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오사카의 겨울은 온통 흰색이었다.'이리저리 둘러보아도 하얀 눈 세상이었다. 거리에 눈이 쌓여있지 않은 날이 드물었다. '[그래서 제가 빈 씨 말씀을 드렸어요.]'이야기는 길고 지루했다. '하루는 벌써 삼십 분이 넘게 우빈을 붙들고 있었다. 그녀는 긴속눈썹이 가지런하고 얼굴이 예쁘장하니 아담하게 생긴 것이 일본여자보다도 더 전형적인 일본여자로 보였다. '여자들을 상대하는 건 그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로는 차라리 총을 들고 싸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를 짓밟아야 한다면 그는 주저 없이 짓밟을 것이고,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그것도 할 것이었다. 그까짓 거, 누군가를 이용해야 한다면 그것조차도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할 것이다. 그것이 막다른 길목에 몰려있는 그들의 일에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지혁은 늘 하루가 중요한 존재라고 강조했었다. '그 말을 와세다 대학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와서 세뇌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하루의 지루한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들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루의 양아버지 아키모도는 도쿄에 은행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키모도가 끔찍하게 아끼는 외동딸이었다. '‘하긴, 지혁에게 돈 많고 힘 있는 일본인이 중요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우빈은 씁쓸한 생각에 피식 웃었다. '그런 지혁의 말도 있고 해서 참고 있었지만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따분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몸을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마사코가 눈에 들어왔다. '기베 마사코는 지나치게 친절하고 오지랖이 넓은 여자였지만 우빈의 까다로운 비위를 맞출 수 있는 유일한 여자였다. 우빈은 지나치게 깔끔한 것을 좋아하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관련된 아름답고 귀한 골동품이나 신발, 가방과 의류 등 명품을 모으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 기베는 우빈과 마찬가지로 안목이 높은 편이었다. 그래서 모델인 그녀는 우빈과 마음이 잘 맞는 친구이며 동업자였다. 그녀는 여전히 어지럽혀진 집안을 치우느라 부산했다. 마사코는 우빈을 위한답시고 파티가 시작되기 두 시간 전에 도착해 끊임없이 출장 요리사들에게 음식들을 주문하고 파티가 끝나갈 무렵엔 네댓 번씩 깔끔한 설거지를 부탁했다. 그녀의 아버지 히사시는 일본의 외무대신이었다. 우빈과 함께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지혁은 히사시의 비서관이었다. 지혁의 소개로 알게 된 마사코는 하루와는 달리 서양여자들처럼 키가 크고 늘씬한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