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본 것은 내 생에 최악의 날이었다.'당연히 결혼할 것이고 당연이 지극히도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다른 여자와 태연하게 팔짱까지 끼고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생중계로 봤다. 생에 최악의 날을 꼽는다면 바로 그날일 것이다. 땀 냄새에 질식해 버릴 것 같은 실내, 미친 듯한 사람들의 껑충거림,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음,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가 된 것 같은 느낌으로 온몸에 있던 알콜기를 전부다 내보내자는 속셈으로 날뛰고 있었지만 난 지극히 정상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발에 밟힐까봐 곁에 가지도 않았고 그들의 땀 냄새와 부대끼기도 싫었다. 내가 왜 여기 와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가…… 마치 사람들은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노래를 부르는 남자는 무슨 소리인지도 모를 괴성을 질러대고 객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보다 얼마 높지 않은 무대에서 이리저리 길길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분명히 나의 치사량보다 많은 술을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광기가 오히려 나의 술기운을 깨우고 있었다.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지선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굳이 그 애를 찾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굉음에 시달리다 확 쓰러져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 어떻게 그자식이 그럴 수가 있어. 난 그놈한테 순결도 바쳤고 엄마 아빠도 다 그놈하고 결혼할 거라는 걸 알고 있는데 그놈이 어떻게 그 여자와 그럴 수가 있는 거야. 가서 머리채라도 잡아끌어 내려야 하는 건가…… 그렇지만 그의 입에서는 솔직히 결혼하자는 말을 들은 적이 없잖아…… 뭐야 나만 바보가 된 건가…… 머릿속이 사람들의 굉음보다 더 복잡해졌지만 술기운은 놀랄 만큼 명료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술이 세지는 건가…….' 그러다가 갑자기 조명이 꺼져버리더니 사람들의 광기가 일순간 멎어버렸다. 깜짝 놀라서 오히려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무대의 가운데 조명이 켜졌다.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가 그 조명 밑에 있었다.'심장을 울리는 소리…… 빠른 드럼소리가 심장을 꺼내 밖으로 집어던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드럼소리는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무대 위의 조명은 일제히 커지고 베이스와 신디사이저의 굉음이 또다시 폭발하듯 울렸다.'그러나 내가 본 것은 그 드럼스틱을 들고 있는 남자의 현란한 손놀림. 그러나 상반되게도 아무 표정 없는 얼굴. 전혀 본적도 없고 상상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은 듯 한 낯설지만 완전하게 각인되어버릴 듯 한 완벽한 얼굴이었다. 그 순간 자아라는 것을 잃어버린 듯한 나의 관찰은 시작되었다. 너무나 어둡고 너무나 시끄럽고 너무나 혼탁했지만 마치 비웃는 듯한 입꼬리를 지닌 드럼스틱을 쥔 남자의 현란한 손길과 힘, 멈춰야 할 곳에서 심벌즈같이 생긴 이름을 알 수 없는 그것을 잡아 소리를 멈추는 손길, 그 남자가 입은 검은색 셔츠는 땀에 젖은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싸늘한 기운이 서려 땀방울 같은 것은 흔적도 없어 보였다. 괴성을 지르는 보컬의 움직임이 격해질수록 그 남자의 손길도 격해졌다. 그 남자가 발로 밟고 있을 커다란 맨 밑의 드럼의 쿵쿵거리는 소리에 맞추어서 나의 심장이 뛰고 있는 것 같았다.' 다 없어져버려……' 다 죽어버려……' 나한테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어……'머리를 풀어헤친 싱어가 부른 노래가사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그게 내 마음 속 저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라고 굳게 믿었다.'다 죽어버려…… 드럼스틱을 쥐고 있는 당신만 빼고…… 당신만 사랑할거야……'' 내가 미쳤다는 게 확실했다. 그놈과 사랑과 빠지는데 3년이나 걸렸는데,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한다는 건 적반하장이다……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난 저 남자와 사랑에 빠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친 게 틀림없어……. ''보컬의 괴성이 찢어질듯 이어지고 드럼의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던 트레몰로가 사라지더니 결국 공연은 끝나버렸다. 땀에 젖은 관객들의 휘파람과 환호가 이어지고 보컬과 악기를 만지던 사람들이 차례로 인사를 하더니 슬슬 사라지고 있었다. 검은 조명 밑의 드러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손에 들고 있던 스틱을 빙빙 돌리면서 제일먼저 무대 뒤로 사라졌다. 얼핏 키가 굉장히 큰 것처럼 보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