”'“어쨌든 네가 보기에도 부사장님이 잘 생겼단 말이잖아?”'“뭐, 얼핏 보기엔 꽤 스타일이 좋아 보이더라 말이지.”'“풋…… 부사장님을 성격이 아니라 외모로 판단할 수 있는 네가 부럽네.”'“응? 그게 무슨 소리야? 언니 눈엔 부사장님이 잘생기지 않았단 말이야?”'은희는 내려진 원두를 커피잔에 조심히 옮긴 뒤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말고 따라와!”'세영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은희의 굳어진 얼굴을 보며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부사장실 앞에 선 은희가 개미만 한 목소리로 세영에게 당부했다. '“자, 봐봐. 조금 전처럼 부사장님 표정이 안 좋다 싶을 땐 블랙커피를 타야 돼. 그것도 무조건 갓 뽑은 원두로 말이야. 그리고 표정이 조금 부드럽다 싶을 때는 블랙에 설탕 한 스푼을 넣고. 알아들었지?”'“오케이.”'은희는 고개를 끄덕이는 세영을 잠시 바라본 뒤 크게 심호흡을 하며 문을 두드렸다. '똑똑.'-…….-'안에선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세영은 은희를 대신해 다시 문을 두드리려 손을 내밀었다. 그 때 은희가 세영의 손을 만류했다.'“원래 부사장님은 대답을 안 하셔.”'“뭐?”'“이렇게 노크를 했을 때 대답이 없으면 그냥 들어오라는 뜻이야.”'은희는 살며시 문을 열곤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부사장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초점 없는 눈으로 책상 위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사장님, 여기 커피입니다.”'은희가 조심스레 커피를 올려놓았으나 부사장은 혼이 빠져나간 시체처럼 무반응이었다. '세영은 은희의 뒤에 서서 자신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부사장을 꼼꼼히 뜯어봤다.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턱 선에 진한 눈썹, 속 쌍꺼풀진 깊은 눈매, 그 위를 촘촘히 메운 기다란 속눈썹, 일자로 다문 섹시한 입술선이 정말 예술적인 조합이었다.'‘드럽게 잘 생겼네!’'부사장은 비서가 자신의 눈앞에 내려놓은 찻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금방이라도 얼음 광선이 튀어나올 것처럼 냉기를 흩뿌리고 있었다.'“저…… 부사장님.” '은희의 부름에도 남자의 눈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제 대신 근무할 이세영 씨입니다.”'“처음 뵙겠습니다. 이세…….”'은희의 소개에 세영이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남자는 귀찮다는 듯 손을 들어 나가라는 표시를 했다.'“알았으니까, 퇴근해.”'“어……?”'세영은 벌어진 입을 다물며 은희를 쳐다보았다. 은희가 고갯짓으로 나가자는 뜻을 내비쳤다.'“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퇴근하겠습니다.”'은희는 상사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는 세영을 데리고 부사장실을 나왔다.'“언니. 저 사람, 진짜 부사장 맞아?”'“왜?”'“아니, 사회성이 모자란 것 같아서. 어떻게 저런 사람이 부사장이지?”'“호호, 저래 봬도 일에 있어선 완전 칼이야. 타고났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저 나이에 저 성격에 부사장 자리에 있지.”'“왠지 엄청 성격 나쁠 것 같은데?”'“하……하하, 이만한 월급에 저 정도 상사면 할 만하지 않니? 게다가 내가 말했잖아. 부사장님 성격 안 좋다고. 혹시 벌써 겁먹은 거니?”'“아니, 겁을 먹은 건 아닌데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서.”'“그, 그런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앞으로 열심히 일할 생각이나 해. 네 성격이면 잘 견뎌낼 거야.”'은희의 말에 묘하게 설득된 세영은 잠시나마 들었던 불안함을 떨쳐내고 즐거운 마음으로 가방을 챙겼다. '“하긴 평생 일할 것도 아니고, 언니 대신 잠깐 있을 건데 부사장 성격이 나쁘면 뭐 어때? 호호.”'세영이 의자에 걸쳐져 있던 재킷을 들어 올리며 웃자 은희는 힘들게 미소를 머금었다.'“그래…… 난 너의 그런 낙천적인 성격이 좋더라.”''세영은 난생처음 자명종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오늘부터 정식출근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설렘에 절로 눈이 떠진 것이다. 간단하게 아침을 챙겨먹은 그녀는 깔끔한 치마정장을 차려입은 후 한동안 잊어먹고 있던 화장법을 되살려 왕년의 미모를 되살렸다.'세영은 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자연스럽게 푼 채 거울 앞에 섰다.'“이러다 부사장이 나한테 뻑 가는 거 아니야?” '장난스럽게 말을 뱉은 세영은 질끈 하나로 머리를 모아 묶은 뒤 현관으로 갔다. 그리곤 얼마 전 쪽박 찬 쇼핑몰 사업에서 건진 수많은 구두 박스를 바라보며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음…… 오늘은 어떤 놈을 사랑해줄까?”'촘촘히 쌓여있는 상자 중 하나를 들어 올린 그녀는 심플하고 단정한 그리고 굽이 높지 않은 구두를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