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 들어와 오전 업무를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멍하니 시계만 보며 얼른 점심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점심때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민은채 그녀와 함께할 점심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책상 위로 손가락을 초마다 까닥이며 정각 12시가 되길 기다리자 시계는 실망시키지 않고 숫자 12에 두 바늘이 맞물린다. 재깍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쳐 둔 재킷을 입고 사무실 밖으로 나와 그녀가 있을 부서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녀가 일하고 있는 마케팅부서는 내가 있는 이사실과는 3층 차이가 나는 12층에 위치해 있다. 사원들이 이용하지 않는 간부 전용 엘리베이터라 빠른 시간 내에 12층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보이는 것은 다른 쪽 사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점심시간을 즐기기 위해 나온 사원들이었다. 일제히 저를 보며 인사를 했고 답을 해주는 것도 잠시 마케팅부서로 향했다. 때마침 지갑을 들고 단정한 걸음으로 걸어 나오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딱히 제 쪽을 보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얼굴에서는 미소가 그려지는 것 같았다. 목에 걸고 있는 사원증을 바로 하고, 아직 앞을 보지 않은 듯 옷매무새를 갖추며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얼른 가서 손목을 끌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충동적인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다행히 그녀가 먼저 제 쪽을 발견했고 늘 하는 목례를 가볍게 하고 좀 더 걸음을 빨리해서 다가왔다.'“제가 늦은 건가요?”'늦지 않았다. 철두철미한 성격에 늦는 걸 자신이 늦는 걸 허락할 사람도 아니었다. 의례적인 말. 좀 더 다른 게 있을 수는 없을까? 예를 들자면 ‘일찍 왔네요?’ 라던가.'“아니, 내가 일찍 내려온 것뿐이야. 뭐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있어?”'“전 다 괜찮아요. 이사님 좋은 걸로 해요.”'스쳐 지나가는 사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절대 순수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 저들의 눈이 참 싫었다. 마치 가십거리를 향해 갈구하는 것처럼 날카롭게도 시선을 겨누고 있었다. 메뉴를 정하지 않고서 그냥 걸음을 빨리하니 별다른 대꾸 없이 따라오는 걸음 소리가 들린다. 또각또각. 정갈하게도 울리는 그녀의 구둣발 소리가 다른 여자들의 특유 구둣발 소리와는 달리 싫지 않다. 어쩌면 그마저도 딱딱하게 느껴져 한구석으로 씁쓸함을 느껴야 했지만 말이다. 그녀와 함께 간부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서야 마주치는 사원들의 눈길에서 한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고의적인 점심 약속.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녀가 눈치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없는 척을 하는 것인지 어쩌면 둘 다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물음이 없다. 속물적인 부분이 전혀 드러나 보이지 않는 그녀가 왠지 마음에 든다. 물론 남들과 같이 외모에 먼저 끌린 것은 사실이지만 더욱이 파헤쳐 보고 싶다는 생각은 그녀의 얼굴이 마주하지 않을 때에도 끊임없이 제 머릿속을 괴롭힌다. 지갑을 든 손을 모으고 숫자가 하나둘씩 떨어져 내리는 것을 멍하니 보고 서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야릇한 상상까지 하게 된다. 잘 채워진 셔츠의 깃 위로 드러나는 하얀 목을 타고 내리는 선, 그리고 자연스레 이어지는 그녀의 가슴과 허리. 엘리베이터라는 일제히 분리되고 격리된 공간에서 무언가 저지르고 싶다는 깊은 충동. 숫자는 현재 8층을 나타내며 깜빡인다. 즉, 차가 주차된 지하 1층까지 시간을 벌기에 충분하다.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는 거리에 붙어서 있으면서 눈길은 잘도 그녀의 모든 것을 훑었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분위기에 휩싸여 실례든 뭐든 개의치 않고 저지르고 싶었다. 남성성이 반응했다는 이유 하나로 행동이 합리화되길 바라며.'“……읍!”'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에 그녀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음성이 흘렀지만 그것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보통의 여자들이라면 어땠을까?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는 것도 잠시 곧 밀쳐 내거나 잔뜩 붉어진 얼굴로 뭐 하는 짓이냐며 따져 묻겠지. 허나, 민은채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치 상사가 저지르는 짓이니 당연하다는 식으로 그 어떠한 감흥도 없이 키스 세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스 그 이상을 넘보려고 했던 충동이 일순간 사그라진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이라는 알림 소리를 내었을 때 진득하게도 배회하던 입술을 거두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태연하게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그녀 또한 자연스레 따라 나왔다. 지극히 일방적이라는 것은 누가 따져 묻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혼자 열을 내었다가 또 혼자 식혔다가. 상대는 그 어떤 심정적 동조도 없는데 말이다.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차에 먼저 걸어가서 보조석 문을 열어 주고, 그녀는 ‘고마워요.’하는 말과 함께 차에 올랐다. 상당히 익숙하지만 이질적이게 들리는 그녀의 ‘고마워요.’ 그녀가 하는 모든 말과 대답은 언제나 그렇듯 무미건조하다 못해서 딱딱 갈라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자주 가는 레스토랑이 있어. 분위기도, 맛도 나쁘지 않고. 어때?”'“네, 좋아요.”'장소를 고르는데 시간을 오래 할애하지 않고 바로 출발했다. 자주 가는 Q레스토랑까지 차로 걸리는 시간은 단 10분이었지만 침묵 속에 이어지는 10분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어떤 이들 같으면 이런 그녀가 재미도 없고 별다른 흥미도 없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는 달랐다. 어떤 것들이 숨어 있을 것만 같이 수수께끼 같은 그녀가 오히려 더욱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앙다문 입술에서 느껴지는 고고함과 동시에 묘하게 이는 정복 욕심. 이것은 본디 남자들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는 본능 중에 한 가지일 것이리라. 그녀에 대하여 생겨나는 온갖 생각들로 어쩌면 운전에 집중을 하지 못할 뻔도 했다. 다행히 장소는 엇나가지 않은 채 Q레스토랑으로 도착하고 먼저 내려서 그녀의 문을 열어 주려고 했으나 기초적인 매너의 발휘 시간도 없이 그녀는 직접 문을 열고 내렸다. 모르게 ‘피식.’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글쎄, 세상 모든 여자들과는 다르게 풍기는 그녀만의 매력이라는 게 이런 것에서 더욱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