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회계법인은 소속 회계사만 삼백여 명이 넘는, 명실상부하게 국내에서 최고라고 손꼽는 회계법인으로 알려져 있다. 테헤란로에 위치한 거대한 빌딩의 몇 개 층을 모두 쓰고 있는 그곳에서 한라윤의 아침도 시작되었다. '새해가 시작되어 새 기분에 일하게 된 탓도 있겠지만, 법인들의 결산이 들어가기 전 회계감사를 끝내야 하기 때문에, 회계사들에게는 이 시즌이 가장 바쁜 때이기도 하다. 이제 4년차가 된 라윤 또한 굵직한 몇 개의 법인 회계감사를 할당 받은 터라, 요즘 그녀 또한 정신없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외근도 잦았고, 돌아와 작성해야 할 보고서도 밀려들었다. 건강에는 웬만큼 자신이 있고, 완벽한 성격으로 정평이 나서, 엄살과는 거리가 먼 한라윤으로서도 요즘 같아서는 허덕이며 비명을 지르기 일쑤인 그런 시즌이다. '조금 가늘어 보이지만 가슴과 엉덩이의 볼륨으로 친구인 희수의 말을 빌자면 완벽하리만큼 환상적인 몸매를 가진 그녀였다. 온몸을 적당히 감싼 감색 정장 스커트를 입은 그녀의 흰 얼굴이 요즘은 조금 더 창백해 보였다. 워낙 잡티 하나 없이 투명하고 깨끗한 피부였는데, 요즘은 마주치는 직원마다 피부가 까칠해졌다고 할 정도이니, 최근 업무의 강도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20대의 혈기로 버틴다며 단발머리를 찰랑이는 그녀의 모습은 전형적인 커리어우먼 그대로였다. '“준비됐어, 한 회계사?”'주말을 지낸 월요일. 오늘 함께 업체에 감사를 나가야 할 선배, 정진영 회계사가 라윤의 방문을 두드리고 나타났다. '그녀의 대학 선배이기도 한 진영은 여러 면에서 고려되어 그녀와 함께 팀을 이루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라윤의 약한 면을 보충해 줄 수 있는 성격이기도 해서 함께 일을 하기 편한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서글서글한 인상과 달리 진영은 성격상 바늘 끝까지도 세심하고 정확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진영 특유의 부드러운 웃음으로 말을 건넸지만, 라윤은 조금 움찔거렸다. 지난 주말, 어머니가 건넨 사진이 떠오른 탓이었다. '‘사람 참 괜찮아 보이지?’'흐뭇하게 웃으시는 어머니 앞에서 라윤은 그 사람을 알고 있다는, 자신과 함께 일하는 선배라고 말하지 못했다. '‘나이도 너랑 딱이고, 회계사란다. 그럼 일하는 것도 서로 잘 맞을 거 아니니.’'‘회계사요? 그런데 왜 나를…….’'‘네가 어때서?’'어머니의 목소리가 바로 날카로워지셨다. 그래서 라윤은 차마 묻지 못했다. 이 남자가 어느 곳에 근무하는지 아시느냐고. 아니다. 부질없는 일. 같은 회계법인에 근무한다 했어도, 삼백 명이 넘는 직원들 중에서 사진 속 그 남자와 자신이 지금 같은 팀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추측하시리란 보장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