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악녀 정부로 빙의해버렸다 3권
하필이면 악녀 정부로 빙의해버렸다 3권
하필이면 악녀 정부로 빙의해버렸다
3
벼리아
하필이면 악녀 정부로 빙의해버렸다 3권
차례
13화 - 그곳에 답이 있어요
14화 - 크리스마스 로즈
15화 - 패이고 베여나간
16화 - 북쪽 탑
17화 - 밀라 우드
18화 - 마녀가 나타났다
하필이면 악녀 정부로 빙의해버렸다 3권
13화 - 그곳에 답이 있어요
질끈 감긴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그러나 차오르다 못해 터져 나온 물기는 살갗을 태우며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이 남자를 안고 싶었다.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런 말 말라고, 이건 하나부터 열까지 내 잘못이니 제발 사과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아니, 이 남자의 몸에 손끝 하나 댔다가는 그를 지키기 위해 쌓아 온 수성이 속도 모르고 무너져내릴 터였다.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울음을 삼켰다.
그러고는 애써 한 발 물러난 뒤, 나로 인해 패이고 베여나간 남자를 직시하며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하세요. 저랑 공작님은 끝내는 게 맞으니까요.”
“릴리…!”
“공작님이 싫어요.”
“……!”
“제가 여태까지 사랑한다고 말씀드린 적도 없었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나는 그를 향해 날을 세우면서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정말이었다.
나는 그에게 너를 사랑하노라고 말해준 적이 없었다.
카를로스의 눈치를 보고 정부라는 관계에 얽매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 말 한마디를 마음에 묻고 꺼내지 못했었다.
그러니 마음 하나 가다듬지 못해서 짐이 되고 받기만 한 사람은 그가 아니라 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이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나는 악녀였다.
그것도 천하에 다시 없을 못된 악녀.
그러니 나는 부서져 가는 남자를 노려보며 그의 속을 더욱 깊이 찌르고 베어냈다.
“공작님께 호감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에요. 공작님께서 해주시는 친절들이 나쁘지만은 않았으니까요.”
“…….”
“하지만 그 이상의 감정을 가진 적은 없었어요. 그러니까 더 피곤해지기 전에 공작님의 손을 놓고 싶어요.”
“…알아. 네가 나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거.”
“…예?”
“너의 호감은 나의 사랑과 결이 달랐으니까. 나는 내게 너무도 과분한 사람을 곁에 두고 있었으니까….”
“……!”
“하지만 나는 이겨낼 수 있었어…. 나는 네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
“그만… 제발 그만 하세요…!”
뱉어진 말에 나는 도리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이 남자가.
이 바보 같은 남자가 대체 뭐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니.
그래서 내 곁에 머물며 늘 외사랑을 하고 있었다니.
지금 그따위 한심한 소리나 하려고 나를 붙잡은 건가.
그게 아니라면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면서 생채기를 내고 있었다든지….
나는 결국 애처롭게도 목 놓아 엉엉 울었다.
하여 놀란 킬리언이 다가오자 나는 황급히 물러나며 빽 소리쳤다.
“오지 마세요! 오시면 저 언덕 아래로 떨어져 죽어버릴 거예요!”
“릴리…!”
“놔 주세요! 제가 공작님이 싫어서 손을 놓겠다고 했으니, 약속하신 대로 저를 놔 주세요!”
“하지만…!”
“싫어요! 진짜 지긋지긋하고 치가 떨려요! 당신 같은 괴물이랑은 애초부터 엮이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 뒤로는 무슨 일이 일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나는 없는 정신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며 산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달리던 중에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으나 나는 이를 챙길 겨를도 없었다.
그 모든 것은 자그마한 문을 지나 서궁으로 들어서고, 흩날리는 꽃바람을 가로지르며 침실에 다다랐을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날은 새벽이 지나 동이 텄을 때까지도 별이 뜨지 않았다.
나와 그를 밝혀주던 별은 들이치는 칼바람에 다 부서져 버렸으니까.
답이 없었다.
나는 이제 미명 없는 갈림길을 홀로 걸어야 하는 운명이 되었다.
* * *
나는 그로부터 가히 사흘을 앓아누웠다.
물론 실제적인 질병에 걸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며칠 내내 식사는커녕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했으니, 나는 기력이 쇠하여 정신까지 온전치 못하게 된 것이었다.
카를로스는 그런 나를 걱정하며 서궁에 매일 붙어 있다시피 했다.
또한 그는 황태자궁의 의사를 서궁에 상주하도록 했으며, 수석 요리사를 독촉하여 내 입맛을 돋울 만한 음식을 만들도록 했다.
이는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뒤, 요리사가 삼일 내내 고아 부드럽게 만든 립 접시를 밀어주었다.
“먹어. 다 먹기 전까지는 죽어도 안 나갈 테니까.”
“…….”
나는 하얗게 말라붙은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카를로스는 내 맞은편에 앉아 서류를 점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새로 추가된 마녀 대상자 목록이었으니, 나는 그가 무슨 음식을 들이밀든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물론 카를로스는 내 기분이 이렇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고기를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었다.
그가 가고 나면 전부 게워낼 것이 뻔했으나, 쓸데없이 입씨름하는 것보다는 사서 고생하는 게 훨씬 나았다.
카를로스는 이를 보고 희미하게 웃으며 종이 뭉치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빈 잔에 물을 따라주며 퍽 상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어제보다 잘 먹는군. 이대로라면 내일 열리는 마지막 무도회에도 참석할 수 있겠어.”
“아… 국경일 행사가 거의 다 끝났군요.”
“그래. 그러니 오늘 밤에도 신경 써서 몸을 잘 추스르도록 해.”
“…….”
“행사의 대미를 장식해야지. 나의 유일무이한 파트너로서.”
나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행사가 끝나면 마녀사냥에 박차를 가하겠다.’던 말이 떠올랐기에, 나는 병에 걸린 것처럼 쿵쿵 뛰는 심장을 느끼며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 * *
카를로스가 떠나자마자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먹었던 음식을 다 토해냈다.
이를 본 조앤은 곧장 달려와 식은땀을 흘리며 내 등을 두드려주었다.
“의사를 부를까요? 의사의 방이 바로 근처에 있는데….”
“…아니야. 그러지 마.”
“하지만 뭘 제대로 드시지도 못하고 계시잖아요…. 이래 가지고는 대체 언제쯤 기력을 되찾으실지….”
“신경 쓰지 마. 몇 밤 더 자고 나면 완전히 괜찮아질 테니까.”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찬물로 얼굴을 씻어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속이 비었다고 배가 고픈 걸 보니 몸이 아직 고생을 덜 한 모양이었다.
나는 자조적인 한숨을 삼키며 조앤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민망한 마음에 귓가를 붉히며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거 있잖아. 네가 아는 사람이 만들어서 보내준다는 수프랑 타르트…. 그거 혹시 오늘도 왔어?”
“네, 그럼요! 오늘 새벽에 직접 가져다주셨어요!”
“미안하지만 나 그 수프만이라도 좀 먹을 수 있을까…? 자꾸 토하기만 했더니 속이 좀 쓰려서….”
“물론이죠, 아가씨! 얼른 가서 데워올게요!”
나는 반색하며 달려가는 조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앤은 곧 연두색 쟁반에 수프와 타르트, 그리고 빵 두 조각과 우유를 받쳐 들고 왔다.
나는 볼 위로 희미한 홍조를 띤 채 자리에 앉았다.
따뜻한 햇살에 몸을 녹이며 먹는 수프는 수석 요리사가 만든 립보다도 맛이 좋았다.
“어떠세요? 입에 맞으세요?”
“응. 맛있어.”
“다행이에요…!”
“정말 맛있어….”
나는 옅게 미소지으며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내가 앓아눕고 난 다음 날부터 조앤은 어딘가에서 수프와 타르트를 받아왔다.
이는 맛있으면서도 담백하고 부드러웠기에 속을 달래면서 먹기 딱 좋았다.
어쩐지 예전에 한번 먹어 본 적 있는 음식 같기도 했고….
“…….”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창밖의 햇살을 돌아보았다.
시시각각 되살아나는 그 남자의 환영에 또다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까만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유리창에 쨍 하고 부딪혔다.
“…뭐야?”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발코니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고 저 아래에는 레이먼드가 있었다.
그는 웬 자그마한 상자를 흔들어 보이면서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기력 회복에 좋다는 약을 가져 왔습니다! 혹시 잠깐 뵐 수 있을까요?
하지만 나는 침묵하며 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레이먼드를 두고 다른 사람이 너를 사랑한다며, 많이 불안하다던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으니까.
제아무리 카를로스에게 겁을 먹었다 해도 그에게 확신을 줄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그래, 나는 카를로스를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나 또한 그처럼 내 상황만 우선시하느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살펴주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결국 발코니 문을 닫아버렸다.
그러고는 조앤을 돌아보며 ‘몸이 좋지 않아 내려갈 수 없다.’고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