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날씨는 외롭다. 지독히 외롭다고 느끼며 그녀는 책상 앞에 턱을 괴고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색빛의 탁한 하늘은 곧 비라도 뿌릴 것 같이 흐렸다. 이내 투둑-소리를 내며 투명한 유리창을 차가운 비가 때리기 시작했다.'어지럽게 널브러진 디귿자 모양의 책상 위엔 아무렇게나 놓아져 있는 홀더와 스케일, 스틸 자, 그리고 동그랗게 말려있는 트레싱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검은 머그컵에 한가득 들어 있는 커피를 모니터 옆으로 치우고 주위를 간단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통에 트레싱지를 정성스럽게 말아 넣고 홀더와 자도 챙겨 넣었다. 그리고 잊지 않고 매직테이프와 지우개, 제도용 샤프도 집어 들었다.'본래 정해져 있는 퇴근 시간은 6시였다. 하지만 그녀는 정 시간에 퇴근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설계 작업이라는 것이 원래 야근이나 철야작업이 많았기 때문에도 그러했고, 그저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을 때면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도저히 집중해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그녀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실연을 당한 날이었다. 비록 혼자만의 실연이기는 했지만.'그녀는 회색빛의 재킷을 걸친 다음 지통을 어깨에 메고 커다란 크로스백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를 제 자리에 집어넣고 컴퓨터 모니터를 껐다.'“소연 씨, 전화. 1번이에요.”'“네. 라임건축 배소연입니다.”'수화기에서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끊긴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가 수화기를 놓으려 할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소연아, 잠깐만. 테이블은 저쪽으로 놔요. 여보세요?]'윤호였다. 바로 오늘 그녀가 스스로의 사랑에 종지부를 찍은 그 사람.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또 다시 그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미치광이 심장은 또 다시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고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반응하고 있었다. '소연은 애써 주먹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흰 손등으로 푸른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여보세요?]'“그래. 윤호야, 듣고 있어.”'반가움도, 그렇다고 해서 설렘도 섞이지 않은 거짓된 목소리가 마치 거짓말처럼 소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늘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여전히 변함없는 그의 목소리에서 그녀는 또 안식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10년간의 사랑은 그녀를, 감정을 배신했다.'[목소리가 안 들려서 끊긴 줄 알았다. 내일 모레면 오픈이야. 너희 소장님과 함께 올 수 있지?]'“소장……님과?”'[그럼. 건물 만들어 주시고, 설계에 인테리어까지 해주셨는데 모셔야지. 오늘 가구도 다 들어왔어. 아, 만나서 술 한 잔 할까?]'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자고 말할 뻔했다. 언제나 그랬다. 윤호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그의 요청이라는 것은 한 번도 거절하지 못했었다.'“미안. 오늘 몸이 조금 안 좋아. 집에 가서 쉬어야 할 것 같아. 내일은 어때? 전야제로 좋을 것 같은데.”'그 말을 내뱉는 순간 소연은 후회했다. 뒷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차피 지우기로 했다면 보지 않는 게 좋았다. 단 일주일 아니, 단 하루라도. 이제는 정말이지 이 끝없는 사랑을 그만하고 싶었으니까. '그녀는 빠르게 핑계거리를 만들어야 했다.'[그럼 어쩔 수 없지. 그럼 내일 선배네 Bar에서 보자. 7시 괜찮지?]'“참, 깜박했는데 설계 때문에 요즘 정신이 없어. 미안해. 그냥 내일 모레 소장님과 들르도록 할게.”'[그래? 많이 바쁜데 내가 시간 뺏고 있는 거 아니야? 목소리도 급해 보이네. 그럼 내일 모레 보자.]'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은 소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고운 미간이 절로 찌푸려질 만큼 피곤했다. 그의 목소리 하나에도 흔들리는 자신이 싫었다. 잊기로 결심해 놓고 반사적으로 그에 대해서라면 반응을 보이는 자신이 싫었다.'“며칠 전에 공모전 마감도 했는데 뭐가 바빠? 피하고 싶은 사람인 거야?”'대학 동기이자 이제껏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성희가 물었다. 소연으로서는 그냥 모르는 척해주기를 바랐다. 성희는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또한 그 동시에 윤호를 지독히 싫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