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미워! 내 친구 원석이는 엄마도 있고 동생도 있어! 난 만날 혼자야! 아빤 만날 늦게 들어오구. 나도 엄마랑 진아 같은 동생이 있으면 정말 좋겠어, 뭐든지 아빠 마음대로야!”'역시, 아이였다. 열 살, 제 나이를 먹는 아이일 뿐이었는데. 조숙한, 어른스런 아들의 모습을 원한 것은 바로 나였어. 내가 입은 상처만 바라보느라 아이가 당연히 느끼고 있을 외로움, 따뜻한 손길, 그 모든 것을 무시한 건 나였어. 아빠 노릇도 제대로 못하는 어른답지 못한 어른. 진성이 크게 질렀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울린다. ‘아빠 미워! 뭐든지 아빠 마음대로야!’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몸을 돌려 밖으로 뛰어 나가는 아들의 모습이 망막에 박혀 버린다. 정신을 차리고 거실을 둘러보니 여름이라는 무더운 계절이 무색하게 실내에는 쓸쓸한 공기가 집안 전체에 가득 차 있는 듯하다. 아! 진성이.'태호는 현관에서 재빨리 신발을 신었다. 문을 열고 재빨리 버튼을 누르고 한시라도 엘리베이터가 빨리 올라오길 기다렸다. 자책감이 밀물처럼 밀려든다.'‘내 아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재빨리 알아 차려야 했어. 화를 낼 것이 아니고 차분히 이유를 묻고 그 마음이 어떠할지 헤아리려 노력했어야 했어. 무작정 본가로 가라고 소리칠 게 아니었다고. 빨리 올라와, 좀 더 빨리!’'잠시 후 아스팔트를 울리는 구두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아이를 찾는 아빠의 외침이 아파트 단지 내에 울려 퍼진다.'“진성아. 진성아, 이진성!”''미진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후 동화책을 읽던 진아를 욕실로 불러들였다. 대야에 미지근한 물을 받아 아이와 함께 쪼그려 앉아 아이 목에 수건을 둘러주고는 그 작은 얼굴을 젖은 손으로 뽀득뽀득 씻겨 주었다. 그 사이 아이는 물에 두 손을 담그고 참방참방 물장난을 쳤다.'“아유, 우리 예쁜 진아. 오늘도 낮에 진성 오빠야가 재미있게 잘 놀아 줬어요?”'“응. 근데 오빠 언제 갔어? 나 잠잤을 때 갔어?”'그렇게 애지중지, 눈높이를 맞춰가며 간도 쓸개도 다 빼다 줄 것처럼 알뜰살뜰 챙겨주는 놀이 동무의 행방을 참 빨리도 물어보는 깍쟁이 진아의 코를 그녀는 살짝 잡아 당겼다.'“음. 진성오빠네 아빠가 오셨었어, 그때 진아는 코 자고 있었거든. 그래서 오빠는 오빠네 아빠 따라서 집에 갔지.”'자신에겐 없는 아빠의 존재가 낯설었는지 아빠라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수긍을 하는 것처럼 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아, 글쿠나.”'“시원해?”'“응.”'아이의 얼굴 구석구석을, 팔과 다리를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예쁜 우리 강아지하며 엉덩이를 토닥거리니 딸아이가 낮은 웃음소리로 웃는다. '“큭큭큭.”'까르르도 아니고 큭큭큭이라니 꼭 영감 같군, 하며 속에 말을 하며 모시요가 깔려있는 작은방으로 아이와 손을 잡고 들어섰다.'“자, 새 나라의 어린이는 8시 전에 잠이 듭니다.”'(……)'수두 때문에 학교를 일주일 동안 쉬었던 진성이, 어제부터 다시 학교에 가기 시작했다. 미진이 아니었다면 신경 쓸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텐데, 덕분에 설계사무소 일에 지장을 주지 않았고 아이도 흉터 없이 고비를 잘 넘겼다.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오전 내 잠깐 시간을 내 그녀의 집을 찾는 길이다. 마침 그녀의 집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미,”'“그래, 진아 엄마. 이사할 곳은 알아 봤어?”'집 안에서 나이 든 여자의 목소리가 치고 들어 왔다. '‘이사?’'“아니요. 이제 알아보기 시작해야죠.”'“어휴. 재개발이 다 뭐야, 쯧. 뭐, 들어 보니 원주민들 물갈이 싹 하는 거라 그러대.”'“어쩔 수 없죠. 돈 없고 빽 없으면, 살기 편한 세상은 아니잖아요.”'“세든 사람한테는 이주비도 별로라는 소리가 있더라구. 에구, 어딜 갈꼬…….”'‘아! 그렇다. 그녀가 살고 있는 동네가 재개발 대상지역이다. 철거를 위한 이주 시기가 가까이 다가온 모양이군.’'“진성이 아빠라는 사람은 어때? 혼자라고 하던데 이 참에 살림을 합치면 어뗘?”'그는 자신을 칭하는 진성 아빠라는 소리에 안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소리에 더욱 집중했다.'“아줌마!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그런 사이 아니면 그런 사이로 만들면 되지 무슨 걱정이여. 다 그렇게 만나는 거야. 홀아비 사정은 과부가 알고, 또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가장 잘 알지. 진아를 생각해야지, 진아 엄마. 몇 년 뒤면 진아 학교도 들어가고. 여튼 아버지가 필요하다니까! 내가 진아 엄마를 몰라? 여기 살면서 남정네 출입하는 거 한 번도 본적 없는데, 그만하면 맘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 거야. 진아도 진성이 잘 따라, 남매 되면 얼매나 우애가 있겠어. 잘 좀 생각해 보라니까, 고집 피우지 말고.”'“아줌마, 이제 그만,”'“사람들이 진아 엄마 조신한 거야 잘 알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아이한테 온갖 정성 들여가면서 한 눈 팔지도 않고 열심히 사는 거 누가 모르겠어.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편하게 살아도 된다고 그러는 거잖아.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애 아버지도 자기애가 진아네 이렇게 뻔질나게 드나드는 거 보면서 뭐 느끼는 것 없겠어? 진아 엄마 누가 봐도 젊고, 예쁘고, 색시 삼고 싶다고 하지. 내가 애 아빠라면, 난 당장 합치자고 말한다. 암, 합치자고 말하지. 동네사람들도 다 그렇게 얘기해.”'(……)'“미진 씨, 곡해하지 마시고 제 얘기 끝까지 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목이 탔다. 그녀를 바라보니 무슨 얘기가 나올지 몰라 긴장하는 눈치다.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옷깃만 스친 만남도 의미를 부여하면 큰 인연일 수 있습니다. 저와 미진 씨의 인연이, 길을 잃었던 진아와 진아를 만난 진성이로부터 시작되기는 했지만……. 전 그 만남에 큰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그리고 미진 씨가 아니었다면 아이와의 관계가 틀어져 돌이키지 못할 뻔 했었는데, 그때 정말 진심으로 걱정하고 진성이를 받아주셔서 제게는 아주 큰 힘이 됐었습니다. 또, 아이들이 수두에 걸렸을 때도 미진 씨가 저희 집까지 와주셔서 간병해 주신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미진 씨는 진성이와 저에게 큰 은인입니다. 사실 이혼하고 나서 아이와 단 둘이 살아오면서 늘 불안정함을 느꼈습니다. 한쪽만의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이번에 겪었던 일들은 일상의 어느 것도 흐트러지지 않았었고, 저희들이 느끼지 못했던 안정감까지……, 그것도 오랜만에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진성이와 진아가 사이가 좋은 것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저 또한 진아가 남의 아이 같지 않고 볼수록 점점 더 정이 들었다고 할까요.”'말을 멈추고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녀의 얼굴빛이 창백해진 것처럼 보였다. 형광등 불빛 때문인가?'“여러 가지 일을 겪게 되면서 안정된 가정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됐고, 물론 미진 씨도 편부모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남편 없이 여자 홀로 살아가는 것이 사회 통념상으로도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고 주제넘을 진 모르겠지만 진아에게도 아빠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저도 이제는 온전한 가정을 갖고 싶다는, 물론 미진 씨와 진아와 함께 말입니다. 뜬금없는 소리로 받아들이지 마시고 아이들만을 위한 결혼을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물론 미진 씨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고, 아니, 호감을 넘어 좋아하는 감정을 느끼는 것만은 진심입니다. 서로 노력하면 좋은 부부관계를 맺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 그리고 본의 아니게 재개발 때문에 곧 이사를 나가야 한다는 얘기도 듣게 됐습니다. 계획은 있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