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말, 그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소녀는 그 말을 달콤한 사탕처럼 굴리다가 이내 인상을 팍 썼다. 달콤하기만 하던 그 말이 쓰디쓴 쓸개처럼 돌변해버린 까닭에 비수가 되어 심장을 난도질 쳤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사람을 제 품에 온전히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마음이 아팠다. 기쁨으로 인한 눈물인지, 아니면 슬픔으로 인한 눈물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방울방울, 눈 꼬리를 타고 흘러내려 베개를 적셨다. 싸구려 모텔의 로고가 프린팅 되어 있는 베개에서는 눅눅한 먼지 냄새가 배여 나오고 있었다.'“읏.”'소년의 이마를 타고 땀방울이 또로록 흘러내렸다. 배려라곤 하나 없이 거칠게 움직이는 그를 받아내면서도 소녀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꽉 깨물고 모든 것을 받아 내리라, 초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 소녀의 표정이, 소년은 참으로 싫었다. 모든지 참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그 자신만만함이, 자신은 아프지 않으니 어디 마음껏 해보라는 당당함이, 그리고 깎아놓은 인형처럼 생겨서는 생기 하나 없는 그 모습이, 자신에게까지 차갑기 만한 얼음 같은 그녀의 성향이. '마음에 드는 구석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리도 마음이 쓰이는 것인지, 소년은 그 답을 알 수가 없어 더욱 거칠어졌다. '소년은 다듬지 않은 원석과도 같았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어두운 두 눈. 그 두 눈은 참으로 오묘했다. 눈에 물기를 가득 담은 그 모습이 마치 우수에 젖은 사슴의 눈망울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사냥감을 노리는 짐승의 것과도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주위 아이들이 이 소년에게 열광하는 것은 열여덟이라는 나이에 맞지 않는 그 조숙한 눈빛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자신만만하고 스스럼없이 자유롭게 행동하는 탓 때문인지도 몰랐다, 학교 모든 아이들이 그에게 이목을 집중시키는 까닭은. 그랬기에 그에게 있어 ‘타인’ 중 하나인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소녀 역시 그의 그런 점에 자꾸만 끌리는 자신을 발견했기에.'“아흣.”'처음으로 소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인 병의 코르크 마개를 따는 그 순간 퐁, 터져 나오는 소리처럼 한없이 가벼우면서도 짧은 찰나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소리에 소년은 희열을 느꼈다. 그래서 한없이 날아오르고 싶어져 버렸다. 날아오르게 된다면 제 한 몸 태워버리는 불사조처럼, 아버지보다도 더 높게 날아오르겠다며 태양을 향해 뛰어올랐던 이카루스처럼 자멸을 해버릴 것이 분명했다. 분명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소년과 소녀의 처음은 서툴렀다. 아픔 이외의 그 어떤 느낌도 존재하지 않았고 수치스러움, 그 외의 어떤 감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쾌락이나 희열, 사랑스러움을 모두 배제하고 아픔, 수치, 죄책감만을 동반한 그것은 ‘사랑’을 나누는 행위가 아닌, 그저 섹스에 불과했다. '그래, 두 사람은 섹스를 했다. '그날 밤은 비가 무척이나 내렸고 아스팔트를 부술 듯 내려치는 빗줄기에 물 냄새가 짙게 나는 날이었다. '막차는 끊길 시간이었다. 아는 사람이 살고 있는 곳도 아니었다. 비는 내렸고 갈 곳은 없었다. 비싼 호텔에 묵을 정도의 형편은 되지 못했다. 그랬기에 싸구려 러브호텔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비를 피하고 싶었고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처음에는. '거침없이 유린하는 그의 서툰 키스를 받으며 소녀는 기뻤고, 동시에 슬펐다. 이것저것 쓸데없는 소문들만 무성했던 터라 서툴기만 한 키스는 그 소문들을 그저 루머로 단축시켜 주었다. 그랬기에 기뻤다. 하지만 슬펐다. 그 키스에, 마음이 담겨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슬펐다. '무언가를 ‘건다’는 말을 참으로 싫어했음에도 소녀는 바보처럼 자신이 먼저 사랑을 걸고 말았다. 내기를 거는 것도, 사랑을 거는 것도, 거는 쪽이 불리한 것은 매한가지이기에, 불리한 것은 애초부터 싫었음에도. 소녀는 소년에게 사랑을 걸었다. 거는 쪽이 더 아프고 힘들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선배는 열여덟, 소녀는 열일곱.'사랑이라는 것을 알기엔 아직 어리기만 한 나이. 그 나이에 선배와 그녀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