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동생과 결혼했습니다 3
첫사랑의 동생과 결혼했습니다 3
 
첫사랑의 동생과 결혼했습니다 3
-류다현 장편소설
 
목차
17. 신데렐라의 현실
18. 또다시 시작된 전쟁
19. 우신 가의 교환법칙
20. 인생이 하는 복수
21. 텅 빈 마음
22. 행복할 자격
23. 마음에 뿌려진 독
24. 과거로부터의 초대
첫사랑의 동생과 결혼했습니다 3
 
17.
신데렐라의 현실
 
 
 
잠시 후, 직원이 물을 가져왔다.
물을 마시는 컵이라기보단 감상하는 오브제로 보이는, 섬세하게 세공된 크리스털 유리잔이었다.
물은 시원했다.
섭씨 7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하얀 앞치마를 한 직원이 은빛으로 반짝이는 트롤리를 밀고 지은 앞으로 다가왔다.
트롤리 위 은쟁반에는 열 명이 먹어도 남을 것 같은 한입 크기의 샌드위치, 마카롱, 에클레어, 미니 타르트와 같은 쁘띠 갸또가, 커다란 볼에는 유난히 반짝이는 과일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간단한 간식거리를 준비했습니다. 무엇으로 드릴까요?”
딱히 먹고 싶진 않아서 지은은 살짝 미소 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이 분위기에선 달콤한 케이크도 체할 것 같았다.
‘뭔가 과해.’
대접하는 사람을 진심으로 편하게 해 주겠다는 배려의 마음보다는, 기를 죽여 놓겠다는 의도가 느껴졌다.
이 백화점이라는 곳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느꼈던 시선.
이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안 보는 척하면서 지은을 보고 있었다.
지은을 돕기 위해 서 있는 듯했지만 사실은 관찰하고 평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자신의 모든 행동들이 누구에게 보고될지 알 것 같았다.
사회생활 경험이 있는 지은은 세상은 결코 순수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우신 정도 되는 집안의 안주인인 선욱의 어머니가, 평범하다면 평범한 지은을 며느리로 받아들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알 법할 일이었다.
그런 게 세상인심이기에 섭섭하거나 그렇진 않았다.
현실이라는 건, 로맨스 소설이나 드라마처럼 달콤한 게 아니니까.
‘그렇지만 평생 이런 시선 속에서 살아야 한다면 어떨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위장에서 위산이 분비돼 속이 쓰리고 울렁거렸다.
평가의 대상이 되는 건 긴장되는 일이었고, 자신을 매 순간 평가하려는 사람에게 마음을 터놓을 수는 더 없었다.
‘송선욱 씨, 왜 갑자기 나는 당신이 안돼 보이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불쑥 마음속에서 튀어 올랐다.
부모가 이렇다는 걸,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었을 것이다.
행복한 왕자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마음 터놓을 곳, 편하게 기댈 곳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자신이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따뜻한 사랑을, 안전하게 쉬고 기댈 수 있는 곳을 늘 지은에게 주었다.
또다시 이상한 생각 하나가 마음속에서 불쑥 튀어 올랐다.
김진욱.
한동안 생각도 하지 않았던 선배가 떠올랐다.
웃기는 일이었다. 예비 시어머니를 만나는 자리에서 첫사랑을 떠올리다니.
‘아마 이런 시선 속에서 자랐다면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누구에게도 마음을 터놓지 않고, 누구에게도 진심을 말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그런 슬픈 사람으로 자랄 것 같았다.
‘근데 그게 사랑이었을까?’
진실은 갱신된다.
지은은 그때의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끌림과 사랑을 혼동했다.
선욱과 만나고 나서 사랑이 무엇인지 지은은 선명하게 깨달았다.
사랑은 헷갈리게 하지도 않고, 일부러 힘들게 하지도 않고, 기만하지도 않는다.
선욱은 진실한 사람이었고, 진욱은 그저 겉만 다정한 사람일 뿐이었다.
때론 헤어져서 좋은 인연도 있구나.
지은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마지막 만남을 떠올리자 불쾌한 맛이 입안에서 느껴졌다.
그 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긴커녕 더 불쾌하기만 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지자 뿌옇게 보였던 진심이 선명하게 보였다.
진욱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좋은 사람은 추억을 그런 식으로 더럽히고 망치지 않았다.
우연한 만남에 놀라고 기뻐하며 산뜻하게 근황을 주고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진욱이 쑥스러운 얼굴로 ‘나 곧 결혼해’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아쉬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진심으로 축하해 줬을 것이다.
그렇게 첫사랑을 졸업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때 단호하게 뒤돌아설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선욱 씨와 만난 건 진욱 선배 덕일지도.’
송선욱, 김진욱.
그러고 보니 이름도 비슷했다.
신기한 우연이네, 싶어 지은은 살짝 미소를 짓고 말았다.
또다시 지은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두 사람 외모도 좀 닮은 것 같기도……. 이런 게 소나무 취향이라는 건가?’
지은은 풋, 웃음을 터트렸다.
지은은 뭔가 이질적인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표정 관리를 못 한 직원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당황했는지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은 역시 당황했다.
지은은 자신이 평가의 대상이 된 것도 모자라 흥미와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질투와 악의가 뒤섞인, 네가 뭔데 거기 앉아 있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지은은 현대판 신데렐라처럼 보일 것이다.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한 사람의 벼락출세를 싫어하는 건 사람의 본능이었다.
‘이래서 결혼은 현실이라고 하는 건가?’
달갑지 않은 부록이 너무 많이 딸려 왔다.
복잡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지은은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최 실장이 다가왔다.
“방이 준비되었습니다.”
지은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접실 옆 방문을 열자 더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편집 숍 하나를 통째로 옮겨온 듯, 옷과 보석, 시계와 액세서리, 가방, 구두 등이 보기 좋게 진열 되어 있었다.
튀지 않은 검은색 정장을 입은 직원들이 존재감을 극도로 지우며 서 있었다. 마치 이 방의 일부처럼 보일 정도였다.
“물건 보시기 전에 치수부터 재야 할 것 같은데요. 괜찮으실까요?”
“네.”
지은은 선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 실장은 지은을 작은 방으로 직접 안내했다.
“저기서 옷을 갈아입으시면 됩니다. 저는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최 실장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가리개 뒤로 들어간 지은이 옷을 벗고 미리 준비된 얇은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직원들이 지은의 치수를 상세하게 쟀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꽤 걸렸다.
“생각보다 힘드시죠?”
최 실장이 다 안다는 얼굴로 차가운 물을 건넸다.
지은은 몰랐지만 최 실장이 이렇게 곁에서 시중을 드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지은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가만히 서 있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다.
“여기 있는 것들, 앞으로 보실 것들은 모두 구 여사님이 이지은 님을 위해 구입하신 것들입니다.”
“네?”
살 물건을 진열해 둔 게 아니라, 산 물건을 진열해 둔 것이었다.
“이것 말고도 준비해 둔 게 많으니 걱정 마세요. 급하게 준비하느라,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최 실장은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기가 막히면 머리가 생각을 멈췄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렇지. 저 많은 물건을 다 샀다고? 쓸지 안 쓸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 더 있다고?
드라마나 영화에서 ‘여기 있는 거 다 주세요.’ 하는 장면을 보긴 했지만 그것과 비슷한 일을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겪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은은 정말 순수하게 놀랐다.
“쓸지 안 쓸지도 모르는데 구입한다고요?”
“저희 고객분들 중 최고 등급 분들은 대부분 그렇게 쇼핑하시는 편이에요.”
“왜요?”
지은은 진심으로 그 이유가 궁금했다.
“같은 백, 같은 보석, 같은 옷 입고 한 장소에서 마주치는 거, 끔찍하잖아요. 그래서 아예 컬렉션 전부를 구입하실 때도 많아요.”
최 실장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얼굴로 말했다.
돈이 문제가 아닌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그랬다.
“구 여사님은 마음에 드는 디자이너들에게 주문 제작한 오더메이드만 고집하시니까, 그럴 일이 없지만요.”
가끔 재미 삼아, 그리고 필요에 의해 기성품을 쓰는 일이 있곤 했다.
“이번에는 시간이 촉박해서 어쩔 수 없이 기존에 있는 상품들로 이지은 님을 위한 컬렉션을 꾸몄습니다. 이지은 님의 취향을 완벽하게 반영하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보석류들은 보안상 문제로 한국에 보관된 것들만 가져왔습니다. 이 점도 사죄드립니다.”
최 실장은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으로 사죄했다.
세계관 자체가 다른 사람이구나.
지은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구 여사님이 이번에 정말 신경을 많이 쓰셨어요. 이지은 님을 정말 아끼시나 봐요. 무조건 제일 좋은 것만으로 채워 넣으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어요.”
최 실장은 슬쩍 구 여사를 위한 한 마디를 보탰다.
관계에 기름칠을 잘하는 것이 물건을 잘 파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최 실장의 VIP는 구 여사였고, 그 구 여사의 VIP는 이지은이었다.
이지은이 구 여사에게 호감을 갖게 하는 것이 최 실장이 오늘 해야 할 최고로 중요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