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후의 손가락 끝이 정확하게 온유의 가슴 정점에 조준되어 있었다. 게다가 한쪽 눈은 가슴 크기를 가늠하기라도 하듯 지그시 감겨있기까지 하다. 아뿔싸, 온유는 원래 약속이 되어 있던 도완의 대타로 중후를 끌고 온 자신의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오늘의 연극에 동참하기 싫은 이유를 열 가지쯤은 너끈히 늘어놓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중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왜 그토록 애를 썼단 말인가. 온유는 취재 겸 여행을 떠난 그의 동생, 성은 대신으로 보름 동안이나 집안일을 해 주기로 약속했다. '온유는 그를 끌고 온 손목뿐 아니라 쓸데없는 약속을 한 혀도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잠시 눈에 뭐가 씌었던 게 분명하다. 잠시 머리가 회전을 멈추었던 거다. 잠시 미쳤었던 거다!'온유는 절규했다.'‘아아악……! 나, 돌아갈래!’'유치한 장난을 칠 때를 제외하고는 어지간해서는 제게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도 않는 중후를 이런 자리에 데리고 나오다니! 여자를 배려하는 매너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거만한 데다 재수 없기 그지없는 인간, 천하의 정중후를! '그의 이름만 들어도 진저리를 치던 자신이 왜 이런 짓을 벌였을까? '당시의 온유는 오로지 경하에게 꿀리기 싫은 오기로 똘똘 뭉쳐져 있었다. 애인과 동반하지 않으면 당할 벌칙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올해에도 너는 역시 혼자구나’, ‘허긴, 네가 그렇지. 뭐 별 수 있니?’, 하는 말을 잔뜩 베어 문 경하의 입술을, 조소가 가득 담긴 눈빛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하지만 제 아무리 온유가 오기 충천하다 해도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온유가 제대로 아는 남자라고는 부족한 일손을 메우기 위해 얼마 전에 고용한 선욱, 어려서부터 개울물에 같이 목욕하며 볼꼴 못 볼꼴 다 겪고 자란 탓에 취중에도 절대 남자로 보이지 않는 도완, 그리고 친구 성은의 오빠인 정중후라는 인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생판 모르는 사람을 조달해 올 재주도 온유는 갖추고 있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인간관계를 좀 넓게 다져놓을 것을! '차라리 중후가 아닌, 스타일이 조금 촌스럽기는 하지만 만만하고 편한 선욱을 데려올 것을! '이만저만 후회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온유는 중후에게 거짓 애인 역할을 해 달라고 부탁하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아아,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뭐? 장경하도 나온다고? 그럼 청운횐가 뭔가 하는 그 모임 이야기야?'내내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중후가 경하의 이름이 튀어나오자마자 희미하나마 관심의 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좋은 징조였지만 중후가 경하 때문에 반응하는 것이 온유는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그런데 네 애인역할을 해 주기로 했던 도완이 녀석이 갑자기 어학연수를 가 버렸다는 거고?'아아, 중후가 거드름을 피우며 상황을 정리하던 그때로 되돌아 갈 수만 있다면!'-어째 이거 연출된 상황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데? 그냥 솔직하게 너도 나에게 끌린다고 말을 해. 솔직하게 말을 하면 내가 부탁을 들어줄지, 말지, 최소한 고민은 해 줄 테니까 말이야.'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마음이 살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온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온유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만약 오빠가 내 부탁을 들어주기만 한다면,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성은이 대신에 집안일을 해 줄게. 그러면 어때? 도우미 아주머니도 마침 일이 생겨서 휴가 내셨다면서?'-아주머니가 휴가를 가신 건 맞다만 네가 왜? 혹시 그렇게라도 해서 내 주변에서 얼쩡거리고 싶어 그러냐, 꽃돼지?'-뭐, 꼬, 꼬, 꽃돼지?'온유는 화가 솟구쳐 붉어진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성은과 단짝이 되면서부터 성은의 오빠인 성격파탄 정중후도 그녀의 인생길에 살짝 끼어들게 되었는데 어찌나 얄궂고 못됐는지 놀부 심보 저리가라였다. 그의 심술 퍼레이드는 대충 이랬다. '‘꽃돼지’, ‘오동통 내 너구리’, ‘불타는 고구마’ 등등 뚱뚱하고 우스꽝스러운 외모가 연상되는 별명으로 불러 멀쩡하던 지온유의 기분을 잡치게 만들기.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치마 들어올리기에 열 올려 지온유 울리기. 유치하게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거나 볼 살 꼬집기. '뿐인가, 그는 온유가 고등학생이 되어 교복을 입고 나타나자 그간 보아왔던 교복 중에 제일 촌스럽다며 하루 온종일을 놀리기도 했다. 온유가 장학금까지 받으며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자연농법을 계승하겠다고 선언했을 때에는 농사는 아무나 짓느냐면서 대놓고 비웃었다. '그러다 그녀가 정말 터를 닦고 닭을 키우고 계란을 팔기 시작하자 중후는 더 노골적이고 유치하게 비웃어대기 시작했다. 말끝마다 촌닭이니 닭대가리니 비위에 거슬리는 표현을 써가면서 말이다. '-네가 전부터 날 은근히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눈치 채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니까 좀 당황스럽네? 안 그러냐, 촌닭?'관심을 좀 갖는가 싶더니, 중후는 금세 시들해졌다. '-나 갈래. 됐어, 다 필요 없어.'온유는 삐딱하게 소파에 앉아 있는 그를 놓아두고 돌아서서 거실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중후는 온유가 현관에서 신발을 꿰어 신을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 '-나 간다고.'-잘 가라.'쌩 돌아설 때와 다르게 온유는 미적미적 신발 속에 발을 구겨 넣었다. 그가 호락호락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상황에 닥치고 보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나 진짜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