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 봐도 꽤 값비싸 보이는 가구가 온방에 가득했다. 모던하면서도 고풍스러운 걸 좋아하는 안주인의 취향답게 차분하게 꾸며진 침실은 22살 남자 대학생 방이라기엔 깔끔해도 너무 그랬다. '‘사람 사는 집이 이래야지. 그 집은 무슨 돼지우리 같아서.’ '저녁식사 후 집에서 차나 한잔 마시고 가라는 시원의 제안을 연거푸 거절하고 돌아선 준우는 정신없이 포르쉐를 몰았었다. 두통이란 심한 몸살감기 때나 찾아오는 것쯤으로 알던 그가 난데없고 극심한 관자놀이의 통증에 집에 오자마자 진통제를 찾아 먹었던 걸 보면 하루 동안의 충격이 크긴 정말 컸던 게 분명했다. '‘뭘 먹을까.’라는 준우의 말에 뚫린 입으로 잘도 패밀리 레스토랑을 읊은 건 여자였다. 생긴 꼴로 보자면 순대나 떡볶이 정도가 딱일 상대가 셋이 가면 10만원은 우습게 넘길 곳을 꼽자 준우는 물론이요 시원까지 그 뻔뻔함에 말문이 막혔었다. 그런 여자를 동시에 무시하고 두 남자가 합의를 본 곳은 근처의 삼겹살집. 그곳에서도 내가 어떻게 고기를 굽겠냐며 팔짱만 끼고 곱게 앉아 계시던 여자 덕분에 시원만 혼자 고기를 얹으랴, 뒤집으랴 간간이 쌈을 싸서 시아에게 건네랴 정신이 없었다. 먹기는 또 왜 그렇게 잘 먹는지 혼자 3인분도 넘게 먹어치운 그녀의 대단한 먹성확인으로 준우의 엽기체험은 마무리되었다. '“도련님, Good morning.” '“좋은 아침 아니야.”'“아침인사라도 그냥 정겹게 나누고 살아봅시다, 까칠한 도련님.”'거실 한가운데 깔린 요가매트 위에서 유연하게 스트레칭을 하던 지연이 계단을 내려오는 준우를 발견하곤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날씬한 몸매가 드러나는 보랏빛 트레이닝복은 또한 건강미 흐르는 그녀의 까무잡잡한 얼굴과 너무도 잘 어울려, 보고만 있어도 상큼한 기운이 확 몰려오는 듯 했다. 배꼽이 언뜻 보이는 짧은 상의와 골반에서부터 일자로 뚝 떨어지는 하의의 자태가 자연스러우면서도 꽤나 멋스럽기까지 한 형수를 한참 바라보던 준우가 달라도 너무 다른 시아의 모습을 이내 떠올리고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폈다. '“형수, 그런 옷은 어디서 팔아?” '“이런 옷? 요즘 많이 파는데. 다들 입고 다니잖아. 이거야 비싼 브랜드지만.”'“그래? 아무 데서나 다 팔아?” '아무 데서나 판다는 옷을 그 여자는 대체 왜 못 사 입고 아저씨 같은 추리닝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는 건지 갑자기 그게 궁금한 준우가 요가매트 뒤편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 '도련님과의 인사를 기점으로 아침운동을 끝낸 지연은 직접 갈아 만든 토마토주스 한 잔을 들고 여전히 얼굴을 구기고 있는 준우의 곁에 자리를 잡으며 늘씬한 다리를 꼬았다. 이 인간이 죽을상인 게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또 누군가가 이 예민한 사내의 심기를 건드렸거나 거리의 소음따위로 밤새 뒤척인 게 틀림없으니 딱히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었다.'“시원 씨 이사는 잘했어? 우리 집에 있어도 된다니까, 왜 싫대?” '“신세지는 거 싫대.” '“그럼 어디로 간 거야?” '“고향친구네 집.” '딸린 식구 있는 이 집보다야 혈혈단신인 그 여자 집이 편하다는 건 알겠지만, 아무리 고향친구라도 엄연히 성별이 다른 여자 집에 얹혀살겠다는 시원의 결정이 아직까지 이해가 가지 않는 준우였다. 단 이틀 밤이긴 했지만 시원의 싹싹함에 그야말로 뻑이 갔던 형수가 시원의 이사를 두고두고 안타까워하는 것도 당연할 일이었다. '곁에 앉은 형수에게서 밀려오는 상큼한 향수 내음에 순간 어제 그 여자가 또 떠올랐다. 비교체험 극과 극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달라도 너무 다른 스타일을 대면한 탓이겠지만, 암만 그래도 매력이 철철 넘치는 형수와 추리닝공주의 연상 작용이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을 노릇이었다.'“형수, 형수는 학교 다닐 때 별명이 뭐였어?” '“나? 물론, 지연공주.” '“풋. 진짜?”'같은 공주인데 어쩜 저리 다를까 싶은 눈초리가 또 한 번 시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연에게로 박혔다. 사실 공주라는 단어는 이 정도는 되는 사람에게나 어울릴 만한 닉네임이었다. 풍성한 갈색 웨이브머리를 자연스럽게 틀어 올려 핀으로 고정한 지연이 제법 예리한 눈초리를 준우에게 박았다. '“뭘까, 그 웃음의 의미는?”'“아니야, 아무것도.”'“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분위기인데?” '그의 평소 표정이 어떠하던가. 재밌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는 듯 그저 이놈의 세상 지겹다는 세기말적인 표정만 짓고 다니던 도령이 그였다. 그랬던 준우가 저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자체가 지연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좀 별난 공주를 만났거든. 별나기만 하신가 어찌나 뻔뻔하신지.”'“오호라.”'그 감탄사가 무슨 뜻이냐는 시선이 준우에게서 돌아오자 결 좋은 그의 회색빛 면티를 잘 다듬어진 손톱 끝으로 툭툭 건드리는 지연의 표정은 뭔가 재밌는 구경거리를 찾았다는 듯 생기가 가득했다. 재벌집 안주인으로 산다는 게 사실 지루하기 짝이 없던 요즘이었다. 결혼 전에는 잘 나가기로 유명하던 그녀였기에, 교양 빼는 사모님들 틈에서 지루한 수다나 듣고 앉아 있어야 하는 모임들도 죄다 하품만 줄줄 나오기 일쑤였던지라 준우의 한마디에 근래 보기 드물게 사는 재미까지 솔솔 솟아오르는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 도련님이 드디어 임자를 만나신 건가?”'“임자는 무슨!”'“어머, 소리까지 지를 건 또 뭐야, 아님 그만이지.”'누가 단순하기로 유명한 이 집 남자들 소속 아니랄까 봐 장난기 섞인 한마디에 자리에서 일어나 손사래까지 쳐대는 도련님을 올려다보는 지연은 여전히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별난 공주라. 그렇다면 여자임이 분명하다는 건데, 여자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던 준우가 누군가에게 어떤 이유로든 관심이란 걸 가졌다는 자체가 이쪽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물며 언젠가 도련님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토론을 하느라 부부지간에 밤새운 국제전화로 숱한 돈을 날렸지 않았던가. 한창 이성에 호기심이 많을 사춘기시절에도 여자 보기를 그야말로 돌처럼 하던 도련님 덕분에 난상토론을 벌였던 지연이었으니 오늘 이 광경은 실로 신나고 감개무량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별난 공주라니. 일단 상대가 누구든 덮어놓고 두 손 들어 환영이라는 뜻을 단단히 세운 지연이 허적거리며 2층으로 올라가는 준우의 뒤통수에 마지막 물음을 내던졌다. '“그 공주, 이름은 뭔데?”'“에이씨, 그만 물어. 별 거 아니라니까 왜 자꾸 그래!”'“뭐냐니까 이름이.”'“몰라! 섭섭이래나 뭐래나.”'섭섭이?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그게 뭐냐는 표정이 지연에게서 떠오르다가 그 또한 묘한 웃음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섭섭이든 뭐든 준우가 한번 만난 여자의 이름을 외우고 있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사랑하는 도련님의 러브러브라. 그 속사정을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뜬금없는 승부욕이 화사한 웃음 속에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