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두 개의 시선이 비스듬한 궤적을 그리며 허공에서 부딪힌다.'마루로 올라서려던 지한은 신발을 벗는 동작을 멈추었다.'지한이 정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새삼 둘러볼 필요가 없는 것이 분명한 그의 집 거실에 앉아 있는 웬 낯선 여자 역시 자신을 놀란 눈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그가 불청객인 양 ‘어라?’라니. 그 황당한 중얼거림에 덧대어 끈소매 티셔츠와 헐렁한 반바지는 그야말로 완벽한 안방 패션이다. 거실 텔레비전 앞에서 너무나 편하게 앉아 있는 그 모습은 고등교육 2년차를 받고 있는 지한에게 미아가 된 기분을 강요하고 있었다.'서로 마주 본 사이로 거실 괘종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다. 째깍. 째깍. 째깍.'“……누구세요?”'“류지한!”'당연한 질문이었건만 돌아온 대답은 모든 예상을 뛰어넘었다. 설마 동명이인이란 건 아니겠지, 내심 실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는 지한에게 여자가 반색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지한이, 맞지? 이름이 금방 생각이 안 났어. 만날 아들, 아들 소리만 들어놔서.”'엄마와 아는 사이란 뜻이다. 친구라기에는 많이 어린데. 아무렇게나 묶어 틀어 올린 머리와 화장기 없는 맨얼굴이었지만 이십대 초반이 분명해 보였다. '지금 이 순간 중간에 있어줘야 할 징검다리가 오늘 아침 비행기로 호주에 출장을 갔다는 사실을 지한이 떠올리는 찰나 여자가 손짓했다.'“뭐 해, 들어와.”'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나와 버릴까 걱정될 만큼 자연스러운 말투다. 약간 거부감이 들었지만 지한은 일단 가방을 벗고 넓은 탁상을 사이에 둔 채 맞은편에 앉았다. 오는 길목 공터에 처음 보는 붉은색 승용차가 세워져 있던 것이 되새겨진다. 그러려니 했는데 설마 나와 상관있는 것일 줄이야. 지한을 살피던 그녀가 감탄하듯 말했다.'“직접 보니까 상상했던 거랑 또 다르네. 엄마 닮았으면 제법 작품이겠다는 생각은 했지만.”'지한이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시원스러운 자기소개가 이어졌다.'“이렇게 만날지는 몰랐지만, 어쨌건 반갑다. 난 윤다원이야. 과장님, 그러니까 너희 엄마랑 직장에서 만나서 친해졌어.”'과장님이라. 모친이 기자로 전향하기 몇 년 전, 회사원일 당시 그 직위로 불린 적이 있다는 기억이 났다. 그럼 그 ‘몇 년 전’의 인연이라는 말인데. 지한의 의문을 짐작했는지 다원이라고 이름을 밝힌 여자가 설명을 늘렸다.'“내가 사회생활을 좀 빨리 시작했어. 과장님이 퇴사하기 전에 입사했었거든. 그땐 완전 초짜였는데 지금은 눈 감고도 다닌다니까.”'하하 소리 내는 웃음이 밝다. 낯선 남자애를 앉혀놓고 어색한 나머지 아무 소리나 늘어놓으면서 억지로 웃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지한은 조금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혹시 저희 어머니 출장 일정이 바뀌어서 놀러 오신 건가요?”'“아아, 아니. 과장님은 가셨어. 공항까지 배웅했지. 집 열쇠도 그때 받고.”'“열쇠요? 어머니한테 직접 받으셨다고요?”'“응. 과장님이 출장 가 계신 동안 집도 봐줄 겸 휴가 온 거거든.”'“예?”'“너 지난주부터 보충수업 시작했다면서? 계속 기숙사에 있을 거라고 하던데?”'“……어머니가 그러셨어요?”'“응. 마침 여름휴가도 가야겠다, 아무도 모르는 데로 가고 싶은데 돈은 없겠다, 그 참에 잘됐다 싶어서 과장님 맘 바뀌시기 전에 냉큼 온 건데…… 너 혹시 집에 아예 온 거니?”'점점 기묘하게 굳어지는 지한의 표정 변화를 알아챈 다원이 미심쩍어하며 물었다. 지한은 대답하지 않고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요, 라는 말을 남긴 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그는 문을 닫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단축번호를 길게 눌렀다. 지한이 일곱 살 때 어머니가 이혼하고 단둘이서만 살아온 이래 언제 어디로 가건 쉽게 연락할 수 있도록 해두는 것은 모자간의 불문율이었다. 예상대로 바로 연결이 되었고, 활기찬 목소리가 지한의 귓가를 두드렸다.'<아들! 생각보다 빠르네? 벌써 엄마 보고 싶어진 거야? 기특한 것!>'“……기대를 저버려서 일단 죄송하고요. 저 지금 집이거든요? 우리 집 열쇠를 엄마한테 받았다고 주장하는 저 사람 대체 누구예요?”'<아, 책이라도 가지러 갔나 보구나. 다원 씨 만났니? 인사는 나눴지?>'“태평한 소리 하신다 진짜. 저 기숙사 냉방 고장 나서 이번 주는 집에서 다녀야 한다고 말씀 드린 거 기억 안 나요?”'<뭐! 그랬어?>'그랬어, 란다. 누가 만사태평인 우리 엄마 아니랄까 봐. 지한은 눈을 굴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건 요 며칠 컨디션이 저조한 탓만은 아닐 것이다. 사적으로는 태평하고 대강 라이프를 지향하는 그의 모친이라 이런 실수가 드문 건 아니었지만 이번엔 조금 심각했다. 아니, 많이.'“어쩔까요, 바꿔 드려요? 제가 말하기는 좀 뭐한데.”'<음……아들, 그게 말이지. 미안하지만 일주일뿐인데 그냥 잘 지내주지 않을래?>'“예에?”'귀를 의심하는 말에 지한의 목소리가 저절로 커졌다. 무심코 입을 다물고 닫힌 문 쪽을 돌아보는 그에게 모친이 계속 말했다.'<어차피 너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에 오잖아. 저녁밥 먹는 것도 각자 챙겨 먹을 거고, 그럼 결국 집에서는 잠만 자는 거니까 부딪칠 일이 없을 거 같지 않아?>'“아니…… 왜요? 그냥 사정이 이렇게 돼서 미안하게 됐다고 말씀하시면요? 휴가라서 왔다는데 어차피 저쪽도 저 있는 거 안 괜찮을 거고.”'<그건 괜찮아. 다원 씨 착해. 사소한 거에 신경 쓰는 피곤한 사람 아니거든. 우리 아들도 그렇고.>'그게 뭐가 사소해요! 어이가 없어진 지한이었지만 속이 빤히 보이는 덧붙임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 작은 소리가 용케 바다를 건넜는지 모친의 목소리가 밝아졌다.'<고마워, 아들. 넌 그냥 평소처럼 지내면 돼. 사실 다원 씨는 우리 집 아니라도 상관없을 거야. 어디든 아는 사람 없는 곳이면 될 테니까. 근데 요즘 세상이 워낙 흉흉하잖니? 젊은 아가씨 혼자 무슨 일을 당할지 누가 알겠어. 그래서 마침 집이 비니까 우리 집에 있으라고 내가 억지로 밀어 넣은 거야.>'정말이지, 인정이 많아서 탈이다. 지한은 반쯤 체념하기 시작했으나 너무 순순히 물러서면 좋지 않다는 생각에 마지막 반항수를 던졌다.'“세상 흉흉한 건 걱정되고 다 큰 아들을 빈 집에 여자랑 단둘이 두는 건 걱정 안 돼요?”'모친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휴대폰 밖으로 새어 나왔다.'<어머! 제법인데, 아들. 하지만 아직 멀었어. 이 엄마를 의심할 게 없어서 아들 하반신 관리 능력을 의심하는 딱한 엄마로 보았다면 오산이야. 그리고 난 널 알잖니. 다원 씨는 여성스럽고 얌전한 뒷집 연지랑은 완전히 반대니까.>'거침없는 표현에 다시금 눈을 굴린 지한은 결국 웃음과 한숨을 동시에 터뜨렸다.'“와, 진짜! 너무 우려 드시네. 뒷집 연지가 무슨 곰국도 아니고, 왜 또 나와요? 그놈의 뒷집 바뀐 지가 십일 년인데.”'<십 년 아니었니? 역시 아직 정확하게 기억하는구나. 첫사랑이란 정말 위대해.>'“당연히 기억하죠. 걔가 이사 간 날이 기준이 아니라 엄마가 절 놀리기 시작하신 날이 기준이니까.”'모친이 소리 내어 웃었다. 지한은 한숨을 쉬고 화제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어쨌건, 말씀은 알았어요. 여긴 걱정하지 마시고 몸조심하세요.”'<그래그래. 걱정 안 한다니까. 아들 안 믿으면 누굴 믿니? 잠깐 다원 씨 좀 바꿔줄래?>'“네. 잠시만요.”'지한이 방문을 열자 마침 거실에 놓아둔 그의 가방을 들고 오는 다원과 마주쳤다. 그리고 감사 인사 속에서 가방과 휴대폰이 교환되었다.'“네, 과장님! 네. 아니에요, 저야 괜찮죠. 네. 정말이에요. 네네. 걱정하지 마세요. 네, 그 점은 별로 걱정이 안 되네요. 워낙 들은 게 많아서. 하하. 네, 조심하시고요. 네.”'어머니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알 듯 말 듯한 소리를 듣는 동안 지한은 곁에 서서 내심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사람 내보내라고 끝까지 우기기에는 야박해 보일 만큼 시기가 애매했다. 다른 사람 있으면 공부 못할 만큼 까다로운 성격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공부할 일도 없는 여름의 보충수업, 그 중의 일주일. 게다가 모친의 말도 맞긴 하다.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에게야 집은 하숙집이나 마찬가지고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상대가 여자라는 점은 사춘기 훨씬 전부터 다른 성(性)과 둘이서 살아온 지한에게는 타인에 대한 어색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또한 여자면 덮어놓고 느끼는 대상으로 보는 편협함도 없다. 친구들은 생긴 거랑 다르게 논다, 페미니스트다, 소금 좀 쳐야 될 놈이다, 말들이 많지만.'지한은 다원이 다시 내미는 휴대폰을 받아 귀에 갖다 댔다.'“저예요.”'<응. 잘 지내고, 버스 타고 다녀야 할 텐데 더위 조심하렴.>'“네. 아주 못 다닐 거리도 아니니까요. 그럼 끊을게요.”'<오냐. 사랑한다, 아들.>'“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