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그녀는 온 몸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느끼며, 눈을 뜨기 위해 애썼다. 눈 위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어 놓은 듯 그 간단한 동작이 죽을 만큼 힘이 들었다. 눈꺼풀을 위로 밀어 올린 뒤에도 한동안 뿌옇게 흐려서, 잘 보이지 않는 주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려야만 했다. 반복된 동작 끝에 그녀는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병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정신이 들어요?”''그녀는 자신의 손을 덥썩 잡으며, 격앙된 어조로 말하는 낯선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전혀 떠오르지 않는 한 남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누구?”''“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그녀는 자신에게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지만, 기억을 더듬어 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조차.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해버려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멍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당신은 누구시죠?”''그는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 오토바이랑 제 승용차가 부딪히는 사고가 났었어요. 그리고 아가씨는 병원으로 실려 왔구요. 지난 3일 동안 전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정말이지 죽는 줄만 알았어요. 이렇게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요.”''사고. 오토바이. 승용차.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왜 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지? 그녀는 머릿속이 백지로 변해버린 듯한 느낌에 두려워 지기 시작했다. ''“정말 기억나는 게 없어요?”''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갑자기 온 몸에 한기가 느껴지면서 두려움이 밀려왔다. 두 팔로 몸을 감싸안았지만, 떨림은 쉽게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 ''잠시 후 병실문이 열리고,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왔다. 그녀는 여전히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뒤쪽에 서 있던 남자가 의사를 붙잡고, 잔뜩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삼촌? 수술이 잘못된 거 아니에요?”''“한번 살펴보자.”''그가 삼촌이라 부른 남자, 중후한 매력을 물씬 풍기는 의사가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가 어느 정도 진정될 때까지 잠시 시간을 가지고 기다렸다. 의사는 그녀의 몸의 떨림이 어느 정도 잦아졌을 때에야 청진기를 꺼내들고, 진찰하기 시작했다.''“특별히 아픈 곳 있어요?”''“모르겠어요.”''그녀는 분명하지 않은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사고 당시 아가씨는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았어요. 다행이 수술할 정도는 아니지만, 교통사고, 특히 머리를 다친 경우에는 결코 안심할 수 없어요.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 뭔가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해서 불안해하거나, 초조해 하지 말아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테니까.”''친절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태를 차근차근 설명하는 의사의 말에도 그녀의 불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지금은 회복하는 것에만 신경 쓰도록 해요. 다른 건 그 이후에 생각하고.”''의사는 그녀의 등을 토닥거리고는 뒤돌아서 간호사에게 주사 처방을 내렸다. 그리고 옆에 초조하게 서 있던 남자를 바라봤다. ''“잠깐 밖으로 나가자.”''의사가 병실을 나간 뒤, 남겨진 남자가 그녀를 흘끔 돌아보고는 뒤따라 나갔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사고 후유증이 심각할 지도 모르겠다.”''“사고 후유증이라면?”''“예를 들어 기억상실증 같은 거 말이다. 단정짓기는 힘들지만, 지금 저 아가씨의 상태로 봐서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어.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은 마라.”''“만약 기억상실증에 걸린 게 확실하다면요? 그런 거라면 기억을 되찾을 수는 있는 건가요?”''“혹 기억상실증이 확실하다고 해도 특별한 치료약은 없어.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지금 현재 할 수 있는 건 좀 더 빨리 뭔가를 기억해 낼 수 있도록 기억 회복에 도움이 될만한 장소나 행동들을 반복하는 것 뿐이야. 하지만 저 아가씨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오히려 너한테는 도움이 될 수도 있어.”''“하지만.”''“당분간 지켜보도록 하자.”''잠시 후 병실로 들어온 남자는 죄책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해요.”''그녀는 그가 왜 그토록 자신에게 미안해하는지, 사고가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그녀는 초점 잃은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다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다.''''''그녀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속을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 오르고, 다리에 힘이 빠져 그만 멈추고 싶었지만, 어두운 그림자는 계속해서 따라왔다.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더 이상 그림자를 피해 달아날 힘이 없었다. 그림자가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림자의 존재로 인해 그녀는 극도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꼈다. ''제발 살려줘!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와 자신을 붙잡으려는 순간 두려움이 최고조에 달했다. 온 몸이 떨리고,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기를 바라며, 목이 쉴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정신 좀 차려봐요!”''누군가의 목소리에 눈을 뜬 그녀는 자신이 경험한 것이 꿈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리고 자신이 꿈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 남자가 놀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악몽을 꾼 거 같은데, 괜찮아요?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았는데.”''“저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거 같은데. 당신은 왜 아직 여기 있는 거죠?”''“사고를 낸 사람은 나, 아니 일이야 어찌됐든 간에 다쳐서 누워 있는 사람을 두고 그냥 갈 수는 없잖아요. 근데, 정말 떠오르는 게 하나도 없어요? 사고 현장은 그렇다 치고라도 이름이나 사는 곳이라거나……. 뭐 그런 것들도 기억나지 않아요?”''그녀는 힘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사고 후유증 때문에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을 수가 있대요.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해요.”''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숙이고 있는 그녀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 상황에서 좀 어색하긴 하지만, 우선 내 소개부터 해야겠네요. 내 이름은 강준우라고 해요.”''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던 준우는 혼란이 가득한 그녀의 시선에 서둘러 손을 거두었다.''''''한 여사는 자신의 시동생이자 종합병원 외과 과장인 민철의 설명을 들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며칠 전 자신의 아들 준우가 제법 큰 사고를 쳤다는 소식을 듣고 난 이후 처음으로 병원을 찾는 터였다. ''“기억상실증입니다.”''“기억상실증이라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지금 상태로는 일시적 기억상실증인 듯 하지만, 정확한 건 알 수가 없습니다.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우선은 지켜보는 수밖에 방법이 없습니다,”''“지금이 형님한테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삼촌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이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 타격이 커요. 사람을 시켜서 사고 현장도 깨끗하게 수습했고,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입도 단단히 막아놨어요. 문제는 저 아가씨예요. 사고 소식 듣고 그 사람이 얼마나 노발대발 했는데. 어떻게 빨리 해결이 안 되겠어요?”''한 여사는 선거 준비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 남편 강 회장이 준우가 일으킨 사건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어떻게든 그렇게 되는 일은 막아야 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지금은 기억을 잃은 상태이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혹 내일이라도 기억이 돌아올 경우를 생각한다면. 우선은 최대한 저 아가씨에 대한 정보가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고 현장에서 발견한 물건이 있으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 두십시오. 특히 저 아가씨의 신분을 확인할 만한 것이 있다면 더욱 철저하게 숨기도록 하시고요. 그리고 당분간 저 아가씨를 데리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데리고 있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삼촌?”''“언제 기억이 돌아올지 모르니 그때까지 만이라도 함께 있도록 하십시오.”''한 여사는 민철의 말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최선이라면 그렇게 해야죠.”''한 여사는 외부인을 집에 들여놓아야 한다는 사실이 내키지 않았지만, 일을 덮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지난 며칠 동안 사고 수습에 얼마나 신경을 썼던지 기가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마지막 하나를 해결하지 못해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준우는 강의가 끝나기가 무섭게 병원으로 달려갔다. 이름도 모르는 한 여자가 계속 머리 속에서 맴돌아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사고가 난 것도, 그녀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도 모두 자신의 탓인 것 같았다. ''그 날 술만 마시지 않았더라면. 아니 술을 마신 뒤 운전대를 잡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자꾸만 밀려오는 후회와 죄책감에 괴로웠다. 하지만 그녀 앞에서는 절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아버지인 강회장의 정치 생활을 위해서,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해야만 했다.''준우는 어제 저녁 어머니가 자신을 불러 앉혀놓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의 기억이 돌아 올 때까지 만약을 대비해 직접 데리고 있는 게 좋겠다는 말. 그는 그것이 최선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사고를 친 장본인으로써 자신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준우가 병실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저 왔어요.”''그의 목소리에 뒤돌아보긴 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어떠한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전 언제쯤 퇴원할 수 있죠?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곧 나가게 될 거예요.”''준우는 축 쳐진 그녀의 뒷모습에 가슴이 저려왔다. 사고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의 일상을 보내고 있었을 텐데.''“어쩌면 저한텐 이곳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지금 나간다고 뭐가 해결되겠어요.”''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막막하기만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의 이름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려 하면 할수록 더욱 초조하고 불안해지기만 했다.''“퇴원하면 당분간 저희집에 가 있어요.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만.”''“나 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되요. 기억은 잃었지만, 어떻게든 살아가게 되겠죠.”''“아니, 그래야만 해요!”''그녀는 자신의 집으로 가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준우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사고 당사자라고는 하지만, 담당 간호사에게 전해들은 얘기에 의하면 쌍방과실이었다고 했는데. 굳이 그가 자신을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면서 어디로 가려고 그래요? 그러니까 당분간 저희집에 있는 걸로 해요. 기억이 돌아오면, 그때 나가면 되잖아요.”'자신에게 무슨 선택권이 있겠는가. 그녀는 더 이상 준우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지금 현재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준우 뿐이었다.''“고마워요. 당분간만…… 부탁드릴게요.”''“그럼 이름부터 하나 지어야 겠네요. 계속 ‘이봐요’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 무슨 이름이 좋을까요? 뭐 평소에 마음에 들었던 이름 없었어요?”'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이름도 기억 못하는 판에 평소 마음에 들었던 이름이 있었다 한들 기억날 리 만무했다. ''“아, 미안해요. 내가 괜한 걸 물어봤네요. 어떤 이름이 좋을까?”''준우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의 이름을 모조리 떠올려 봐도 마땅히 어울릴만한 이름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 시간쯤 그러고 있었을까. 준우는 순간 누군가의 이름이 떠올라 손으로 무릎을 탁 쳤다.''“생각났어요. 당신한테 딱 어울릴만한 이름. 서민주! 어때요?”''“난 어떤 이름이든 상관없어요. 언젠가는 내 이름을 찾을 테니까.”''“고등학교 때 과외 선생님 성함이에요. 당신처럼 무척 예쁘고, 착한 분이셨어요.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소식조차 모르지만, 저한테는 좋은 기억만 남겨주신 분이에요. 잠깐 이름 빌려쓴다고 해도 기분 나빠하지 않을 거예요.”''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준우는 사고 이후 처음으로 본 그녀의 미소에 멈칫했다. ''“그럼 앞으로 당신을 서민주라는 이름으로 부를게요. 물론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만.”''준우는 그녀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주일 뒤, 민주는 기사가 딸린 고급 승용차에 철저한 보호를 받으며, 준우의 집에 도착했다. 그녀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저택 규모에 할 말을 잃었다. ''“여기가 준우씨 집인가요?”''“들어갈까요?”''준우가 멋쩍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등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한 발 앞으로 내딛는 순간, 민주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준우가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요?”''“괘, 괜찮아요. 병실에 너무 오래 있어서 그런가 봐요.”''민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를 향해 살짝 미소지어 보였다. ''“정말 괜찮아요.”''“힘들면 힘들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요. 그래야 거기에 맞는 조치를 취할 수 있으니까.”''민주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현관까지 가려면 돌계단과 잘 가꾸어진 정원을 지나야 했다. 그녀는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경험했다 하더라도 기억하지 못하는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앞섰다. '준우가 현관문을 열고, 그녀가 먼저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길게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 여사와 준우의 누나인 주리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어서 와요.”''“본의 아니게 신세를 지게 돼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민주가 고개 숙여 감사의 표시를 했지만, 두 사람의 태도는 냉랭하기만 했다. 준우는 그런 두 사람에게 눈치를 주고는 민주를 2층으로 안내했다. ''“이 쪽으로 와요.”''민주는 한쪽 벽이 모두 유리로 되어 있어 햇살이 가득한 방에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그 안에서 날아다니는 티끌 하나까지도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였다. 방에는 침대에서부터 콘솔, 오디오, TV 등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마음에 들어요?”''“네. 너무 예쁜 방이네요. 제가 이런 곳을 써도 될지 모르겠어요.”''“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요. 마음이 편해야 기억도 빨리 돌아오죠.”''민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준우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참 마음이 따뜻한 사람일 거라 확신했다. ''“피곤할 텐데, 이제 그만 쉬어요.”''“저, 잠깐만.”''민주는 막 방을 나가려는 준우를 불러 세웠다.''“사고 당시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듣고 싶어요.”''“사고 당시 상황이요?”''그녀의 말에 준우는 적잖이 당황했다. 이런 순간이 올 거라는 건 미리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한다면, 아버지 강 회장의 정치 생활에 크나큰 타격을 줌과 동시에 자신은 범죄자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사실을 숨긴다면 그녀에게 큰 죄를 지음과 동시에 죄책감으로 괴로울 것이다.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민주씨 오늘 퇴원했어요. 그런 얘기 급한 거 아니잖아요. 천천히 하도록 해요.”''“하지만…….”''“의사 선생님이 무리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어서 쉬어요. 씻고 싶으면 욕실은 저 쪽이니까 편하게 사용하도록 해요.”''준우는 그녀가 쉴 수 있도록 서둘러 방을 나왔다. 그는 급하게 나오느라 욕실을 가운데 두고, 자신의 형인 동혁의 방과 그녀의 방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민주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내 알리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워커홀릭인 동혁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부딪힐 일은 거의 없으리라.''''''민주는 낯선 환경 때문이기도 했지만, 빠른 시일 내에 기억을 되찾아야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 양을 수 천 마리 세어 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결국 잠들기를 포기한 그녀는 벌떡 일어나 방안을 서성거렸다.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제대로 씻지 못했기 때문인지 침대에 들기 전 샤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씻고 싶었다. ''민주는 입고 있던 준우의 헐렁한 티셔츠를 벗어 침대 위에 걸쳐놓고, 속옷 차림으로 욕실로 들어갔다. 조금 전에는 급한 마음에 샤워기 아래서 대충 몸만 씻어냈지만, 이번에는 화려한 디자인의 둥글고 커다란 욕조가 그녀를 유혹했다. ''문득 어디에선가 욕조에 거품을 가득 풀어놓고,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난 민주는 욕조에 한 가득 물을 받았다. 그리고 거품을 낼 만한 뭔가를 찾기 위해 욕실 한 쪽에 있는 장식장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온통 영어로 쓰여진 가지각색의 묽은 액체가 들어있는 용기가 놓여 있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던 그녀는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붉은색을 집어 들어 욕조에 일정량을 부었다. ''제대로 선택한 것이었는지 욕조 안에서 거품이 만들어졌다. 적당히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거품 가득한 욕조 안으로 들어간 민주는 온 몸을 감싸는 부드러운 거품과 따스한 물의 기운으로 나른해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떠올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있을 상황인가. 거품 목욕? 지금 이 까짓게 무슨 소용이지? 내가 누군 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욕조에서 나와 샤워기 아래 섰다. 차가운 물줄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타고 흘러내리자, 피부의 세포 하나 하나가 벌떡 일어나는 것 같았다. ''기억해 내야돼! 작은 것 하나라도 기억해 내야해! 민주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 때 그녀가 사용하는 문의 반대편 문이 열렸다. 그 쪽에 문이 있을 것이라고는, 아니 문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그곳을 통해 누군가가 들어올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 못한 민주는 다급한 마음에 우선 손에 집히는 수건으로 몸을 가렸다.''예상하지 못한 침입자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몸을 갖고 있는 남자였다. 피로에 지쳐 보이긴 했지만, 얼굴 또한 제법 근사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외모는 지금 그녀의 상황에서 전혀 반갑지 않은 것이었다.''“누, 누구세요?”''민주는 놀란 마음에 말까지 더듬었다. 그녀를 보고 멈칫 하던 그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아가씨가 여기서 지내게 될 거라는 얘기는 들었지.”''“누, 누구신지?”''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자기 소개를 할 수도 없거니와 속옷 차림의 남자에게 수건으로 겨우 벗은 몸을 가린 여자가 뭔가를 얘기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얘기를 듣지 못한 모양이군. 하지만 굳이 내 소개를 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처음에 사고 소식 들었을 때는 그저 의심하는 정도였지만, 기억상실증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거의 확신했지. 이렇게 직접 만나고 보니 그 확신이 더더욱 확고해 지는군 그래.”''“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어요.”''민주는 처음 보는 남자에게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냉대를 받게되자 두려워졌다. 그의 잔뜩 굳은 얼굴은 두려움을 증폭시켰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했다.''“죄송하지만, 제 방으로 돌아가야 겠어요.”''민주는 그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고, 방으로 가기 위해 뒤돌아 섰다. 곧장 문으로 달려가면 이 순간만은 모면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미처 한 발짝도 떼어놓기 전에 그에게 손목을 잡혔다.''“이대로 도망갈 게 아니라, 나한테 매달려야지. 그래야 내가 조그마한 성의라도 보일 것 아닌가.”''“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이거 놔주세요! 돌아가겠어요.”''“그래봐야 이 집 안이겠지.”''그가 두려움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코방귀를 꼈다.''“연기도 수준급이군. 목표 대상은 나인가, 아니면 준우? 아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 보겠다는 심산이신가?”''“왜 이러는 거예요? 난…….”''“이 집에 들어온 이상 네가 정해놓은 목적은 달성해야 할 거 아니야. 좀 더 빨리 목적을 달성하려면 이렇게 소극적으로 나와서는 안되지. 좀 더 적극적으로 달려들어야지. 안 그래?”''그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그녀가 필사적으로 잡고 있던 수건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수건이 그의 손에 끌려 바닥에 떨어지자, 그녀의 알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노골적인 시선으로 그녀의 몸을 훑어 내려갔다. 민주는 황급히 수건을 주우려 했지만 그가 그것을 막았다.''“놔 줘요! 난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물론 모른다고 하겠지. 지금 네 설정은 기억상실증에 걸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일 테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한테 그런 방법은 통하지 않아!”''그가 한 손으로 민주의 손목을 잡아 끌어올려 움직이지 못하게 벽으로 밀어붙이고는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난 솔직한 걸 좋아하지.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솔직하게 말한다면 계약을 맺을 수도 있어!”''“이러지 말아요! 놔 달란 말이에요! 그렇지 않음 소리 지르겠어요!”'그녀의 말에 그가 가소롭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네가 소리 지르면 달려올 사람이 누가 있지? 그렇게 되면 너한테도 좋을 게 없을 텐데.”''그의 냉랭한 말투와 날카로운 시선에 민주의 두려움은 극에 달했다. 온 몸이 떨려오고, 사고 이후 혹은 그 이전부터 쌓인 피로로 분명 자신의 몸에 붙어있는 팔, 다리였음에도 자신의 것이 아닌 듯 서 있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그만해요. 그만…….”''그녀는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노려보던 그는 돌아서 목욕가운을 꺼내 입었다. ''“언제까지 네 정체를 숨길 수 있을지 기대하지. 조만간 내가 그 가면을 벗겨줄 테니까!”''그가 민주의 얼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그는 욕실 바닥에 그녀를 남겨둔 채 방으로 돌아갔고, 혼자 남겨진 민주는 두 팔로 몸을 감싸 안으며, 두려움을 떨쳐 내려 애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