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성웅성, 저마다 갈 길 가는 사람들로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공항 안. 천장 여기저기에 달린 스피커에서는 계속 사람을 찾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순환하는 강물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 가운데 소녀와 소년이 있었다.'“자, 효인아. 진환이한테 인사해야지.”'한 중년 남자가 멀거니 서 있는 소녀의 어깨를 짚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에도 소녀는 움직이지 않고 입술을 꼭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소녀는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단연 눈에 띌 만큼 예쁘장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귀밑까지 단정하게 자른 단발과 천성적으로 옅은 색의 모발, 분칠을 해놓은 것처럼 뽀송뽀송한 흰 피부, 그리고 남들보다 색소가 옅은 연갈색 눈에는 물기와 오기가 그득했다.'소녀의 앞에는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소년 역시 어디에 두어도 눈에 확 띌 만큼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였다. 이제야 열일곱 살이 되었을 뿐인데 단호하고 진중한 빛이 흐르는 눈은 깊었고, 언뜻 쓰게 흐려져 있는 얼굴은 섬세한 조각칼로 잘 다듬어놓은 듯했다.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소녀와 달리 소년은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으니 도저히 학생으로 보이지 않았다. 늙어 보인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두 번째 피부처럼 감싸여 있는 정갈함이나 점잖은 공기가 확실히 그 나이 같지 않았다.'소녀는 울지 않으려는 듯 주먹을 꾹 쥔 채 고개를 숙였고, 소년은 그런 소녀에게 씁쓸한 눈빛을 보냈다.'“효인아…….”'소년의 곁에 서 있는 중년 여자가 안타깝게 소녀를 불렀다.'“네가 그러면 진환이 마음이 얼마나 무겁겠니. 웃으면서 보내줘야지.”'“하지만…… 하지만!”'소녀는 말을 끝내지 않고 다시 입술을 질끈 깨물어 버렸다. 그리고 꾹꾹 내리눌러 왔던 울음을 결국 토해내고 말았다.'“웃으면서 보내주려고 했는데…… 정말 그랬는데…….”'소녀는 어린아이처럼 울고 마는 자신이 싫은 듯, 그럼에도 소년과 헤어져야 하는 이 상황이 서러운 듯, 댐이 터진 것처럼 흘러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나…… 너랑 헤어지기 싫어, 진환아…….”'문득,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소년이 성큼 소녀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다들 보고 있다는 것도 개의치 않고 소녀를 감싸 안았다. 소녀도 전혀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놓지 않겠다는 듯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만약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고 있었다면 영락없이 사귀는 사이일 거라 착각할 만한 모습이었다.'“금방 돌아올게.”'“그 금방이 언젠데! 내일? 모레? 일 년? 이 년? 그런 거 싫어! 단 하루도 너 없이 살 수 없단 말이야……. 나 못해!”'소녀는 소년의 셔츠에 대고 와앙 울음을 토해냈다. 흐느낌은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소년은 그저 소녀가 알아서 진정하길 기다리며 말없이 안아주었다.'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열네 살 때였다. 그리고 삼 년 반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함께했다. 소년의 곁엔 소녀가 있었고, 소녀의 곁엔 소년이 있었다. 삼 년 반 동안 두 사람은 그렇게 하나였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은 소녀와 소년이 영원히 동심의 세계에 함께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제 그들에게 어른이 되라 강요하고 있었다.'영원히 떠나가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조금만 크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고, 몸이 멀어진다고 마음마저 멀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웃으며 보내주려고 했다. 그가 잘되기 위해 유학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기꺼이 웃으며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어주자 결심했다. 하지만 막상 그가 떠나는 당일이 되자 내일부터는 학교나 집, 거리, 함께 가던 분식집, 강가, 어디에도 그가 없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가지 말까?”'소년은 소녀가 가지 말라고만 하면 정말 가지 않을 것처럼 물었다. 그러자 소년의 품에 안긴 소녀의 어깨가 움찔했다. 천천히 울음도 잦아들었다.'“장진환 이 바보야…….”'소녀는 평소처럼 장난꾸러기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아직 울음기가 잔뜩 배어 있긴 했지만 이제야 웃으며 보내줄 결심이 선 모양이었다.'“헤어지기 섭섭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도 모르고…… 너 진짜 재미없어.”'소년의 품에서 빠져나온 소녀는 그렁그렁한 눈물을 소매로 슥 훔쳐 내었다.'“너 잘되려고 가는 거잖아. 좋은 곳에서 좋은 공부하려고 가는 거면 매몰차게 등 돌리고 가야지, 바보같이 뭘 미적거려.”'세상이 끝난 것처럼 울던 게 언제냐는 듯, 소녀는 제법 어른스러운 말을 했다. 하지만 괜찮은 척하기가 소녀의 특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소년은 쓰게 웃을 따름이었다.'소녀는 척 손을 내밀었다. 눈은 울어서 토끼처럼 빨개져 있고 얼굴에는 불그스름한 열기가 올라 있는데, 그 동작만큼은 의연했다.'“내가 질투할 만큼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와야 해.”'“그래, 너도.”'소년은 소녀의 손을 맞잡았다. 맞잡은 손에서 손으로 말없는 감정의 교류가 흘렀다. 하지만 더 이상은 시간이 허락해 주지 않았다. 마침 스피커에서 소년이 탈 비행기에 탑승해 달라는 방송이 흘러나와 소년의 어머니인 중년 여자가 말했다.'“진환아, 이만 가자.”'소년은 천천히 손을 놓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게이트로 다가갔다. 소녀는 하염없이 그 자리에 서서 소년과 그의 어머니가 사람들 사이로 섞여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어머니는 이역만리에 외동아들을 처음부터 덜렁 떨어트려 놓을 수 없어서 며칠만 따라갈 뿐이라 곧 곁으로 돌아올 터였다. 하지만 돌아온 그녀의 곁에는 더 이상 소년이 없으리라. 소녀의 눈에 잠시 말랐다 싶었던 물기가 다시 술렁술렁 차올랐다.'그 눈물 젖은 배웅을 느낀 듯 소년이 갑자기 게이트 앞에서 소녀를 돌아보았다. 울고 있는 소녀가 걱정스러워 도저히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그에 소녀는 억지로 웃음 지었다. 헤어지는 것은 너무나 섭섭하지만, 친애하는 친구가 무거운 마음으로 타지 생활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소녀는 투명한 액체에 감싸인 눈으로 활짝 웃으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잘 다녀와. 흔히 웃는 법이 없었던 소년도 희미하게 웃으며 소리 없이 대답해 주었다. 다녀올게.'이내 소년의 너른 등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금방…… 돌아와야 해…….”'소녀는 다시 어깨를 떨며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말없이 소녀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