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이라지만 차가운 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었다. 사 년째 타고 다니는 애마를 두 손에 꼭 잡고 달리는 봉희의 얼굴은 헬멧에 가려 있지만 그 속에서 반짝이는 눈은 아름다웠다.'아기자기한 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송이 마을에서도 차로 십 분을 더 가야지만 봉희의 집이 있었다. 정미네 집과 두형이네가 제일 가까운 이웃이기 한 그녀의 집은 산골이었다.'“봉희야! 어딜 가냐?”'정미 엄마의 큰 목소리가 산허리를 휘감았다.'“읍내요.”'오토바이를 길가에 세우고 멀리 떨어진 아주머니에게 꾸벅 인사를 챙겼다.'“아버지, 아직도 아프시냐?”'“네. 파스도 떨어지고 해서 겸사겸사 가려고요.”'“그래. 어여, 다녀와.”'다시 길을 떠난 봉희의 뒷모습으로 따사로운 봄볕이 같이 했다.''도시의 물을 먹지 않은 읍내는 조용하고 아담했다. 누구라도 인사를 해야만 하는 작은 읍내에서 제일 큰 건물은 이 층으로 된 빨간 벽돌집인 읍사무소와 농협이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는 지금, 두 곳 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약국에서 파스를 사고 소소한 비상약품을 산 봉희는 차를 한 잔 하고 가라는 김 약사 아저씨의 친절을 거절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봉희야, 차 한 잔 하고 가.”'“아저씨. 장도 봐야 하고 아버지 저녁 챙겨 드리려면 빨리 가야 해서 죄송해요.”'“넌 어째 올 때마다 사람 섭섭하게 하냐.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한다냐?”'“아저씨도 무슨 섭섭한 말씀을 하시고 그러세요.”'“이참에 촌구석에서 나와 살라니까 너나 너희 아버지도 참 답답하다.”'봉희는 웃음이 나왔다. 여기나 거기나 촌은 매 한가지인데 언제나 촌구석을 나오라는 아저씨의 말이 오늘도 여전했다.'“아버지가 싫어 하셔서…….”'“봉희야. 그럼 너라도 시집을 와라. 우리 민재 녀석 짝으로 내가 전부터 널 점찍어 둔 거 알지?”'이럴 때마다 난감한 그녀는 뭐라 말도 못하고 시골에 여자가 없음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저, 이제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후다닥 약국에서 뛰어나온 봉희는 민재 오빠를 떠올렸다. 읍내에서 사는 집 축에 끼는 약국집 아들은 이 동네의 말썽꾼이었다. 마음이 착한 그가 껄렁껄렁한 친구들의 꾐에 빠져 모든 일의 책임을 떠안고 다니는 바람에 민재는 언제나 그들의 봉이었다. 재작년 봄, 패싸움이 붙은 곳을 지나가다 그 현장을 본 봉희가 경찰서로 가 보고 들은 내용을 말하면서 약국 아저씨는 물렁한 아들 곁에는 봉희처럼 야무진 여자가 제격이라며 며느리 타령을 하시는 통에 만날 때마다 곤욕을 치르는 것이다. 지방의 삼류대학을 나왔지만 그래도 읍내에서는 대학물을 먹은 민재 오빠는 작년부터 읍내에서 가까운 무진 시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누구누구의 덕으로 다닌다지만 지금은 번듯한 직장인이 된 그가 그일 이후 봉희를 좋아하고 있는 것은 온 읍내 사람이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봉희에게 민재 오빠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는 읍내의 누구와도 똑같은 오빠일 뿐이라 시집 운운 하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죽어라 줄행랑을 치는 것이다.''“아버지는 괜찮으시냐?”'한약 냄새가 은은하게 밴 가게 안에서 파우치에 호박 달인 물을 포장하고 있는 아저씨를 보며 대답을 했다.'“겨울에 감기에 걸리신 뒤로는 기운을 못 차리시네요. 어제는 지붕을 손보신다고 올라 가셔선 허리를 삐끗하셔서 누워 계셔요. 몸에 기운이라도 내려면 보약이라도 해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아저씨 뭐 좋은 거 없을까요?”'“그러게. 그럼 붕어를 다려 드리는 건 어떠냐? 그래도 기운 차리는 데는 붕어가 제격인데. 심 씨 아저씨에게 실한 놈으로 부탁해서 여러 가지 약제를 넣어서 푹 고아 드리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얼마나 할까요?”'“봉희를 보는 아저씨의 안쓰러운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일 년 동안 아픈 엄마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고 엄마가 죽고 나서도 그 빚을 갚느라 부녀는 삼년 동안을 힘겹게 살아온 것을 아는 이 씨는 봉희를 볼 때마다 대견하고 안 돼 보였던 것이다.'“내가 너한테 돈 벌어서 뭐하겠냐. 그냥 십 만원만 내. 원래는 십오 만원인데 내가 잘해 주는 거야. 약재도 좋은 걸로 넣어 줄게.”'“네. 고맙습니다. 아저씨, 우리 아버지껜 원가만 받았다고 해 주세요.”'“그려. 알았어.”'“그럼 내일 제가 다시 나올게요.”'“아니냐. 내일 동석이 편에 보낼게. 돈은 월요일 날 주고.”'“그러면 저야 좋죠. 그럼 부탁드릴게요.”'“오냐. 들어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