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누가 그랬더라. 표준은 폭력이고 맞춤은 감옥이라고. 언제 어디에 적절히 활용해야 할 말인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현아는 어느 때 그 같은 내용을 주워듣고 화르르 타오르는 마음으로 볼펜심에 침 묻혀가면서 자신의 너덜너덜한 수첩에 적어놓았었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녀는 스스로 어느 면에서나 평균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남들과 다르게 성장해왔다. 어려서부터 또래의 아이보다 신장이 월등히 컸고 인형놀이를 하기보다 동네 개구쟁이들과 어깨동무하며 골목대장으로 군림하기를 좋아했다. 사춘기 시절 보통의 여자애가 가져야 할 감성도 없었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너나 할 것 없이 손가락질을 해댔지만 그녀는 결코 위축되거나 의기소침해 하지 않았다. 그럴 때일수록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고 전투적으로 살아갔다. '현아는 그런 억세고 숨 가쁜 역사를 지나쳐 오늘에 이르렀다. 그녀와 퍽이나 잘 어울리는, 곤충의 제왕이라 불리는 ‘버마재비’라는 별명을 가진 강력계 열혈 여형사가, 죽기 살기로 목숨 바친 천직이 된 것이었다. '쾅! 어김없이 푸른빛을 등에 업은 현아가 으스스한 효과음을 내며 등장했다. '“모두 동작 그만!” '뿌옇게 일어난 먼지가 가라앉아 바퀴벌레 모양 음습한 지하실에 숨어 있는 폭력배들은 일제히 놀란 눈이 되어 하늘 높이 판돈을 뿌리고 요란하게 흩어졌다. '“쥐새끼 한 놈도 기어나가지 못하게 막아!”'서릿발 같은 그녀의 호령이 독 안에 든 쥐들을 제압했다. '방향 못 잡고 사시나무 떨듯 벌벌대는 쥐는 군중심리를 따라 누가 이리로 가면 이쪽으로, 저리로 가면 저쪽으로 우르르 몰려다녔다. 거대한 올가미가 있다면 한끝으로 쓸어 잡을 수 있겠다. '그런데 개중에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쥐 한 마리가 대열을 벗어나 경찰이 알아채지 못한 개구멍으로 몰래 빠져나갔다. 운수 나쁘게도 하필이면 현미경과 같은 그녀의 시야에 딱 걸리고 말았다. '언제나 늘 그래왔듯이 현아는 익숙하게 동네 언덕바지 길을 미친개처럼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거친 바람과도 같은 사내로 보였다. 계절을 잊은 듯한 국방색 후드 사파리와 밑단이 걸레짝처럼 헤진 카고 바지는 세상에 상품으로 나온 이후로 물빨래라는 걸 해보았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일 년 사계절 내내 현아의 고정 패션이었다. '아까부터 쥐새끼 하나를 쫓고 있는 현아는 꼭 잡고 말겠다는 집념으로 온몸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쫓기고 있는 쥐는 노점상에게서 ‘삥’ 뜯는 양아치 같은 조폭 수준의 광호였다. 광호는 양 팔뚝에 새긴 문신을 드러내고 범 무늬 셔츠를 펄럭이며 열심히 뜀박질했다. '언뜻 뒤를 돌아본 광호는 현아가 마치 사방에 침 튀기며 달리고 있는 광견인 것 같아 흠칫 놀랐다. '“지치지도 않는당가. 어쩐디야.”'광견에게 물리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것처럼, 광호는 벌써부터 바이러스에 전염된 듯 헉헉대고 분출되는 콧물을 공중으로 퍼뜨렸다. '곧 잡힐 듯 말 듯한 공포에 휩싸인 광호가 느닷없이 도로 안으로 몸을 던져 달리는 자동차를 가로막았다. 어느 때보다 거칠어 보이는 현아도 주저 없이 도로로 뛰어 들었다. 덕분에 동네가 떠들썩하도록 자동차 클랙슨이 울려댔다. 무단 횡단하는 두 사람은 곧 사거리 교차로 혼잡의 주범이 되었다. 오도 가도 못하고 서게 된 자동차들은 꼬리 물기로 늘어지고 말았다. '광호는 재래상가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우중충한 회색빛 건물 안으로 몸을 피신했다. 현아는 그때까지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광호를 쫓았다. 끈을 꽉 묶은 현아의 흰 운동화가 노면에 닿아 착착 감기며 전속력을 다했다. '“넌 뒈졌어!”'비상계단으로 올라서는 현아가 비대칭으로 자른 커트 머리를 쓸어 넘겼다. 왼쪽 머리가 앞머리처럼 흘러 내려와 가끔씩 눈을 찔렀다. 지난주 대중목욕탕을 다녀오는 길에 보이는 대로 들어간 미용실에서 게이 같은 헤어디자이너가 장난질해 놓은 머리였다. 믿거나 말거나 하는 식으로 올 여름에 유행을 선도할 헤어스타일이라는데, 유행이고 나발이고 당장이라도 바리캉으로 밀어내고 싶었다. 불편하고 귀찮은 건 용서가 안 되었다. '그 헤어 탓인지 현아는 더욱 샤프한 느낌이었다. 누구든 자신에게 대거리를 걸어오면 아오지 탄광 혹은 지옥행 예약이라고 쓰여 있는 듯 신념이 확고해 보이는 이목구비에 카리스마가 넘쳤다. '현아는 입김을 불어 머리칼을 치우고 호리호리하고 날렵한 몸을 공중 부양하듯 층계를 날아올랐다. '“그만 서, 새끼야!”'광호는 필사적으로 도망치다가 결국 옥상 끝에 다다르자 갈 곳이 없다는 걸 판단하고 번뜩 돌아섰다. 광호의 손에는 이미 잭나이프가 쥐어져 있었다. '현아는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쪼개고 헐떡이는 거친 숨을 진정시켰다. '“광호야, 그 애들 연필 깎는 연장 따위는 집어치우고 누님이랑 조용히 가는 게 어떠냐? 누님이 몹시 피곤하거든. 응?”'“가까이 오지 말드라고, 뒈진당께.” '겁먹은 기색이 역력한 광호가 제 자식 눈깔사탕까지 훔쳐 먹던 용기까지 끌어 모아 나이프를 흔들어 위협했다. 반면 현아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자 광호는 한 발을 쑥 내밀고 허공에서 쓱 그어 보는 시늉을 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현아는 바지에 똥 싼 것 같은 광호의 어정쩡한 자세에 낄낄 웃고 안타깝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가지고는 똥개 한 마리도 못 담그겠다. 그러고도 네가 깍두기라 할 수 있냐. 어찌 그렇게 세상을 만만하게 사냐. 내가 다 부끄러우니까 그 야시시한 셔츠로 가리고 있는 용가리 문신은 당장 지워라.” '“긍께 무고한 시민헌테 왜 이러는 것이여?”'“뭐가?”'“봐주기로 약속했잖여?”'광호는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듯 이 악물고 대들었다. 명색이 태어날 때 금줄에 고추를 달아놓은 남자가 자신의 반쪽만 한 여자 하나 자빠뜨리지 못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여자도 여자 나름이었다. 현아는 예외였다. '앞서 말했듯이, ‘버마재비’라고 하지 않았는가. 난폭한 포식자이자 곤충세계에서 깡패로 불리는 그 사마귀이다. '현아는 반 친구들이 교생을 짝사랑하고 연애편지에 골머리를 쪼개고 있을 무렵부터 태권도, 유도, 검도, 특공무술 등 격투기를 배웠다. 그리고 동창생들이 청첩장을 보내고 출산 소식을 전해 올 때 배운 격투기들을 실전으로 모두 통달했다. '예를 들어 뱀처럼 유연하게 손목의 빠른 스냅을 이용한 정권 찌르기나 새처럼 가볍게 날아 공중돌려차기를 하는 건 현아의 주특기였다. 기(氣)의 숨결 또한 잘 읽을 줄 알아 급소를 정확히 가격할 줄 알았다. 오죽했으면 날아가는 파리도 이쑤시개로 튕겨 기절시켜 떨어뜨릴 수도 있다고 할까. '그처럼 광호가 무서워하는 데 이유가 있었던 거다. 그들 네트워크에서는 현아에게 깝죽거리다 절명한 놈이 한 둘이 아니라는 괴괴한 소문이 퍼져 있었다. '“아이고, 순진하게 다 믿었어? 상황이 달라졌거든? 억울해도 어쩔 수 없어. 이게 세상의 이치니까. 후후.”'“염병 떤당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