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동 프리메라호텔 국제회의장.' 끝을 모를 정도로 즐비하게 서 있는 화환들이 파티의 색채를 드러내주었고, 일정한 거리마다 서 있는 감색 정복 차림의 경호원들이 주인공의 지위를 가늠하게 해주었다.' 세팅된 원형 테이블에 앉은 이들이 인사를 나누고 동석한 이들을 소개하는 소리로 실내는 술렁이고 있었다. 내로라하는 연예인들이 한껏 치장을 하고 나타난 파티는, 국내 최고 연예 프로덕션인 케이엠의 새로운 이사의 취임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케이엠의 이사로 등장한 이경훈에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서른넷의 젊은 나이에 국내 굴지의 프로덕션 이사가 된 사실도 세인의 관심을 끌었지만, 무엇보다 모델을 능가하는 그의 완벽한 외모에 사람들의 관심이 더 쏠렸다.' 복학을 하기까지 남은 몇 달의 시간을 도서관에 틀어박혀 지내던 재헌은, 초등학교 때부터 단짝으로 지내온 지성의 전화를 받고 오기는 했지만, 막상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못 올 곳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방송에서 봐왔던 연예인들이 그들의 기획사 임원들과 동석을 하고 있었고, 앞쪽에는 카메라를 둘러멘 기자단이 따로 좌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광고계에서 최고의 주가를 누리고 있는 선우빈의 등장과 함께 실내는 한 번 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투명한 살갗을 절반 이상 드러낸 물빛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지는 바람에 재헌은 잠시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말끔하게 정장을 한 지성이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민성은 처음부터 줄곧 꿈에라도 한 번 만나보기를 원했던 가수 신정원의 얼굴에 넋이 나가 있었다. 재헌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자리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의 생각은 들어오는 낯익지만, 낯선 사람들을 보면서 한층 더해졌다.' 그때였다. 기자단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듯싶더니 술렁이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재헌과 그의 친구들의 시선도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한 곳으로 향했다.' 박수 소리 속에 들어오는 조각 같은 남자의 넓은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재헌의 시선은 이내 그의 곁에 서 있는 여자에게 옮겨졌다.' 결혼식 뒤로도 몇 번을 더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 속에서 남편과 함께 있는 그녀의 모습은 처음 보는 듯했다.' “누나가 저렇게 예뻤었나?”' 민성의 감탄이 아니더라도 지은은 여느 여자 연예인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그녀들이 지니지 못한 지은만의 아름다움이 팔짱을 끼고 있는 남자의 준수한 외모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지성이 재헌과 민성을 데리고 경훈에게 다가섰다. 처남을 발견한 경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축하드려요, 매형.”' “친구들까지 함께 와서 축하를 해주다니, 정말 고마워.”' 처남인 지성의 친구들에게 그의 시선이 머물자 재헌과 민재가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축하드립니다.”' “아, 전재헌! 이거 오랜만인걸.”' 재헌의 친구들 사이에서 이경훈은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지은이 베아트리체라는 이유만으로 어느 날부터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한 경훈은 그들의 모함을 받기에 충분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가 지은의 마음을 차지했다는 사실만으로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그들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지은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재헌, 민성 그리고 석준에게 이경훈이란 남자는 무자비한 실망감을 던져주었다. 지은이 대학 2학년부터 대학원을 마치기까지 그와 연애를 하는 동안 그들은 이경훈에게 알아서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을 입어도 광채가 나는 그 남자 이경훈은 무슨 복을 어떻게 타고났는지 성격조차 유별나게 좋았던 것이다. 배가 아파서 어떻게든 흠을 잡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남자인 그들이 보기에도 경훈은 더없이 괜찮은 남자였다.' 모의고사에 죽을 쑤던 날도, 좀체 날이 밝을 것 같지 않던 암담한 재수 기간에도, 날아온 영장을 받아들었을 때도 지은을 찾았던 재헌이었다. 그녀의 환한 미소 하나로도 상처 난 심장에 새살이 돋는 것 같았고, 그녀의 투명한 목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고 누구도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지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재헌에게 있어서는 생의 불씨가 점멸하는 것 같은 소식이었다. 다른 남자의 팔짱을 끼고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는 일이 그에겐 매번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암담한 일이었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친누이를 떠나보내는 지성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녀가 결혼을 하던 무렵 재헌은 재헌대로 몇 날을 앓아야 했다. 그나마 상대가 이경훈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힘들게 힘들게 그녀를 보낼 수 있었다. 벌써 이 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혼곤한 잠에 꾸벅이는 풀잎조차도 깨울 것 같은 청아한 음성이 재헌의 사념을 흩어냈다.' “오랜만이네?”' “누나, 잘 지내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