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 사이로 촘촘히 새어든 햇살이 산뜻한 봄바람에 흩날려 파편처럼 부서지는 따스한 오후였다.'칠십 여명의 궁녀들은 듬성듬성 박힌 울타리기둥처럼 넓은 뜰 여기저기를 지키고, 무장한 호위무사들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주변을 경비 중이었지만, 정작 그들이 수호하는 넓은 초록벌판은 따스한 봄날의 햇살처럼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만이 넘쳐날 뿐이었다. 궐에 세워진 수많은 출입구 중 서쪽에 있는 출구이자 뜰의 입구인 이곳은 ‘바람뜰’이라 불리는 거대한 정원이었다.'올해로 열네 살이 된 여자아이는 아까부터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뜰 안 여기저기를 들쑤시듯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그녀를 따라 키가 조금 더 큰 사내아이가 술래가 되어 웃음소리를 따라잡았고, 그를 피해 종종걸음으로 도망치는 여자아이의 웃음소리가 점점 활력을 더해갔다.'화려한 의복을 갖춰 입고 유난히 검은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 여자아이는 나풀나풀 뛰는 모습마저도 신비롭게 여겨질 정도였다. 마치 산 생명의 것이 아닌 양 비정상적으로 뽀얀 피부와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리하게 질린 입술. 그 작고 여린 모습은 마치 이제 막 호수에서 떠오른 물의 요정처럼 맑고 고왔지만 한편으론 생기를 잃어가는 꽃잎처럼 창백해 보였다.'구음절맥(九陰絶脈)을 타고난 아이. 음의 기운에 의해 아홉 개의 혈이 막힌 탓에 끊임없이 양의 기운을 흡수해야만 연명할 수 있는 비운의 황녀. 저주의 신체를 지니고 태어난 이 예쁜 여자아이가 바로 몽환국의 절대자인 진언 황제의 유일한 혈육, 소율(宵律)이었다.'선천적으로 강한 음의 기운을 타고난 터라 소율은 어릴 때부터 음기를 다스리는 약을 입에 달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좋기로 소문난 명약들은 그녀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열 살이 접어들면서부터는 피부가 비정상적으로 하얗게 들뜨기 시작했다. 상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다는 증거였다.'그런 그녀를 위해 궁의가 마지막으로 내놓은 비책은 순수극양무공(極陽武功)이었다. 음의 기운과 상쇄하는 극양의 무공을 익힌 덕에 그녀의 증세는 많이 호전되었지만, 매월 음의 기운이 극에 달하는 망일(望日:음력보름)이 될 때마다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온몸을 떨며 발작을 일으키는 것만은 막을 방도가 없었다.'제국의 황녀라는 축복과 동시에 구음절맥의 저주를 지니고 태어난 소율. 그런 소율에겐 어릴 때부터 곁에서 힘이 되어 주는 좋은 친구가 있었다.'“자겸.”'한창 신나게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던 소율이 걸음을 멈추고 자겸(紫鎌)을 돌아보았다.'“저기 좀 봐. 지난번에 왔을 땐 봉우리만 보이더니 그새 저렇게나 많이 피었어.”'“그러네.”'완연해진 봄을 알리듯 길쭉길쭉 뻗은 살구나무의 나뭇가지에는 이제 막 봉오리를 터트린 행화가 탐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꽃을 흐뭇하게 올려다보던 소율이 자겸을 쳐다보았다.'“저거 딸 수 있어?”'“어?”'자겸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자겸은 몽환국에서 태사(太師)직을 맡고 있는 맹량의 맏아들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했을 만큼 명석하여 황제에게 각별한 관심을 받는 아이였다.'총명한 머리, 출중한 외모, 명문가의 자제다운 곧은 성정과 몸에 밴 세련된 기품. 이제 막 17세가 되었음에도 벌써부터 이곳저곳에서 청혼이 들어올 만큼 남들 눈엔 완벽하게 보이는 자겸에게도 딱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여태껏 붓은 수없이 잡아 봤으나 뭇 사내들이 한 번쯤 휘둘러보았을 검 자루는 단 한 번도 쥐어 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국자감에 앉아 학술을 익히며 보내었으니 그가 무공을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자겸에게 몸을 날려 높은 나무에 매달린 꽃가지를 꺾어오란 것은 무척 버거운 주문이었다.'“가까이서 보고 싶어. 따 줄 수 있어?”'“꺾어 줄까?”'소율이 기대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웃음을 지은 자겸이 커다란 나무 기둥을 올려다보았다.'“기다려 봐. 금방 꺾어다 줄게.”'어찌할까 방법을 생각하던 자겸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나무 기둥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사다리를 놓아 나무를 타면 쉽겠지만 자신에게 기대를 건 소율에게 실망을 주긴 싫었다.'있는 힘을 짜내어 겨우 나무를 타고 오른 자겸은 가장 낮은 꽃가지에 손을 뻗었다. 가까스로 뻗은 손끝이 꽃봉오리에 아슬아슬하게 닿으려던 순간, 기둥을 감고 있던 그의 팔이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허무하게 풀려 버렸다. 털퍼덕, 소리와 함께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자겸이 민망한 얼굴로 소율을 쳐다보았다.'“괜찮아?”'“아깝다. 거의 닿았었는데. 다시 해볼게.”'얼굴을 붉힌 그가 다시금 나무를 탔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였다. 그렇게 세 번, 네 번의 도전에도 자겸은 꽃가지를 꺾지 못하고 번번이 엉덩방아를 찧어야 했다.'자겸의 얼굴이 점점 상기되었다. 그녀 앞에서 체면이 구겨지는 것쯤 상관없었다. 다만 그녀가 원하는 꽃가지 하나조차 제대로 꺾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자겸의 자존심을 긁었다.'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호위무사 좌익찬이 두 사람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황녀 전하. 이런 일은 소인에게 시키심이…….”'“됐어. 좌익찬은 제자리에 가도록 해.”'좌익찬을 돌려보낸 소율은 벌판 한구석에 삐죽이 솟아난 바람꽃 풀줄기에 시선을 쏟았다. 정확히는 아까부터 혼자 멀리 떨어져 풀밭에 누워 있는 신니가 입에 문 꽃줄기였다.'“야!”'제법 크게 불러 보았지만 신니는 대꾸가 없었다. 이름을 부르지 않아 그런 건가 싶어 소율은 그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이봐, 신니!”'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감히 황녀의 부름을 모른 체하다니. 기분이 나빠진 소율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작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들고는 그것을 신니에게 힘껏 집어던졌다.'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