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우섭의 전용기사인 이 기사가 운전하는 검정색 BMW의 뒷자리에 할아버지 우섭과 나란히 앉은 지수는 차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차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황금들판을 기분 좋은 얼굴로 바라보던 열두 살의 지수가 스르륵 차창을 열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지수의 긴 머릿결이 흩날리고 있었다. '조부인 우섭의 시선이 눈을 감고 바람 냄새를 맡고 있는 손녀 지수에게 향했다.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우섭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손녀의 이름을 불렀다. '“지수야! 강지수!” '비로소 눈을 뜬 지수가 고개를 돌려 천진한 눈망울로 우섭을 바라보았다. '“응?”'편해 보이는 넉넉한 면바지에 카키색 카디건을 걸친 풍채가 좋은 우섭이 지수를 향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입가에 드리워진 부드러운 미소는 그대로였다. '“응이 뭐냐? 너 도현이네 가서도 할아비 말에 그렇게 대답할 게야?”'“할아버지는 당연히 아니지. 헤헤.”'할아버지를 향해 걱정 말라는 듯 미소를 지어보인 어린 지수의 시선이 다시 차창밖으로 향했다.'불어오는 바람에 묻어나는 흙냄새와 가을의 냄새가 가뜩이나 기분 좋은 지수를 한껏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차는 사차선의 아스팔트길을 벗어나 우회전을 해서 마을로 들어가는 작은 시멘트 길로 들어섰다. 시멘트 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익을 대로 익어 고개를 숙인 벼들의 모습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익숙한 마을길로 들어서고 눈에 익은 커다란 한옥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자 어린 지수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어대기 시작했다. '차가 한옥의 드넓은 마당에 멈춰 섰다.'“내리자.”'사과와 배나무들로 즐비한 과수원이 커다란 한옥을 빙 둘러 감싸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먼저 내린 지수는 뒤 이어 내리는 우섭에게 재빨리 다가가 작은 손으로 그를 부축했다. 우섭은 애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손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대문이 열리고 집 주인이자 우섭의 죽마고우인 하용천옹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소 짧은 듯한 하얀 백발에 선이 고운 한복을 입은 70대의 용천이 우섭을 향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 곁에 용천의 손자 도현이 서 있었다. 할아버지 용천과 비슷할 정도로 훤칠한 키가 도현을 열두 살의 소년 같지 않아 보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