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심장이 없다 4권
왕은 심장이 없다 1권
 
왕은 심장이 없다 4
- 박초하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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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심장이 없다 4권
 
22.
 
 
 
서는 재의 어깨를 잡더니, 이를 악물고 그의 귓가에 자그맣게 말했다.
“내가. …부르면 되겠지만, …때문에 참는다.”
뭘 부른다는 건지, 무엇 때문에 참는다는 건지까진 들리지 않았다. 재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가게 한편에 걸린 삿갓을 내려 서의 품에 안겼다.
“이거도 같이 쓰던가. 잘 어울리겠네.”
“그나저나. 나리들께선 한양에서 오셨어유?”
주인이 제게 물었다. 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물었다.
“그걸 어찌 알았느냐?”
“아 그야, 이 나리께서 때깔이 허-연 게, 귀티가 줄줄 흐르니 그렇지.”
주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제야 서의 얼굴이 누그러들었다. 서는 주인을 위아래로 훑더니 픽 웃었다.
“사람 보는 눈이 제법이구나.”
“아니, 그런데 이놈이? 너는 장유유서도 몰러? 새파랗게 어린놈이, 따박따박 말 꽁지를 다 잘라 먹는 거 보소?”
주인이 씨근거리며 서에게 삿대질했다. 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의 태도가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어쩔 줄 모르고 더듬거리는 얼굴에 재가 다시 배를 잡은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재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더니, 돌아가서 하인 교육을 똑바로 할 터이니, 화를 풀라며 주인을 다독였다. 그제야 주인의 표정이 풀어졌다. 서는 홱 등을 돌렸다. 파들파들 떨리는 그의 어깨만이 서의 심정을 짐작게 할 뿐이었다. 재는 눈꼬리를 훔치며 물었다.
“그나저나, 주인장은 여기서 장사를 얼마나 했는가?”
“저유? 그게…. 내가 이래 봬도 여기서 장사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지유.”
“그럼, 이 고을 안팎의 일도 훤히 잘 알겠구먼.”
“그렇지유. 한데, 그런 건 왜 물으십니까유?”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여기 오는 길에 좋지 않은 일을 봐서 말이네.”
“그게 무슨 말씀이래유?”
“오늘 아침, 산밑에 있는 주막에서 어린아이가 변을 당한 걸 보았다네.”
재의 말에 주인은 그제야 ‘아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의 낯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재는 한숨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내, 너무 마음이 좋지 않아서 말이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아, 어찌 되긴 어찌되유. 흉악한 구미호가 그 어린것의 목숨을 뺏어간 거지유. 에휴.”
“흉악한 구미호?”
“저도 잘 몰러유. 사람들이 하도 구미호가 설친다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지. 직접 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께. 말 지어내는 사람 나름 아니것어유? 나리들도 괜히 돌아다니다가 흉한 꼴 당하지 말고, 볼일 보시고 싸게 올라가셔유. 어디 가서 괜히 입 놀리지 마시고유.”
“입을 놀리지 말라니….”
“아, 그건 그냥…. 아무것도 아니어유.”
주인이 얼버무리듯 손사래를 치더니,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세 사람은 주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선을 교환했다. 왠지 몰라도 주인의 태도가 찜찜했다. 상점을 나오자, 서가 삿갓을 썼다. 재가 놀리듯 물었다.
“왜? 부끄러우냐?”
“그 입 좀 닫아라. 한 대 치기 전에.”
주먹질을 한다는 말에 눈을 부라리니, 서가 제 시선을 피했다. 세 사람은 인근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포목점주인과 태도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라 그런지, 다들 말을 아끼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예 모른다며 손을 내젓는 사람도 많았다. 반나절 가까이 시간을 들였으나, 알아낸 건 별것 없는 정보뿐이었다. 세 사람은 잠시 쉬기로 하고, 저잣거리 한가운데 위치한 주막에 들렀다. 평상에 자리를 잡은 재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래서야….”
“큰일이오. 아무리 좋지 않은 일이라 하나, 이렇게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할 정도로 폐쇄적인 태도라니. 마치 누가 단단히 입단속이라도 하는 것 같지 않소. 덕분에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소.”
“이제 어찌할 테냐?”
서가 재를 보며 던지듯 물었다. 재는 생각에 잠긴 듯 턱을 만지작거렸다. 서가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대답해 보거라. 이제 어찌할 거냐고? 설마, 다른 대책도 없이 예까지 온 건 아니겠지?”
“조용히 좀 해라. 생각하고 있지 않으냐?”
“생각? 더 시간을 들여봐야 헛수고다.”
“그리 잘났으면 네가 묘수를 내놓던가?”
“현아로 가자.”
“현아?”
“그래. 사건이 시작된 게 벌써 석 달이 흘렀으니, 현아에 가면 그동안 사건을 조사한 일지가 있을 거다. 그걸 보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어사이니, 사건조사를 위해 출두했다 하면 어렵지 않을 터.”
“쯧쯧. 생각하는 거 하고는. 장계도 일부러 올리지 않은 걸 보면 현감이 흉수일 가능성이 큰데, 어사라는 걸 밝히면 증거를 다 은폐하지 않겠나?”
“크흠. 그럼, 그거 말고 뭐 뾰족한 수라도 있단 말이냐?”
옥신각신. 티격태격. 또다시 싸우려 드는 두 사람에 선화는 물사발을 탕!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두 사람이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선화는 매서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곤, 봇짐을 챙겨 들고 일어났다.
서가 당황하여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 우리는 싸운 게 아니라!”
“그렇소. 박 봉사. 우리는 싸운 게 아니오. 그저 의견이 잠시 충돌하여 그런 것이지. 아니 그런가, 이 내관?”
재가 서의 옆구리를 퍽 소리 나게 쳤다. 서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화는 한숨을 내쉬곤 두 사람을 돌아봤다.
“누가 뭐라 했소? 어서 짐이나 챙기시오. 현아(縣衙)로 갈 터이니.”
“아니, 아까 내가 어사라고 밝히면 안 된다고….”
“누가 어사라고 밝히랬소?”
“혹, 몰래 현아로 숨어들 생각이냐? 그러려면 밤에 움직이는 게 낫지 않겠느냐?”
“몰래 들어가지 않을 거요.”
“하면?”
“이래 봬도 내가, 충청도의 천문을 관측하러 온 관상감의 박 봉사가 아니오.”
선화가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대답했다. 선화의 말뜻을 알아챈 두 사람의 얼굴이 밝아졌다.
 
 
선화가 한양에서 온 관상감원이라 신분을 밝히자, 중년 사내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손뼉을 짝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일전에 이야기 들었습죠. 천문을 관측하러 오셨다고요. 저는 이방 장태문이라 합니다. 어서 드시지요. 현감 나리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이방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세 사람은 이방의 안내를 받아 현아 안으로 들어섰다. 이방은 현아의 가장 중앙에 있는 커다란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여기가 현감 나리가 정무를 보시는 동헌(東軒)입니다. 잠시 기다리시면 안에다 말씀 여쭙고 오겠습니다.”
선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방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내가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침에 산 아래에서 보았던 그 사내였다. 나이는 약관과 이립의 중간쯤 되었을까. 깔끔하게 차려입은 의복이라든가, 곧게 선 자세가 사내가 바른 마음의 소유자라는 걸 느끼게 했다. 전체적으로 선한 느낌이었지만, 굳센 심지도 엿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는 선화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오는 날을 알려 주었으면 미리 마중을 나갔을 텐데, 어려운 걸음 하시게 만들었네. 내가 이 고을의 현감, 유수원이네.”
“관상감의 봉사, 박명현이오.”
선화의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일제히 이상하게 변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치를 살피자, 이방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하하하. 봉사 나리께서는… 참으로 격이 없으십니다. 한양에서는 요즘 그런가.”
재가 헛기침을 하더니, 선화의 곁으로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현감은 종6품이오. 그대보다 품계가 높으니 말을 높이는 게 맞소.”
선화는 그제야 분위기가 얼어붙은 이유를 깨달았다. 어색하게 웃으며 곧바로 말을 바꿨다.
“하하. 현감 나리. 반갑습니다.”
“크흠. 안으로 드시게.”
선화가 신을 벗고 동헌에 올랐다. 서와 재도 그 뒤를 따르는데 갑자기 이방이 서의 가슴 앞에 손을 들어 올렸다. 서가 멈칫하자, 이방이 짐짓 목소리를 낮추며 엄하게 말했다.
“어허! 어딜 종놈 주제에 높으신 분들이 이야기하는 자리에 끼려 하느냐? 얌전히 밖에서 주인이 나오길 기다리거라.”
빠직. 서의 관자놀이에 시퍼런 혈관이 돋았다. 살기마저 느껴지는 서슬 퍼런 시선에 이방이 주춤했다. 헛기침하던 이방의 시선이 서의 허리춤에 멈췄다.
“종놈 주제에 검은 무슨.”
비웃음이 역력한 시선이었다. 서가 뭐라 입을 열려는데, 재가 빨랐다. 재는 하하 웃더니, 서의 등을 퍽퍽 소리 나게 쳤다.
“그래. 이노옴! 어딜 감히 공무를 이야기하는 자리에 아랫것이 끼려 하느냐? 잠자코 밖에서 기다리거라.”
“하아.”
서의 미간이 꿈틀했다. 하지만 결국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먼 산으로 던졌다. 그게 어찌나 웃기던지.
‘그러게 왜 여기까지 따라와, 사서 고생을 하는지.’
선화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삼켰다. 이방이 재의 차림을 훑으며 물었다.
“한데… 그쪽은 뉘시오? 복장을 보아하니, 양반은 아닌 듯한데.”
재는 거드름을 피우듯 어깨를 쭈욱 펴더니, 태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박 봉사 나리를 지키는 호위무사요. 나는 봉사 나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야겠소. 대감께서 하-도 봉사 나리를 귀하게 여겨, 한시도 떨어지지 말라 내게 신신당부하셔서 말이오.”
‘대감’이라는 단어가 가져오는 여파는 컸다. 어디의 누구 대감인지 언급하지도 않았건만, 이방은 곧바로 표정을 고치더니, 다시 공손한 자세로 돌아왔다. 서가 코웃음 쳤다. 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씨익 웃더니, 변죽 좋은 얼굴로 현감과 선화에게 말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나리들.”
 
 
선화는 열린 문 안으로 보이는 광경에 쩍 입을 벌렸다.
집무실 안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서책과 서류들이 뒤죽박죽으로 쌓여 있었고, 쓰다 구겨버린 종이 뭉치도 아무 데나 떨어져 있었다. 집무실 중앙에 탁자가 있었으나, 앉을 자리마저 책이 차지한 상태였다. 어딘가에 앉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데, 재가 얼른 나서 책을 치워 주었다. 선화는 눈짓으로 고맙다 답했다. 유수원은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많이 복잡하네. 매번 정리하는 데도, 금세 이리 쌓이고 마니…. 박 봉사께서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게.”
“물론입니다.”
선화는 웃으며 대답했다. 현감은 이방에게 차를 주문했다. 차가 준비되는 동안, 선화는 현감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은 예의로 오고 가는 가벼운 대화였으나, 짧은 대화만으로 선화는 현감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젊은 나이에 현감에 올랐을 텐데도, 품행이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구나.’
게다가 엉망진창이라 생각했던 집무실도 단순히 어질러져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단지, 그 모든 것을 담기에 물건들이 지나치게 많을 뿐이었다.
‘업무가 많은가 보구나.’
선화가 집무실 안을 살피며 생각에 잠긴 사이, 이방이 차를 내왔다. 유수원은 선화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그나저나 천문관측이라니. 참으로 멋진 일이네. 나 또한, 어릴 적에는 동산에 올라 별을 많이 보았지.”
“그러셨습니까?”
“그렇다네. 평택의 하늘은 참으로 맑고 깨끗하여, 별이 잘 보이니 말이네. 한날은 길게 궤적을 그리며 떨어지는 별 무더기를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 어린 마음에 내 머리 위로 별이 쏟아지는 줄 알고 혼비백산했었다네.”
“하하하.”
“또 낮에는 해가 나를 따라다니고, 밤에는 달이 나를 따라다닌다 생각하기도 했었네. 구석으로 숨고, 끝으로 도망쳐도, 끝까지 따라와 끈질기기까지 하다며 말이네.”
“해와 달은 누구에게나 공평한데, 오해를 하셨군요.”
“…부끄럽게도 그렇다네. 하하하. 관측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게. 힘을 다해 돕겠네. 아, 객사에서도 별은 잘 보일 걸세.”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한데 다른 지역에는 가뭄의 피해로 백성들이 고생했다 들었는데, 평택은 다행히 피해가 크지 않았나 봅니다. 오면서 보니, 배를 곯는 이들이 보이지 않아서 말입니다.”
어느 마을을 가나, 동냥하는 거지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평택에는 거지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고을이 부유해 보이지도 않았다. 묘한 괴리감에 묻자, 유수원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실은, 고을에 백성들을 돕는 분이 있어서 말이네.”
“그렇습니까?”
“진위의 현령을 지내셨던 구원정 나리의 자제, 구영호라는 분이네. 우리 고을의 향임이지. 그분께서 가뭄에 백성들이 배를 곯지 않도록 선뜻 곳간을 열어 주셨다네. 그분이 아니셨더라면 다른 고을처럼 피해가 막심했을 테지.”
“그런 분이 있다니, 평택의 백성들에겐 큰 복이나 다름없겠습니다.”
유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화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말을 고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데, 현감 나리. 제가 이곳에 오는 길에… 좋지 않은 광경을 보았습니다.”
“좋지 않은 광경이라 함은…. 아, 혹, 마을 입구에 있는 장승을 말씀하시는 건가? 그러지 않아도 장승 하나가 옆으로 쓰러진 걸 알고 있었지만, 하도 일이 많아 미처 고치지 못했다네. 부끄럽구먼.”
“제가 간밤에, 산 아래에 있는 주막에 묵었습니다.”
유수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제야 제가 하려는 말을 알아챘는지 유수원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