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그는 석 달을 사귄 여자친구에게 차였다. '사실 시작부터 그다지 조짐이 좋지 않은 날이었다. 전날 밤 2시간밖에 못 잤다고 전신이 기름칠하지 않은 양철인형처럼 삐거덕대는 것부터 그러했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었는데 역시 나이엔 장사가 없는 것일까. 아무튼 하루 종일 묘하게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듯한 기분도 그렇고, 실수를 저지른 김 대리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났던 것도 그렇고, 열렬히 침대를 갈망하고 있는 몸을 이끌고 애인과의 저녁식사 약속을 지키러 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 또한 그러했다. '정말 그날만큼은 약속을 취소하고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어쨌든 그는 마음을 추스르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비록 그 모습이 흡사 치과에 끌려가는 소년 같았을지라도. 물론 그가 직접 예약한, 근사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으로 들어서는 순간 당당하고 늠름한 ‘최선일’로 완벽하게 무장했지만 말이다.'식사는 최악이었다.'한 입 한 입, 평범한 사람이 들으면 ‘억’ 소리 날 가격의 최고급 요리를 씹을 때마다 입 안이 온통 소태였다. 모래를 한 줌 와작와작 씹고 있는 것 같았다. 좋지 않은 컨디션에 느끼한 프랑스 요리는 그야말로 버터를 통째로 씹어 먹은 것 같은 생체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한마디로, 토할 것 같았다는 말.'더구나 수없이 서양식 고급 레스토랑을 드나든 전적에겐 미안하게도, 그는 서양식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온통 버터와 기름으로 범벅이 된 듯한, 밍밍한 것이 이 맛도 아니고 저 맛도 아닌 음식들이라니. 차라리 화끈하게 맵든가 아니면 짜든가, 아예 아무 맛도 나질 않든가. '이렇게 컨디션이 별로인 날엔 그저 뜨거운 국밥 한 그릇이 최고인데……. '1000원짜리 김밥 한 줄이라도 좋았다. 그는 우리네 조상들의 지혜가 만들어낸 ‘한식’이 먹고 싶었다. '뼈 빠지게 일해서 번 돈으로 이 따위 기름 덩어리나 먹고 앉아 있어야 하다니, 대체 민주 자본주의의 정의는 어디로 간 거냐.'그의 맞은편에 조신하게 앉아 있는 여자는 그 순간 마치 교과서에 나올 법한 테이블 매너로 묵묵히 식사하고 있는 연인의 머릿속에서 그러한 생각들이 굵직한 Bold 글자로 지나간 것을 짐작이나 할는지. '하지만 그는 식사 내내 그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와 신사적인 미소를 잊지 않았고, 식사는 언제나처럼 우아하고 배려적인 분위기에서 어떻게든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