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유는 신휘의 그 말을 되뇌어 보았다. 저를 보던 그의 감미로운 눈빛과 달콤한 속삭임이 귓가를 스쳐왔다. 그리고 입술과 턱에 낙인처럼 날아들던 그의 뜨겁고도 농밀한 숨결도. '‘후.’'어느새 가유는 가슴이 벅차올라 어깨를 들썩거리고 들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꽉 조여드는 것 같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미친 듯이 날뛰었다. '신휘의 그 말을, 저를 좋아한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제가 여인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 그는 어떤 반응을 나타낼까? 그런 생각들이 바람처럼 뇌리를 흔들며 지나갔다. 하지만 가유는 신휘에게 그 사실을 직접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사내의 달콤한 속삭임에 젖어들기엔 아직 일렀다. '그리고 가유는 한없이 두렵기도 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엔 반드시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좋아하는 크기만큼, 아마도 그 크기만큼, 아플 것이었다. 가슴이 시리기도 할 것이다. 얼마의 눈물과 한숨, 그리고 인내도 동반할 것이었다. 가유는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그런 고통을 결코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모름지기, 그러면 너무도 힘들 것이기에. '하아. 가유는 조용히 한숨을 뱉어냈다. 앞으로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달라질지 장담할 순 없지만 가유는 그냥 이대로 신휘의 곁에서, 그를 보필하는 위사로, 그림자로 남기로, 다시 한 번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추슬렀다. 그냥 저를 위해주는 그의 마음만으로 만족하고 싶었다. 억지로라도. '신휘는 가유를 더듬던 시선을 천천히 거둬들였다. 그의 눈동자에 스치던 기묘한 불꽃도 사그라졌다. 대신 그의 입과 눈매가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얼마 후. 신휘는 뭔가를 더듬듯 생각에 깊이 잠겼던 눈빛을 털어내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곤 별안간 군사 중 누군가를 불렀다.'“원표.”'“예, 주군.”'원표라 불린 한 군사가 냉큼 그에게 다가갔다. 신휘는 그와 뭐라고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자 원표가 먼저 말을 달려선 어디론가 떠났다. 가물가물 어느 마을길로 접어들어 멀어진 원표를 보던 신휘는 이번엔 원표의 아우인 진표라는 사내와 율겸을 불렀다.'“율겸, 짐꾼들과 함께 먼저들 가서 남천교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나는 진표와 잠깐 들러볼 데가 있다.”'“알겠습니다.”'“그리고 진 위사는 나를 따르도록.”'“예, 주군.”'연비의 일기장을 곰곰이 살펴볼 때마다 의혹이 증폭되었던 신휘는 황안으로 가던 길에 연비를 시중들었던 여관이자, 진옥의 고모였던 옥단의 고향에 잠시 들를 작정이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그는 만에 하나라도 현비의 수족이 따라붙지나 않을까, 경계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또한 황궁을 떠나오면서도 그는 아주 철저하게 현비와 그 측근들에게 보이지 않는 눈과 귀를 심어 놨었다. 율겸을 비롯한 일행들을 남천교로 보내고 은밀히 샛길로 빠져든 것도 다 그런 이유였다. 이미 그는 얼마 전에 자신의 충복인 진표 형제들을 시켜, 당시 연비를 가장 가까이에서 수발했던, 지금은 쫓겨난 옛 청월궁의 궁녀들의 신원을 은밀히 파악하도록 지시를 내렸었다. '진표 형제들이 알아낸 바에 따르면 궁녀들은 연비가 자살하고 난 후, 황궁에서 쫓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사약을 받아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신휘에게 연비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한층 더 증폭시키고 말았다. 신휘가 은밀히 알아본 바, 당시 그들에게 궁에서 사약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신휘는 매실에게 연비의 일기장을 건네준 옥단에게 뭔가 커다란 비밀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강한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찢겨져 나간 일기장에 대한 의혹도 옥단에게 그 초점이 맞춰졌다. 신휘는 연비의 일기장이 찢겨진 이유에 분명 드러내기 난감한 그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옥단이 일기장의 일부를 찢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옥단을 비롯해 연비를 시중들던 궁인들이 모두 사약이라는 명목 하에 죽임을 당한 것이 바로 그런 추측을 강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신휘가 좀 전에 먼저 원표를 옥단의 본가에 보내, 옥단의 큰 오라비에게 자신의 행차를 은밀히 알리게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궁에서 쫓겨났던 옥단이 사약을 받고 죽을 때까지 큰 오라비 집에 있었으니, 그가 털끝만큼이라도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얼마의 기대감이 작용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