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현 씨, 저예요.”'-음.'간결하게 들려오는 낮고 그윽한 목소리에 유진의 입가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지금 도착했어요.”'-혼자?'‘피이, 누구하고 왔는지 다 알면서.’'유진은 경호원인 경진에게 벌써 보고를 받았을 텐데 모르는 척하는 준현이 귀여웠다. 슬쩍 경진을 바라보니 단정한 단발머리에 블랙슈트를 입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사장님하고 왔어요. 30분 후면 인터뷰 시작이니까 그전에 인사하고 질문지 체크하려고요.”'-그래.'“끝나고 전화할게요.”'-음.'“준현 씨, 보고 싶어요.”'-…….'나직하게 속삭인 유진은 대답은 없지만 입매를 끌어올리고 있을 준현의 모습을 그려보았다.'“그럼 저 이제 일하러 가요. 이따가 봐요.”'환한 미소를 짓고 전화를 끊는 유진을 보며 출판사 사장인 수정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놀렸다.'“나도 우리 신랑한테 전화라도 하든지 해야지 샘나서 못살겠네. 그렇게 시간마다 전화할 거면 아예 주머니에 넣고 다니지, 보고 싶어서 어떻게 참는데?”'살짝 볼을 붉히는 유진의 모습이 너무 예뻤다.'“유진 씨 점점 예뻐지는 걸 보니 사랑이 좋기는 좋구나.”'“그만 놀리세요. 여기예요?”'마크가 머무는 스위트룸 앞에 선 수정은 벨을 눌렀다.''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보던 마크는 벨소리가 나자 문가로 다가가려는 매니저 겸 경호원인 토니를 제지하고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을 열자 통통한 체격에 키가 작은 여자와 184센티인 자신의 어깨에 닿는 도자기처럼 하얗고 투명한 피부가 눈에 확 들어오는 여자, 그리고 단정한 단발머리에 175는 족히 되어 보이는 블랙슈트를 입고 날카롭게 눈을 빛내는 여자가 서 있었다.'마크는 한눈에 유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은은한 광택이 있는 핑크색 블라우스에 단정한 바지정장을 입은 여자가 유진일거라는 자신의 느낌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이 들었다.'“어서 오세요.”'자신의 첫 작품을 번역해 준 유진이었다.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의도를 너무 잘 캐치해 번역을 해준 유진에게 진심으로 감사했고 유진은 모르겠지만 이번 한국방문에 통역으로 유진을 지명한 것도 마크였다. 메일을 통해서였지만 서로 생각이 잘 통하는 것 같아 마크는 유진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리고 그녀를 직접 보고 싶어 출판사를 통해 유진을 통역사로 섭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출판사 사장인 수정과 인사를 하고나자 유진이 인사를 했다.'[안녕하세요. 정유진입니다. 이렇게 직접 만나게 돼서 너무 기뻐요.]'[유진, 반가워요. 꼭 만나보고 싶었어요.]'직접 유진을 만난 마크는 심장이 떨렸다. 별들이 반짝이는 까만 밤하늘을 옮겨놓은 듯 맑게 빛나는 깊고 검은 눈동자에 속절없이 빠져들 것만 같았다. 작지만 날렵하고 오뚝한 콧날이 앙증맞았다. 투명 립글로스를 바른 입술은 건강한 붉은색으로 반짝이며 당장이라도 맛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켰고 환하게 빛나는 미소에 한쪽 뺨에 동그랗게 들어가는 작은 볼우물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그리고 그 무엇보다 유진의 비어 있는 손가락이 마음에 들었다. 길고 가늘어 섬세해 보이는 하얀 손가락에는 반지도, 반지를 꼈던 흔적도 없어 마크를 미소 짓게 했다.'[저도 꼭 만나 뵙고 싶었어요.]'부드러운 금발 머리카락에 지중해 바다를 닮은 눈동자를 가진 마크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도 유명하지만 웬만한 배우들보다도 수려한 외모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반하고 매력적인 외모에 다시 한 번 반하게 되어 열렬한 팬이 되고 있었다.'유진도 마크의 작품을 좋아했다.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다정한 위로와 힘을 낼 수 있는 용기와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글을 사랑했다.'[오늘 잘 부탁할게요, 유진.]'[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은성호텔 컨벤션홀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마크의 인터뷰 통역을 맡은 유진은 많은 기자들의 열띤 취재경쟁에 긴장을 좀 했지만 다행히 큰 문제없이 행사를 마무리했다.'[정말 고마워요. 감사의 의미로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싶으니 부디 거절하지 말아줘요.]'인터뷰가 끝나고 기자들이 모두 돌아가고 유진과 수정을 배웅하는 마크는 누구에게나 가슴 떨리게 한다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매력적인 눈웃음을 보이며 유진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하지만 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거절했다.'[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해요. 남은 일정 즐겁게 보내시고 한국의 아름다움을 맘껏 느끼시길 바랄게요.]'[유진이 가이드를 해 주면 안 될까요?]'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려는 유진에게 마크는 다급하게 가이드를 해달라고 청했다.'[가이드를요?]'[제발. 이렇게 부탁할게요. 난 진심으로 유진이 가이드를 해줬으면 좋겠어요.]'누구라도 혹할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조르는 마크의 모습에 유진은 피식 웃음이 났다. 마크를 1년 전에만 만났어도 그의 매력에 홀려 부탁을 들어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냥 자신이 좋아하는 글을 쓴 작가라는 생각 외에 다른 감정은 전혀 생겨나지 않았다.'[저도 그러고 싶지만 시간이 안 될 것 같아요. 정말 미안해요.]'[너무 아쉽네요.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꼭 연락 줘요.]'[네. 그럴게요. 그리고 사인본 고마워요.]'유진은 책이 담긴 쇼핑백을 들어 보이며 감사를 전했다. 마크는 유진에게 감사의 의미로 그동안 펴낸 책 다섯 권에 사인을 해서 선물로 주었고 유진은 너무 기뻐했다.'[한국을 떠나기 전에 꼭 식사라도 함께 해요. 그래 줄 거죠?]'마크는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간절히 부탁했고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좋아하고 존경하는 작가이니 식사 대접을 하고 싶었다.'[알았어요. 제가 한국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모실게요.]'[약속했어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마크는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유진을 가볍게 포옹하고 볼에 입술을 댔다. 유진은 그가 외국인이라는 점을 감안해 부담을 느끼지 않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마크가 갑자기 자신의 허리를 안아 강하게 잡아당기는 힘에 놀랐다.'“헉!”'놀란 그녀의 눈에 준현과 준현을 그림자처럼 보좌하는 차 실장이 들어왔다. 유진의 입매가 저절로 휘었다.'“준현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준현은 유진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유진의 허리를 단단히 잡아 품에 가두고 매서운 눈빛으로 마크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낮게 으르렁거렸다.'[여긴 한국이야. 내 여자에게 그런 식의 인사 불쾌하군.]'마크는 184센티인 자신보다 더 크고 탄탄한 체격에 동양인치고는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강한 인상의 준현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위협하듯 매섭게 노려보며 던지는 준현의 말에 마크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도전적인 표정으로 자극했다. 자신의 말이 억지스럽다는 것을 알지만 그는 이대로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미련이 너무 크게 남았다.'[유진이 당신 여자라고? 하지만 그녀의 손에는 반지도 없던걸? 당신 혼자만의 착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