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데 입이 이렇게 싼 거야? 야, 넌 직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래니?”'“그게 왜 내 탓이야.”'“됐어요. 어차피 언젠가는 알려질 일인데 조금 앞당겨졌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오늘 사실 좀 위험하기도 했고.”'“그거 참 미안하게 됐네요.”'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쏠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세 사람은 보통 때처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고 있으니 방송의 동료, 라이벌이 아닌 또래의 친구들 같았다. '예상했던 대로 난감한 상황이 터졌다. 모여 있던 셋을 수상히 여긴 기자들이 어디선가 누군가를 추궁해 『골든 타임 러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영화가 끝날 때쯤 세 사람을 내보냈어야 하는 건데, 분명 카메라 단속도 잘했고 영화 상영 중에는 아예 VJ들을 극장 밖으로 내보냈는데, 순식간에 그런 행동이 쓸데없는 움직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세 사람은 이런 상황이 뭐가 난감하냐는 듯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정신없이 터지고 현장 통제 같은 건 개나 주라는 듯 기자들이 여기저기서 무질서하게 움직이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지만 세 사람은 눈 하나 깜빡 하지 않고 조용하게 각자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그동안 정재환 작가에게 여러 소문이 있었는데, 본인은 그런 소문들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까?”'“주관우 이사의 채널 블루의 대표 취임이 이번 일로 보류 되었다는 게 사실입니까?”'“여자 분은 어떻게 해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까?”'하지만 덤덤한 세 사람 중 누구도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민준은 오늘 행사에 꼭 참석해야겠다는 관우를 뜯어 말렸어야 했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관우만 없었다면 저기 있는 기자들 중 단 한 명도 시희나 재환, 다른 촬영 팀들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은 철저하게 외면하는 게 호사가들의 특징 아닌가. '“한 분씩 천천히 질문해 주세요. 안 그러면 오늘 종일 이러고 있어야 할 것 같네요.”'관우의 한마디에 비로소 장내가 정리되었다. 그 한마디의 느낌은 전혀 상관없는 민준이 들어도 상당히 위협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나 사회적 지휘 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던, 시희의 똑 부러지는 말 한마디에 쉽게 대답을 못하던 촬영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일단 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인 세 분께 먼저 출연하게 된 계기를 듣는 게 좋겠네요. 그럼 여자 주인공인 온시희 씨부터.”'급하게 진행되는 인터뷰의 진행을 맡은 블루 미디어 그룹의 홍보실장이 운을 띄웠다. 순간 숨을 죽이고 있던 기자들이 일제히 시희에게 시선을 보냈다. 인식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눈동자들은 인공적인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눈빛들이 위협적이었는지 방금까지 당당한 모습이었던 시희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민준을 보며 한숨을 내뱉은 그녀는 부자연스럽게 마이크를 들었고 바로 작은 기침소리를 내며 바로 분위기에 적응했다는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처음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딱히 싫다고 말할 이유도 없더라구요. 제가 좀 재미없는 인생을 살아와서, 조금이라도 재미있는 추억을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재미있게 촬영하고 있구요. 그리고 사실, 출연을 확실하게 된 계기는 재환 씨 때문이에요. 제가 재환 씨 드라마의 팬인데, 그냥 재환 씨가 나온다고 해서 흔쾌히 수락 했어요. 자신에 대해 전혀 노출을 하지 않던 사람이 승낙한 프로그램이라면, 어느 정도 믿어도 되겠구나 하는 확신 같은 걸 줬거든요.”'자리에 앉기 전 시희를 격려하며 생각하는 그대로 이야기하라 했었는데,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할 줄은 몰랐다. 계속 덤덤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재환도, 주눅 들지 않으려 올곧은 자세로 기자들을 보고 있었던 관우도 시희의 발언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몇몇 기자들까지 솔직한 시희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서로 소곤거렸다. 민준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소리 내지 않고 심호흡을 했다. '시계 초침은 대여섯 번 지났을 뿐이었지만 느껴지는 공백은 아주 길었다. 그 시간의 공백을 잡고 다음 말을 이어 나간 건 관우였다. 방금 보여줬던 당황하는 기색은 완벽하게 사라진 모습이었다. 역시, 여기 앉아 있는 관계자들 중 미디어를 제일 많이 접한 사람다운 모습이었다. '“앞에서 질문도 해 주셨지만, 저는 제가 준비해오던 방송국의 경영권이 달려 있어서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시희와는 다른 면에 있어서 말도 되지 않는 일을 저질렀지만, 제 커리어와 인생이 걸린 문제이고 또한 제가 개국 프로모션에 직접적으로 참가한다고 해서 큰일 날 건 아니니 편한 마음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그런 면에 있어서는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경영권이라는 말에 기자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와 납득하기 힘들다는 표정들이었다. 이거, 정말? 하며 믿기 힘들다는 얼굴도 보여주고 있었다. '“앞서 온시희 씨가 출연하게 된 계기로 정재환 작가를 들었는데요. 그 말을 듣고 어떠셨는지 궁금하네요.”'그게 뭐 어때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라고 말하는 듯 웃고 있었지만 그 웃는 모습이 부끄럼 없는 진짜 모습일까. 기자들 앞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거짓말을 하는 일이 더 편한 듯 웃고 있는 관우의 모습은 진짜로 편안해 보였다, 믿을 수 없었지만. '“시희가 정재환 씨를 보고 출연을 했다는 말을 설명도 없는 상태에서 듣는다면 그럼 주관우는 불리한 게 아닐까 생각하는 분들도 많으실 거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시희랑 저는 단순히 학교만 같이 나온 초등학교 동창생이 아니라 같이 학교를 다녔던 3년 동안 친하게 지냈고 어른이 되어서도 종종 만났으니까, 정재환 씨와 제가 어느 정도는 평등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믿음을 줬다고 보는 게 좋겠네요.”'민준의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평온을 알리는 한 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제야 당황스러움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던 눈앞이 또렷하게 보였다. 겨우 숨통을 트고 안심하는 순간, 번개 같은 마이크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불꽃놀이처럼 강한 플래시가 터졌다. 뭐야? 하고 옆을 봤지만 그때는 이미 재환이 마이크를 들고 있었다. 몇몇 기자들이 아까처럼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고 싶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달라 눈치를 줬지만 민준의 눈을 읽어 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영권과 궁금했던 사람이라는, 존재감 있는 그것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게 제 이유인데 이유 없음이 이유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꼭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사람이 상처를 받으면 그걸 치유할 수 있는 건 사람이라 생각해요. 아무나 그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일을 생각해 보면 시희 씨가 안 되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일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면 저는 여기서 따분하다는 얼굴을 하고 입 꼭 다물고 있었겠죠. 방송을 안다는 이유로 주제넘지만 편집권에도 관여했을지도 몰라요.”'“이제껏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도 궁금하네요.”'“사실 얼굴이 알려진 작가님들이 더 적지 않나요? 이유가 없다기보다는, 저도 다수의 다른 작가님들처럼 얼굴을 드러낼 만한 일이 없어서 쭉 그렇게 지내 왔어요.”'언론은 의외로 재환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보였다. 재환의 말대로 그도 그저 다른 사람처럼 지내며 은근슬쩍 언론을 피해 다니긴 했지만 그에 비해 떠도는 소문들은 쓸데없이 많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가장 먼저 믿는다. 쓰는 족족 히트를 친 드라마를 만들었지만 이름만 있던 작가의 모습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공개되었다. 그리고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일축시킬 만큼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비주얼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다 리얼 연애 버라이어티에 출연하고 있으니, 보이고 들리는 이야기의 재생산은 시간문제였다. 그런 걸 생각한다면 관우에게 초점이 맞춰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과 대중들의 초점이 관우에게로 맞춰졌다면 그들은 진짜로 만들어지는 진짜 이야기를 전혀 믿지 못할 것이다. 모두 당연하게 주관우가 선택된다 생각하고 방송이 아닌 그 외의 이야기들을 생산해내며 모두를 귀찮게 하며 시간이 지나면 음식물 쓰레기를 내다 버리듯 그럴 게 분명했다. 그런 이유들에 더해 앞으로 사람들의 관심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집중될 것이다. 세 사람의 게임에는 이유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유명한 사람과 유명하지 않은 사람, 신데렐라 스토리냐 그냥 러브 스토리냐, 교집합처럼 얽혀있는 모습은 어떤 식으로든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