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상황은 이렇게 비극적이지 않았다. 세종그룹을 이끌고 있는 총수 정용운 회장의 건강이 최근 들어 많이 나빠졌다는 이유로, 30년 동안 그의 수족노릇을 해 온 비서 최 여사의 반 강제적인 권장에 정 회장은 일요일 하루, 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정 회장은 건설, 철강을 주력사업으로 해 왔는데, 최근 들어 자동차사업까지 추진하느라 무리를 했던 탓이다.'신문을 읽고 마당의 화초에 물도 줬지만 시간은 멈춰버린 듯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바로 그럴 때 대주그룹의 권 회장이 찾아왔다. '정 회장이 휴식을 취하는 일요일이면, 권 회장은 가끔 찾아와 그에게 한 수 가르침을 받아가곤 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휴식이 즐거웠다. 특히 바둑에 내기라도 걸리면 그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권 회장은 8급, 정 회장은 1급. 급수로는 상대가 되지 않음에도 권 회장은 언제나 값나가는 어디의 몇 년산 양주를 들고 온다든가, 또는 정 회장이 좋아하는 오래된 도자기 등을 들고 와 내기를 걸곤 했다.'하지만 권 회장이 뭔가를 들고 정 회장의 집 대문을 나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돈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는 물건들이었고, 그렇다고 그룹의 총수인 정 회장이 돈이 없어서 못 사는 것도 아니었다. 내기를 해서 당당하게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것은 상당한 즐거움이요, 취미였다. '그렇게 술을 가지고 오면 둘은 바둑을 끝내고 서로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우애를 돈독히 다졌다. '정 회장보다 십여 살이나 연배가 낮은 권 회장은 무슨 이유에선지 매번 지는 내기를 또 걸기 위해 정 회장이 쉰다는 정보만 입수하면 뻔질나게 정 회장의 저택에 드나들었다.''정 회장은 마침내 노여운 눈으로 권 회장을 쳐다보았다. 지금 정 회장은 권 회장과 오늘 하루만 세 번째 바둑을 두고 있었다. '처음엔 언제나 그렇듯 권 회장이 자신의 비서가 들고 있는 비싼 위스키와 정 회장이 애지중지하는 로마네콩티 89년산 와인과 내기를 하자고 했고, 정 회장은 웃으며 수락했다. 외국 바이어에게 선물 받은, 황홀함의 극치라 찬사를 받는 그 와인을 맛보고 싶어서 그런가보다 생각했다. 그리고 정 회장은 정정당당히 권 회장의 위스키를 넘겨받았다.'권 회장은 다른 때와는 달리 약이 오른 듯 보였다. 그는 작정을 하고 온 듯, 자신이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풀었다. 보석이 숭숭 박힌 그 시계는 한눈에 보아도 값비싸 보였다.'“어허! 이 사람, 왜 이러시나! 기분 좋게 시작했으면 기분 좋게 끝내야지, 이게 뭐하는 짓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