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10년 만에 버스를 탄 지욱은 있는 대로 짜증이 났다. '‘요 며칠처럼 되는 일이 없어서야, 원.’ '정말 세상 살기 힘들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일주일이었다. 머피의 법칙, 1949년 미국 공군 대위 머피라는 사람이 제일 먼저 쓴 말이라고 했던가? 도대체 그 사람은 얼마나 운이 없었기에 이런 법칙까지 만들어 냈을까? '발단은 지난 주 월요일이었다. 작은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던 후배 녀석이, 결혼을 한 달 앞두고 약혼자와 파혼을 하더니 속세는 제 살 곳이 아니라며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산속으로 잠적했다. 물론 그런 후배가 안타깝긴 했지만 당장은 사라진 녀석과 함께 무용지물이 된 설계도가 가장 아쉬웠다. 설계도는 이미 다 나와 있었지만 책임자가 없어져 어디에 뭐가 들어가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니 처음부터 다시 다 작업을 해야 했다. 약속 날짜를 3일이나 늦춰 다른 직원들까지 총동원해 3일 밤을 샜다. 다시 설계도를 작성하느라 코피가 터질 지경인데 그런 그들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건설주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 닦달했다. 실장인 지욱이 직접 담당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는데 탈 많고 말 많은 건설주라 어쩔 수 없이 상대해야만 했다. '그 사건이 간신히 마무리 된다 했더니 이번엔 다른 공사 현장에서 일이 생겼다. 회사 사장의 소개 반, 강압 반으로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개인공사였는데 종국에 말썽이 생겼다. 공사현장을 지나가던 차 위로 작은 돌 몇 개가 떨어졌고 마침 초보운전이었던 아줌마가 너무 놀라서 전봇대를 들이받았단다. 그리고 조폭같이 생긴 남편이 아니라 정말 조폭인 남편이 부하 몇을 데리고 와 공사 현장을 쑥대밭을 만들고 현장 인부 몇이 다친 것이다. 그것 때문에 바쁜 와중에 경찰서로 병원으로 뛰어 다녀야 했다.'그 일로 마무리가 됐으면 좋으련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작은 사건들이 이어졌고 결국 어제는 너무 정신이 없어 자동차 시동을 밤새 켜놓았었다. 덕분에 경기도 외각의 먼 현장까지 고생스럽게 버스를 타고 가야만 했다. 짜증스럽게 미간에 주름을 잡은 지욱의 입에서 욕설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젠장.”'출근시간, 좌석버스라고는 하지만 통로까지 사람들이 빡빡하게 들어차 그의 어깨로 사람들이 계속 부딪쳐왔다. 살벌한 지욱의 표정에 주변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그와 부딪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지욱은 인상을 풀지 않고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차창을 통해 자신을 보고 있던 여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갑자기 눈이 마주치자 여자가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금세 시선을 돌려버렸다. 지욱은 제 어깨에나 간신히 닿을까말까한 자그마한 여자의 정수리를 가늘어진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쬐끄만 게 까불기는.” '지욱은 혼자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팔짱을 단단하게 끼고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몸이 여기저기서 삐걱거리며 신호를 보내왔다. 가는 동안만이라도 좀 잤으면 좋겠는데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신경은 잠에 빠져들 수 있을 만큼 그를 편안하게 두지 않았다. 어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 빈속에서는 우르릉 번개가 치고 속이 너무 비어서 그런지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눈을 감은 지욱은 팔짱을 낀 팔을 풀어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주었다. '그때 코끝에 느껴지는 고소한 냄새에 한쪽 눈만 슬쩍 떠 앞을 살폈다. 바로 코앞에 낯선 손위로 먹음직스러운 군밤 한 개가 놓여있었다. 지욱은 조금 굽어졌던 등을 펴 꼿꼿하게 앉으며 다시 팔짱을 꼈다. 눈동자를 굴려 눈앞에 손과 그 주인인 옆에 여자를 번갈아 쳐다봤다.'“뭐요?”'“드시라고요.”'“됐습니다.”'“배, 고프시잖아요. 드세요.”'“아, 거 괜찮다니까 귀찮게. 됐다고요.”'지욱의 말꼬리가 올라가며 목소리가 약간 커졌다. 거칠어진 목소리에 주눅이 들만도 한데 여자는 상관없는지 생글거리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거봐요, 뱃속이 비니까 사람이 신경질적이 되잖아요. 아무나 주는 거 아닌데, 그 뱃속에서 나는 소리가 너무 커서 주는 거예요. 먹어요.”'어수룩하게 봤던 여자는 의외로 또랑또랑 말을 잘했다. 지욱은 아까부터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밤과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다 어물쩍 손가락 끝으로 밤을 집어 올렸다. 말은 싫다고 했지만 진작부터 목구멍으론 군침이 넘어가고 있었다. '“고작 밤 한 개 주면서 말은 거창하네.”'여자는 지욱의 불퉁한 말에 발 앞에 있는 커다란 종이가방을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찾아 지욱의 무릎 위로 올려놓았다.'“직접 까먹을래요?”'지욱은 장난치듯 말하는 여자의 밝은 미소와 유쾌한 반응에 놀라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초리를 꿈질했다. 보통 이런 상황이 전개되면 다른 여자들은 무시하거나 욕을 했을 텐데. 여자는 지욱에게 뭔가를 먹여야하는 사명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나는 손가락에 뭐 묻는 거 질색하는 사람이요.”'결국 까달라는 말이었다. 채경은 심통이 더덕더덕 붙은 남자의 얼굴을 보다 피식 웃었다. 채경은 남자의 무릎에 있던 군밤 봉지를 제 다리 위로 옮겨와 부지런히 군밤을 까서 남자의 손바닥 위에 올려줬다. 남들 일에 무심한 편인데 오늘처럼 이해 안 되는 짓을 몇 년에 한 번씩 하곤 했다.'지욱은 여자가 까주는 군밤을 부지런히 먹었다. 생각보다 달고 적당하게 잘 구워진 군밤은 일미였다. 그것도 남이 까주는 걸 쏙쏙 집어 먹으니 그 맛이 더 좋앗다. 몇 개의 군밤을 집어먹었을까? 이번엔 뭔가 더 크고 따뜻한 게 손바닥으로 건너왔다.'“옥수수수염 차예요. 파는 게 아니라, 시골에서 할머니가 직접 집에서 끓여 주신 거니까 마셔 봐요. 밤만 먹어서 목 메일 거예요.”'“옥수수 수염차라, 이거 고소하고 맛있네.”'“성격 급하시구나. 천천히 마셔요. 물마시고 체하면 약도 없어요. 미꾸라지를 살아있는 채로 먹을 용기가 있으면 모를까.”'“풋, 이봐.”'“으, 더러워. 얼른 닦아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채경의 말에 놀란 지욱이 입안의 음식을 의자 옆에 서 있는 남자의 바지에 뿜어내고 말았다. 잽싸게 입을 막아서 아주 많이는 아니었지만 출근길 차 안에서 충분히 불쾌할 수 있는 일이었다. 채경은 지욱에게 휴지를 건네주며 봉변을 당한 주변 사람들에게도 고개를 숙여 사과의 말을 건넸다. 아까 지욱이 성질내는 걸 본 탓인지 사람들은 인상만 쓸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지욱은 살아있는 미꾸라지가 자신의 목으로 넘어가는 것만 같아 몸서리를 쳤다. 남자치고 비위도 약하고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라 지금까지도 익히지 않은 음식은 잘 먹지 않는다. 뼛국도 안 좋아했고 비린 음식은 딱 질색이다. 장도 좋지 않아 면 음식을 잘못 먹으면 배탈이 나곤 했다. 밥 먹을 때 지저분한 얘기를 하면 젓가락을 던지고 안 먹고는 해서 친구들이나 동료들 구박도 많이 받았다. 그의 모친은 너한테 시집온다는 여자 있으면 도시락 싸가지고 말릴 거라는 악담 아닌 악담도 했었다. '“이봐, 무슨 여자가…….”'“입가에 묻은 밤이나 다 닦고 얘기해요. 더러워서 봐 줄 수가 없네, 아주. 아, 얼른요. 여기 공공장소거든요.” '지욱은 여자가 건네준 물휴지로 입가를 박박, 아주 박박 벌게질 때까지 닦았다. 누구보다 더러운 걸 질색하는 건 바로 지욱이었다. '“대충 배는 불렀죠? 내 밤을 반 이상 뺏어 먹었으니 당연하지. 고맙다는 말은 들은 걸로 할게요. 목적지까지 안녕히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