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세요. 주…….”'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녀는 발자국 소리의 주인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건이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네, 네?”'“아메리카노.”'그의 표정은 무언가 궁금해 보이기도 했고 언뜻 귀찮다는 내색을 담고 있기도 했다. 지오를 빤히 보던 이건의 눈동자가 기계를 만지는 그녀의 손으로 내려갔다. '‘도망가고 싶다. 도망갈까? 계약서……. 그놈의 계약서. 아니지, 도망가서 다시는 건담 얼굴 못 볼 바에야 그냥 만드는 게 낫지. 이럴 줄 알았으면 제대로 배워 놓을 걸. 그 자식 뺀질거려도 커피는 잘 만들던데.’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만든 지오는 건조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이건에게 컵을 내밀었다. 덜덜 떨리는 손에 이건의 손가락이 살짝 닿았고, 그녀는 그대로 얼음이 되어 버렸다. '“형편없군.”'하지만 그녀가 좋아하던 남자에게 들은 첫마디는 바로 그것이었다.'- 형편없군. '멍한 표정으로 눈만 깜박거리는 사이, 이건은 커피 잔을 내려놓고 그대로 사라졌다. 그리고 건너편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란,'“나 먼저 퇴근한다.”'지오는 가방을 들고 계단으로 향하는 이건을 주시하며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이건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에야 지오의 흐리멍텅한 눈동자가 원상태로 돌아왔다. 이제야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인지되었다. 최악이었다. 정말이지, 비참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지구에서 떠나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구에서 떠나지 못하는 관계로 대신 이 웬수 같은 카페에서 떠나기 위해 그녀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일찌감치 그만둬 버렸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왠지 눈물이 새어 나올 것 같아 열심히 눈을 깜박이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 가게?”'유현이었다. 그는 테이블에 마트 봉투를 내려놓고 지오에게로 다가왔다.'“그럼 살까요?”'지오가 가지 못하도록 장난스럽게 가로막은 그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풀이 죽어있는 표정에 잠시 의아해하던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이렇게 풀이 죽었어? 손님 많았네. 손님 많았으니까 보너스까지 붙을 텐데 표정은 왜 그래? 꼭 울 것 같이.”'“형편없는 커피로 돈 벌어 봤자 뭐해요.”'“형편없대? 누가?”'“……갈게요.”'“혹시 건너편?”'“…….”'반응이 없다는 건 곧 긍정이란 뜻이 되기도 한다. 그걸 잘 아는 유현은 그녀의 머리에 커다란 손을 툭 내려놓았다.'“네 커피 맛있어.”'“입에 침이나 바르세요.”'“진짜야. 걔야 지가 워낙 잘 만들어서 그런 거지. 매번 만점 받다가 95점 받으면 넌 만족하겠어? 근데 그렇다고 95점이 낮은 점수는 아니잖아.”'“그럼 제 커피가 95점이에요?”'“92점으로 하자.”'“뭐에요, 그게?”'“처음부터 92점이면 높은 거지, 욕심도 많아. 92점이니까 차차 올라가면 되고. 근데 그게 중요해? 네가 커피 잘 만드는 건 나한테 이득인 거잖아, 그 남자가 아니라. 네가 지금 바라는 게 뭔데? 그 남자한테 커피로 인정받는 거야? 그래?”'‘그건 아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시무룩해있는 지오에게 유현이 달래듯이 덧붙였다.'“기회는 많아. 저 남자가 내일 당장 관둔대? 아니면 네가 계약서 어기고 내일부터 안 나올 거야? 아니잖아. 커피가 아니라 네 진심 보여주면 되는 거고. 만약 커피로 인정받고 싶다고 해도 또 그 기회는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거고. 그러니까 네가 울 것 같은 표정 할 필요도 없는 거고.”'지오는 고개를 들어 유현을 보았다. 참 이상하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자신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을 저 남자가 얘기하는 것뿐일 텐데 묘하게도 안심이 됐다. 순식간에 암흑에 빠졌던 마음이 서서히 개이고 있었다. 정말 묘하지, 저 남자 혹시 마법사 같은 건가? 에이, 말이 안 되지. 지오는 고개를 저으며 가방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저 가요.”'“내일은 조금 늦게 와도 돼!”'유현은 지오의 뒷모습을 보며 기분 좋게 외쳤다. 하지만 힘없이 멀어져가는 뒷모습에 그의 입 꼬리가 천천히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