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 입장!”'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혁은 굳어가는 표정을 뒤로한 채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귓가에 들려오는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은 그의 귀에 하나의 레퀴엠에 지나지 않았다. 이곳에 발을 디딘 순간 이미 그의 영혼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일순간 서혁의 시야에 객석에 앉아 있는 은서가 들어왔다. 아이보리색의 투피스를 입은 그녀는 남들의 이목을 충분히 끌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아이보리 투피스, 그것은 그가 그녀에게 사준 선물이었다. 그녀는 서혁이 사랑한 유일한 여자였고, 그를 향해 모든 것을 걸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서혁은 밀물처럼 밀려드는 죄책감에 가슴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은서의 입에 드리워진 슬픈 미소에 그는 잠시 표정이 일그러졌다.'‘조금만 참아.’'예식장에 들어서기 전 그녀에게 그가 했던 마지막 말이었다.'조금만 참으면, 은서가 조금만 참아준다면, 그는 다시 그녀에게 돌아갈 것이다. 최 회장에게 신임을 얻고, 호텔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게 되는 순간 서혁은 아내와 이혼할 것이다.'서혁은 굳은 결심이 깃든 얼굴로 깊은 숨을 내쉬었다.'“신부 입장!”'저만치에서 W그룹의 최승 회장의 막내딸이 걸어오고 있었다. 서혁은 고개를 숙인 신부를 바라봤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려 그와 눈을 마주하자 서혁의 미간이 자연스레 좁혀졌다.'스무 살에 난 교통사고 이후 스물둘이 되도록 정신을 놓아버린 여자라고 들었다.'6개월간의 재활치료를 받아 몸은 멀쩡해졌지만 정신은 온전치 못했다. 한순간에 최승 일가의 수치가 되었고, 사람을 붙여 서울 외곽 어느 도시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던 여자. 존재,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짐이 된 여자였다.'“…….”'그러나 그는 지금 그녀에게 먼지만큼의 동정도, 연민도 느껴지지 않았다.'“잘 부탁하네.”'최승의 손에서 건네지는 시연의 손이 그의 손에 맞닿자 서혁은 폭풍우처럼 몰아쳐 들어오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껴야 했다. 그건 자신을 향한 증오심과 분노, 그리고 여자를 향한 연민과 짜증이 범벅이 된 것 같았다.'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그저 암흑처럼 검기만 한 눈동자가 그녀를 더욱더 모자란 여자로 보이게 만들었다.'“…….”'갑자기 여자의 눈에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웃음이 스쳤던 것 같았다. 서혁은 그녀를 다시 쳐다봤으나 여자의 표정에는 그 어떠한 동요도 없이 산만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드레스와, 서혁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앞 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