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 입국장에 나온 서리는 자기를 마중 나온 사람을 찾았다. 스키니 청바지를 입고 위엔 간단한 티셔츠의 평범한 차림이긴 하지만 워낙 미모가 뛰어나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씩 눈길을 주는 데도 그녀는 알지 못한 채 자기가 찾는 사람을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그 앞으로 다가갔다.'“박 비서님, 무슨 일로 아버지가 절 찾는 거죠?”'“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아가씨! ……차에 오르시지요?”'박 비서는 자동차 뒷좌석 문을 열었다. 하는 수 없이 차에 오른 서리는 왜 아버지가 자길 찾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학기 도중에 이렇게 어중간하게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유학 생활 7년 동안 한국은 단 한 번 방문했었다. 4년 전 언니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방문하고는 처음이었다.'차는 도심을 한참을 달려 어느 빌딩 앞에 섰다.'박 비서가 뒷좌석 문을 열자 바로 내린 서리는 박 비서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는 17층에 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서리는 회장실로 들어갔다.'“아빠! 왜 절 부르셨어요? 저 아직 공부가 다 안 끝났는데…….”'들어가자마자 말을 마치고 소파에 앉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았다. 한참의 침묵이 긴장감을 조성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버지이지만 서리를 주눅 들게 했다. 한참 서류를 쳐다보던 아버지는 얼굴을 들어 서리를 바라보았다.'“너 공부하라고 미국에 보내났더니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게냐?”'“네에?”'“너 하라는 경영 공부는 안 하고 쓰잘데기 없는 영화공부를 하고 있다며?”'“어떻게 아셨어요?”'“우연히 알게 되었다. 네가 다니는 학교엔 자퇴서를 보냈다. 여기서 다시 경영학과에 들어가서 공부하도록 해라. 미국의 아파트는 다 정리했다.”'윤 회장의 말에 서리는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손을 떨면서 그래도 자기주장을 하기로 했다. 서리는 사업엔 관심이 없었다. 다양한 인간의 삶을 표현할 수 있는 연기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영화 쪽으로는 알아준다는 UCLA에 가기 위해서 중학교 3학년 때 유학 코스를 밟은 것이다. 물론 아버지의 눈을 피해 일단은 경영 쪽으로 공부를 했다. 이제 1년만 더 있으면 졸업인데, 아버지한테 들키고 말다니.'“저 경영학과로 입학해서 방송영화학과로 전과했어요. 전 연기가 하고 싶어요. 경영 공부해서 회사 다니는 것은 싫어요. 아빠에게 저 말고도 오빠가 있잖아요.”'“너한테 그런 공부시키려고 미국까지 보낸 줄 아냐? 우리 가문엔 배우나부랭이는 필요 없다. 넌 다른 누구보다도 머리가 좋아. 넌 사업을 해야 될 아이야. 연기가 아니라…… 물론 진후는 후계자이니 더 이상 말할 것도 없고, 넌 조용히 경영학을 공부해서 회사에 다니면 되는 거야. 그러다가 적당한 상대를 만나면 결혼해도 좋고 말이다.”'“싫어요. 전 언니처럼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되긴 싫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일도 못하고 결혼도 제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하지 못하는 이런 인생은 살기 싫어요.”'거칠게 뱉는 서리는 눈에 불꽃을 품고 있었다. 사실 아버지께 자기가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고 죽은 듯이 살고 있는 언니가 불쌍했다. 어려서 잘 모르지만 서리의 언니는 집안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실의에 빠져 있다가 사업상 정략적인 목적으로 태일그룹의 둘째 아들과 결혼했다. 그 둘째 아들이 재계에 소문난 바람둥이였던 것이다. 서리가 듣기로는 지금도 그 형부라는 사람은 밖에 애인을 만들어 두 집 살림을 한다고 들었다. 물론 언니도 그 남자에게 애정이 없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여자이다 보니 집안에서 순종하고 살고 있는 듯했다.'“지금 잘 살고 있는 네 언니가 어때서? 네 언니는 말 그대로 얌전한 양가집 규수다. 그런 언니를 모욕하지 마라. 그리고 넌 나의 성격을 많이 닮았다. 물론 얌전히 집에서 시키는 대로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너에게 밖의 일이라도 할 수 있도록 자유를 준다는데.”'“저는 그 자유가 싫단 말입니다. 제가 원하는 삶이 아니에요. 전 죽어도 연기하는 걸 포기 못해요. 아버지가 시키는 삶은 살지 않을 겁니다. 전 제 인생을 누가 정해 주는 그대로 삶의 목표 없이 살긴 싫어요. 제가 저의 목표대로 개척하고 살 겁니다.”'서리는 더 이상 물러나지 않겠다는 각오로 단호하게 내뱉었다. 두 주먹을 꼭 쥐고 윤 회장을 노려보고 있었다.'“흥, 시키는 대로 살기 싫어? 인생의 지혜를 가진 어른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네가 배우로 성공한다는 보장이 있느냐?”'“길고 짧은 것 대 봐야 아는 거예요.”'“자꾸 우길 거냐? 좋다. 그럼 널 집안에서 쫓아내도록 하지. 한 푼도 없이 말이다. 유언장에서도 빼도록 하겠다. 내 재산은 한 푼도 물려주지 않겠다. 그리고 부녀의 연을 끊도록 하지. 전혀 나에게 도움을 받을 생각은 하지도 마라.”'낮고 시크한 목소리로 말하는 아버지를 보며 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윤 회장은 하겠다고 하면 그대로 진행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니 분명 자기 입으로 뱉은 말이니 그대로 지킬 것이다.'“쳇, 아빠는 돈 밖에 모르시나요? 돈 말고도 세상엔 가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좋아요. 전 그깟 재산에 미련 없어요. 대신 제가 무슨 일을 하든 상관하지 마세요. 딸 하나 없는 셈 치세요.”'“좋다. 네가 배우로 얼마나 성공하는지 지켜보도록 하지. 다만 우리 집안에 누를 끼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야. 넌 오늘부터 윤성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조만간 두 손 들고 집으로 돌아오지나 마라. 나가 봐라.”'두 손을 불끈 쥐고 캐리어를 끌고 나온 서리는 죽어도 아버지한테 도움을 청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윤성빌딩 밖으로 나온 서리는 막막했다. 갈 곳이 없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유학을 떠난 서리는 한국에 친구도 거의 없었다. 있어도 이제 대학교 2학년인 그들이 서리를 위해 무얼 도와줄 수 있겠는가. '“체엣, 누가 그까짓 돈이 욕심난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정말 하고 싶을 뿐이라고, 까짓것 뭐, 집에서 쫓겨나면 무서울 줄 알아! 근데 어디로 가지?”'한참을 서서 고민을 하던 서리는 일단 걷기로 했다. 한참을 걸었다. 공중전화라도 걸려고 찾아보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하긴 요즘 휴대폰이 대세인데 누가 공중전화를 사용하겠는가? '‘어떻게 하지? 이젠 정말 무일푼이고 잘 곳도 없는데…….’'일단 큰 대로를 벗어나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 들어갔다. 급하게 오느라 갖고 있는 돈을 환전도 못한데다가 대부분 아버지가 주신 카드를 사용하다 보니 수중에 있는 돈도 넉넉하지 않았다. 커피숍에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은 서리는 커피를 주문하고 전화를 빌려 언니에게 전화했다. '“언니! 나, 서리. 나 지금 한국에 들어와 있어. 언니가 와서 도와줘. 나 돈도 한 푼도 없어. 여기 아빠 회사 근처의 커피숍인데, 나 좀 데리러 와. 전화도 빌려서 하는 거야.”'-왜?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음, 일단 언니, 만나서 이야기 하자.”'-금방 갈게.'1시간 후에 언니가 커피숍 안으로 들어왔다. 서리의 언니 혜리는 서리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서리와 혜리는 10살 차이가 나는 자매 사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이긴 하지만 둘은 친구처럼 사이좋게 잘 지냈다. 사실 서리가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가는 바람에 둘이 같이 지낸 시간은 짧았지만 사이가 좋은 자매였다.'“언제 한국에 들어온 거야?”'“오늘, 아빠한테 불려 왔어.”'“왜?”'“나 들켰어. 영화 공부하는 것…… 그래서 집에서 쫓겨났어. 지원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유산도 한 푼도 안 주신대. 원래 유산엔 관심도 없지만 말이야. 언니, 나 갈 데가 없어. 어떻게 해야 될지. 한국엔 아는 사람도 없고, 언니밖에 믿을 사람이 없더라구. 진후 오빤, 아빠와 마찬가지로 반대할 게 뻔하고. 우리 집에서 내 편인 사람은 언니 밖에 없어. 이럴 땐 정말 엄마가 살아 있었음 한다니까.”'“우선 우리 집으로 가자. 너희 형부 출장 가서 며칠 안 들어올 거야.”'서리는 혜리를 따라 혜리네 집으로 갔다. 혜리네 집은 일산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급스런 주택이 줄지어 서 있는 빌라 촌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경비초소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혜리가 사는 집이 눈에 들어왔다.'“일단 쉬어. 시차 때문에 피곤할 텐데. 우리 생각해 보자. 좋은 해결이 날 수 있도록, 문제는 네가 지낼 곳인데, 여긴 나 혼자 사는 집이 아니니 조그마한 오피스텔이라도 하나 얻어 줄게. 이 언니가 그 정도 능력은 있어. 큰 것은 안 되지만.”'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서리를 손님방으로 밀었다.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니 피곤이 조금 가시는 것 같다. '‘그래 지금은 한잠 자자. 피곤해 죽겠네. 머리가 무거워 생각도 안 난다.’'“침대가 나를 부르는구나. 아 침대여 내가 간다. 기다려라.”'과장된 연극 톤으로 내뱉으며 침대에 털썩 엎드렸다. 침대에 엎드리자마자 잠이 들었다. '좋은 꿈을 꾸는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서리는 공주도 되었다가 커리어 우먼도 되었다가 메이드도 되었다. 배역을 받아 연기를 하는 꿈을 꾼 것이다.'''*****''그렇게 꼬박 하루를 자고 일어났다. 잠이 깨자마자 기지개를 폈다. 우두둑 몸에서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니 언니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몇 시야?”'“후후후 너 하루 꼬박 잤어. 시차 때문에 많이 힘들어? 배고플까 봐 식사 준비했어. 지금 오후 3시야.”'“아니 그건 아니지만, 음식 냄새 맡으니 갑자기 배가 고파지네?”'식탁에 앉아 언니가 차려 준 가정식을 먹으니 갑자기 목이 메여왔다. 서리의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서리는 엄마의 손길을 많이 느껴 보지 못했다. 이렇게 밥을 먹어 본 지도 얼마만인지. 미국에서는 공부에 쫓겨 간단히 빵 같은 것으로 해결했었다. 아주 가끔 한국이 생각날 때면 LA 한인 타운에 가서 한국 식당에서 밥을 사먹기도 했다.'“언니, 너무 맛있다. 나 너무 오랜만이야. 이런 식사.”'“그래 많이 먹어. 참 내 친구 중에 극단 하는 친구가 있어서 너의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 극단에서 자질구레한 잡일하면서 연기 공부해 보지 않겠냐고 하더라. 넌 어때?”'“정말? 나 할래. 지금은 무엇이라도 잡아야 되니까. 아빠한테 꼭 성공한 내 모습 보여주고 말 거야.”'“아버지도 널 이해하게 될 날이 곧 올 거야.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 마.”'“응. 그럴게 언니 아니었으면 난 어쩔 뻔했을까? 언니가 나에겐 엄마나 마찬가지야. 고마워. 난 언니 때문에 힘을 얻고 사는 것 같아.”'“나도 네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넌 나에게 소중한 동생이니까.”'“고마워 언니 이런 동생 때문에 언니가 고생하는 것 같아.”'벌써부터 배우가 된 듯 서리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부 활동을 하면서 어느 정도 기초는 잡혀 있었다. 여기 오기 전엔 가끔 할리우드에서 단역으로 출연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한국에선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므로 초심으로 돌아가 열심히 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서리는 극단에서 잡일을 하며 단역배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