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5년을 만난 연인이었다. 입사동기로 만나 은밀한 연애를 시작했던 나이가 스물넷. 대부분의 사내연애가 그렇듯, 시작과 동시에 주변의 인물들이 하나둘씩 눈치 채기 시작하고, 어느새 모르는 놈 빼고 모두 다 아는 공식커플이 된 지도 오래였다.'[니들은 대체 얼마 만에 데이트를 하는 거냐?]'[석 달, 정확히 말하자면 89일.]'[그걸 세고 있었어? 근데 용준 씨 요새 계속 바쁘다며?]'[중요한 이야기가 있대.]'몇 달 전부터 주요 프로젝트를 맡아 눈코 뜰 새 없었던 용준은 연말을 맞아 오랜만의 만남을 청해왔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는 사족을 붙이던 어투에서는 사뭇 비장함도 느껴졌었다. 그날은 프로젝트 성공의 공로를 인정받아 그가 특별승진을 하던 날이기도 했다. '[중요한 이야기?]'[어. 목소리가 꽤 진지하던데?]'[야! 프러포즈다, 프러포즈!]'[……프러포즈는 무슨.]'[5년을 만난 결혼 적령기 남녀한테 중요한 이야기가 결혼 아니면 뭔데? 용준 씨도 서른에는 첫 애 낳을 거라는 네 계획 잘 알잖아. 결혼이야, 결혼! 우와, 드디어 현유가 시집을 가는구나!]'세희의 문자에는 흥분과 감격이 잔뜩 묻어있었다. 모든 남자를 외모와 직업 그리고 재력으로 1에서 10까지 등급을 매기는 그녀의 기준에 따르면 용준은 나 같은 평범한 여자의 짝으론 과한 3등급에 속해있었다. '[현유, 잘 생각해라. 결혼은 미친 짓이야.]'연이어 도착한 간결하고도 섬뜩한 문자는 은수의 것이었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인 것이 결혼이라더니, 전자에 속한 인물이 바로 그녀였다. 그러나 이미 결혼에 골인한 이들의 투정은 솔로에겐 배부른 소리로 들리는 법인지라, 나 역시 그때 은수의 한마디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얘들아, 이따 연락할게.] '친구들에게 마지막 문자를 전송한 후 카페로 들어서던 나는 얼어붙은 듯 멈춰서야했다. '사랑은 사람을 초능력자로 만든다. 아무리 복잡한 곳에서라도 그를 찾아낼 수 있고, 아무도 분간치 못하는 그의 음성과 발자국을 나만은 알 수 있다. 그의 표정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는 육감 또한 사랑하는 자만의 것이다. 한 사람의 복잡하고 난처한 낯빛에 내 가슴은 이미 내려앉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은 비켜간 적이 없다. 아침부터 거울이 깨진다거나, 간발의 차이로 버스를 놓치거나 하면 하루 종일 일이 풀리지 않는다. 그날 아침엔 내가 제일 아끼던 샤넬 립스틱 루쥬 알뤼르가 부러졌었다. 항상 마시던 종류의 아메리카노가 유독 입 안을 쓰게 휘감던 맛도, 그의 앞에 놓인 프렌치 로스트에서 스모키한 향이 강렬하게 풍기던 것도 모두 예사롭지 않던 징조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여, 여기 분위기 괜찮다. 그치?”'“현유야.”'용준의 말투는 평소와 다르게 무미건조했다. 톤 낮고 힘없던 음색은 내가 알던 것이 아니었다. 눈앞의 그가, 그의 웃음기 없는 표정이 너무도 낯설어 숨이 막혀왔다. '“그, 근데 커피는 너무 쓰다. 시럽 더 넣어달라고 할까?”'“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가 이쯤에서 정리하는 게 좋겠다는 거야.” '조금 전 두서없이 뱉었던 말들을 정리하려는 듯 그는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면 이상하게 구는 내가 알아듣지 못한 건가 싶어 다시 말하려는 건지도 몰랐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상대의 의도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는 않다. 나는 그저 어떻게든 그 상황을 모면하고 싶을 뿐이었다. '“커, 커피 진짜 너무하다. ……이제 여기 오지 말자.”'“같이 올 일 없을 거야. 헤어지자, 우리.”'농담이길 바랐지만 그의 표정에 장난기는 전혀 없었다. 일방적인 이별을 선포하는 모든 이들처럼 그의 얼굴에 떠올라있는 옅은 죄책감의 표정에 내 마지막 희망은 무참히 무너졌다.'“……이유가 뭐야? 다른 여자 생겼어?”'“아니.”'“내가 싫어졌어?”'“그것도 아니야.”'“그럼 대체 뭐야!”'드라마의 구질구질한 이별장면들이 싫었던 나는 자주 상상을 했었다. 이별을 예감하는 순간 내가 먼저 쿨하게 돌아서는 장면. 남자의 얼굴에 냉수가 아닌 주스나 커피를 뿌려주는 장면. 그러나 생각만으로도 통쾌하던 그것들 중 어느 것도 나는 할 수가 없었다. 마음에 안 들었던 장면을 고스란히 재연하며 나는 떨리는 손으로 커피잔만 감아쥐었다. 무엇보다 이건 드라마가 아닌 현실이었다. '“일을 열심히 해볼 생각이야.”'“내가 언제 일하는 거 방해했어?”'“결혼 할 생각이 없다는 거야.”'“누가 당장 결혼하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