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걸어가던 길에 다리가 아파 근처 공원 벤치에 들어가 앉아 고개를 들어보니 나뭇잎이 가로등 불빛에 붉게 물든 채 좌우로 흔들리는 게 보였다. 한참을 보다보니 가로등 불빛이 눈에 콕 박혀서인지 다른 게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그야말로 눈에 뵈는 것 없는 상태.'[싫어하는 사람이 계속 생각나는 이유는?]'눈에 뵈는 것 없는 김에 은주에게 문자를 보냈다. 돌아서서 가게 밖을 나가던 그 사람의 뒷모습이 머리에 박혀 떨어지지 않는다고.'그 사람과 모르는 척 남처럼 살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더 이상 신경 쓸 일도 감정을 소모할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뭐가 문제일까.'[좋아하는 사람은 왜 계속 생각나는 데? 좋아하는 거랑 싫어하는 거랑 한 끗 차이야.]'[거짓말.]'믿을 수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때 생기는 설렘과 기분 좋은 감정이 누군가와 눈만 마주쳐도 불편한 이 감정과 한 끗 차이라는 건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여겨졌다. 윙하고 긴 진동이 울려 내려다보니 액정에 ‘은주’라는 두 글자가 번쩍이고 있었다.'“여보세요?”'-야, 그게 왜 거짓말이야?'“좋아하는 거랑 싫어하는 거랑 뭐가 한 끗 차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장난쳐? 금방 니가 그랬잖아. 싫어하는 사람인데 자꾸 생각나는 이유가 뭐냐고. 왜겠니? 싫어하는 사람이든 좋아하는 사람이든 니가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고 당연히 그쪽으로 눈이 가는 만큼 생각도 하게 되겠지.'“…….”'-누가 그러더라.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과 누군가를 싫어하는 데 소비하게 되는 에너지의 양은 같다고. 다만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에너지를 기분 좋게 소비하게 되니까 좋은 거고, 누군가를 싫어할 때는 에너지를 기분 나쁘게 소비하게 되기 때문에 지치고 힘든 정도의 차이가 생기는 거라고.'은주는 ‘누가 그러더라’라는 말로 이야기를 잘 시작했다. 그게 은주의 머리에서 나온 건지 실제로 누가 그렇게 말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 말에 설득력이 있다는 것 하나는 확실했다. 내가 좀처럼 해답을 찾지 못하는 문제를 들고 끙끙거릴 때 던져진 해답의 열쇠 같은 것.'-옛 선조들이 그러잖아.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라고. 그 말이 왜 나왔겠어? 미운 놈 더 미워해 봐야 내 에너지 닳고 나만 피곤하니까 그냥 잘해 주라는 거잖아. 미운 놈 밉다고 말하다가 스스로 힘들어질 바에는 미운 놈도 아껴서 보듬다 보면 정 들게 될 거고, 그럼 자기도 편하고 미운 놈도 편할 거 아냐.'“…….”'-누가 너한테 미운 놈으로 찍혔는지 모르겠지만 떡 하나 더 줘봐. 그리고 주는 김에 나도 주고 학교에 있는 윤수 선배한테도 좀 주고!'머릿속에 뱅글뱅글 돌고 있던 이름이 휴대폰 너머로 들릴 때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