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스텝들의 원성도 생각하라며 극구 말리는 태화의 손을 뿌리쳤다. 스케줄이고 나발이고 무시해 치우고, 무작정 해윤이 있을 법한 YS 사옥의 재무팀으로 발길을 돌렸다. 희미한 불빛이 어둑한 사무실의 한 귀퉁이에서 발했다. 속닥이는 소리. 그 소리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두 사람이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서류철을 보고 있었다. ' “정효 씨, 나 또 틀린 거 에요?”' “네. 해윤 씨를 보면 난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눈에는 똑같은 숫자가 다르게 보이나 봐요. 어쩜, 맞을 때가 없냐? 아니다. 내 시력이 양쪽 다 1.5인데 그럴 리가, 이 물건에 분명히 문제가 있을 거 에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해윤이 전자계산기를 엎었다 뒤집었다가 두드리며 연장 탓을 했다. '정효가 씨익 웃더니 그녀의 머리를 ‘콕’ 쥐어박았다. '제 머리를 문지르며 해윤이 울상을 지었다.' “해윤 씨, 언제나 꿀밤 신세 면하려고 매일 이러십니까?” ' “계산은 틀려도 재무제표 보는 방법은 익혔으니 많이 발전한 거 아닌가요? 그래도 전 무지 뿌듯한 거 있죠!”' “그래요. 해윤 씨는 항상 긍정적이어서 모든 일이 수월해요. 지금만 봐도 그렇잖아요. 이렇게 매일 틀리면서도 즐거워하고 있으니. 정말 해윤 씨를 보면 엔돌핀이 마구 생성 돼서, 하루 종일 받은 스트레스가 몽땅 풀리는 기분이 든다니까요.”'해윤이 턱을 괴고 가늘어진 눈으로 정효를 보며 새침하게 물었다.' “지금 그 말 칭찬인 거지요? 매일 틀리는 주제에 즐거워하는 게 한심해서 놀리려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요?” ' “내가 듣기에는 비꼬는 말이다.”'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벽에 기대선 지혁이 건조하게 말을 씹어 뱉었다. 그가 건들거리며 한 쪽 발을 구를 때마다 풀어 헤져진 코트자락이 흔들렸다. 젊은 직원들이 야근한답시고 붙어 앉아 연애질하는 꼴을 몰래 지켜보는 늙수그레한 사장처럼 그는 무료하고, 한가해 보였다. '해윤이 난데없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의 노려보는 시선을 정면으로 받았다.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해 들이닥친 제 남자를 물끄러미 보며 극히 무미건조하고 사무적인 대응을 했다. ' “본인이 옆에 있는데 왜 강지혁 씨가 대답을 해요?”'정효 역시 팔짱을 낀 채, 놀라는 기색도, 움직일 기척도 없이 지혁을 힐끔 쳐다보았다가 곧 해윤을 다시 보았다.' “해윤 씨, 분명히 칭찬으로 한 말입니다. 난 누구처럼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하시겠어요? 계속 공부하실래요? 아니면 자리 비켜 드릴까요?”' “연락도 없이 방문한 손님한테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계속 하죠.”'자신을 완전히 개 무시하며 잡상인 취급하는 해윤에게 ‘하하’ 큰 소리로 지혁이 웃어주었다.' “진해윤이, 너 대단하다. 이젠 겁도 안 나신다?”' “내가 왜 겁내야 하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난 잘못 한 거 하나도 없어.” ' “야심한 시간에 외간 남자하고 시시덕거리는 현장을 나한테 들켜 놓고서도 잘못이 없으시다? 하, 내 여자가 이렇게도 뻔뻔했던가?”' “흥, 착각은 자유라지만, 언제부터 내가 네 여자였니?”'지혁이 느릿하게 벽에서 등을 떼며 코웃음을 치는 그녀에게 빈정거렸다.' “널 처음 본 순간부터 앞으로 쭈욱. 내가 널 놔 줄 생각이 없거든. 그러게 내 눈에 띄지 말지 그랬냐?”' “너 웃긴다는 거 알지? 만사가 다 네 뜻대로 될 거라는 자만심을 버려. 난 네가 키우는 검정개가 아니야. 네 목줄은 내가 쥐고 있는데, 감히 누굴 놔 주겠다 말겠다 하니?”' “훗, 진해윤이 나날이 간이 커진다. 몇 달 전만해도 너, 좀 다가설라치면 벌벌 떨며 내빼는 숫처녀였잖아!” '어쩜 사람을 이토록 수치심에 얼굴도 못 들게 만드는지. 잃어버린 물건 찾아가는 주인보다도 더 악랄하게 당당한지. 해윤은 지혁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은밀한 이야기에 목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신을 지독하게 속물근성의 저급한 여자로 몰아세워 놓고도 말짱하게 태연한 그 때문에 화가 치밀어 목소리도 떨려서 나왔다.' “뭐, 뭐라고?”' “남자에 대해서 쥐뿔도 모르는 주제에 급기야, 날 상대로 목줄 잡고 쥐락펴락 하시겠다? 장족의 발전을 거뒀다고 축하라도 해 주랴?”' “응. 말 한 번 잘했네. 내 눈 앞에서 빨리 사라져 주는 게, 네가 축하하는 방법이야.” '볼에 잘 익은 토마토를 얹어 놓고 제 분에 못 이겨 계속해서 뻗대는 해윤의 귀여운 짓에 지혁의 눈이 웃고 있었다. ' “해윤아, 그만 까불고 가자. 널 안고 싶어서 나 아주 환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