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심장이 없다 3권
왕은 심장이 없다 3권
 
왕은 심장이 없다 3
- 박초하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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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심장이 없다 3권
 
15.
 
 
 
“그럼…. 이제 어찌합니까?”
“어찌하기는 어찌해?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신원수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선화는 이강천을 돌아보았다. 이강천은 무거운 탄식을 흘리더니, 선화의 앞에 관측 일지를 툭 던졌다.
“그만하고, 자네는 이거나 가지고 간의대에나 가게. 곧 교대 시간이 아닌가?”
“직장 나리!”
선화가 그를 불렀지만, 이강천은 듣지 못한 것처럼 자리를 떠났다. 다른 이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떠났다. 남은 건 선화뿐이었다.
 
 
“정말 조 직장에게 사형을 내리실 겁니까?”
도승지 허정의 물음에 서가 고개를 들었다. 허정의 얼굴엔 안타까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의 천문을 읽는 능력은 관상감의 어떤 자보다 뛰어납니다. 세종대왕 시절 정인지와 맞먹을 정도라는 말까지 있사옵니다. 또한 성품이 곧고, 청렴하기 이를 데 없는 자이옵니다. 그런 자를 죽이시면, 후대에 길이 안타까움을 남기실 것이옵니다. 이번에는 큰 실수를 했사오나, 그 실수 한 번으로 죽음을 논하는 것은 과한 처사이옵니다.”
서는 말없이 서안으로 시선을 내렸다. 어전 회의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상소가 쏟아졌다. 삼사와 육조는 물론, 곳곳에서 밀려드는 상소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모두 조현조를 죽이라는 내용이었다. 허정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내일 상참에서 훈구파들이 사형을 내리라 극성일 텐데. 어찌 막아내시렵니까?”
사건이 벌어진 지 벌써 사흘째. 더 이상 결정을 미루는 건 무리였다.
서가 대답 없이 관자놀이를 짚자, 허정이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답답한 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허정이 물러난 뒤, 서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제가 그를 죽이고 싶지 않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지금 상황엔 그를 구할 명분이 없었다. 더 큰 문제는 그의 목숨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조현조에게 사형을 내리면, 관상감 정, 황칠과 예판 박정수에게까지 무거운 형벌을 내려야 했다.
‘김조년이 바라는 게 바로 그걸 테지. 몇 있지도 않은 내 수족들을 잘라내는 것.’
서는 이마를 짚었다. 촛불이 일렁이며 서의 얼굴에 깊은 음영을 드리웠다.
“희동아. 몇 시냐?”
“곧, 자시말(子時末, 새벽1시)이옵니다.”
희동의 대답에 서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자시말에 선화의 번이 끝났다. 얼른 일을 처리해 놓고 가려고 했으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된 거다.
‘선화를 만나는 소중한 시간을 날리다니, 이렇게 미련할 때가!’
서는 크게 당황하여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몇 걸음 옮기지 못하고, 멈칫했다. 아직 처리해야 할 서류는 산더미였다. 게다가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였다. 서가 엉거주춤하게 서 있자, 희동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 어디가 불편하시옵니까?”
어쩔 줄 몰라 하던 서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가 갑자기 시선을 맞춰 오자, 희동이 놀라 어깨를 떨었다. 희동이 불안한 얼굴로 더듬더듬 물었다.
“왜, 왜 그렇게 보시옵니까?”
“네가 대신 다녀와야겠다.”
“어딜 말씀이옵니까?”
“간의대에. 박 봉사가 날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네가 대신 가서 오늘은 가지 못한다 말을 전해라.”
“네에? 제가요? 제가 어찌….”
“네가 못 할 일은 또 무어냐? 공연히 사람을 기다리게 만들 순 없지 않으냐?”
“그래도오….”
“혹, 박 봉사가 선화라는 게 불편해서 그러느냐?”
“크흠.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서, 아니 가겠다는 거냐?”
“아니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자, 잠깐!”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던 희동을 서가 급히 불러 세웠다. 희동이 고개를 갸웃했다. 서가 희동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언행을 조심하거라. 내가 임금이라는 걸…. 그녀는 모를 테니.”
희동은 뒤늦게 서의 말을 이해하곤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강녕전을 나서는 희동의 얼굴은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선화는 손끝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진정하려고 해도 진정할 수 없었다. 공연히 간의대 위를 왔다 갔다 하며 부산을 떨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식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사…!”
차마 입에 담기에도 힘든 단어에 선화는 입술을 사려 물었다. 조현조는 제가 관상감에 들어왔을 때부터 저를 도왔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계회의 일 이후엔, 유일하게 호의를 보여 주었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가 부당한 일을 당하는데,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아니, 조현조가 아니라 이강천이 똑같은 일을 당했어도 저는 같이 생각했을 거다. 사람의 목숨은 모두 똑같이 소중하니까.
저 역시, 천문을 읽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수 한 번에 죽음을 내리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진짜 납득할 수 없는 건, 직장 나리가 정치의 희생양이 된다는 거야.’
서로 더 많은 권력을 가지기 위한 싸움에, 소중한 목숨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를 구할 수 있지? 어떻게 해야…. 서에게 말해 볼까?’
선화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말을 보태지 않아도, 그 역시 사형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 제가 괜한 말을 더해서 그를 곤란하게 만들 순 없었다.
그때, 누군가 간의대를 향해 바삐 걸어오고 있었다. 내관 복장에 익숙한 체형. 선화는 그가 희동이라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권 내관 아니야? 서는?’
선화는 급히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어디에도 서는 보이지 않았다. 희동이 헉헉거리며 간의대 위로 올라왔다.
“왜. 헉…. 허억. 쓸데없이…. 간의대는 왜 이렇게. 헉. 허억.”
“권 내관이 아니오?”
희동은 선화를 노려보며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숨이 가라앉자, 버럭 짜증을 부렸다.
“쓸데없이 왜 이렇게 멀리 간의대를 가져다 놔서는! 아이고. 힘들어 죽겠네.”
“그런데 여기까진 어쩐 일이오? 이 형은 오지 않은 거요?”
“크흠. 이 내관은 못 오네. 일이 많이 밀려서. 공연히 자네가…. 아니, 낭자가…. 아니, 자네, 그러니까.”
“평소처럼 부르시오.”
선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희동의 태도를 보아하니, 제가 여인이라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칠석놀이 때 여인의 차림을 한 채 만났으니,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 그럼 그렇게 하겠네. 크흠. 자네가 기다릴까 봐, 이 내관이 나를 보냈다네.”
선화의 얼굴이 어두웠다. 희동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큼. 일부러 피한 것이 아니고, 이 내관은 일이 무척 바빠서 그렇다네. 동이 틀 때까지 처리해야 할 문서가 얼마나 많은지. 자네가 서운해할 일이 아닐세.”
“알고 있소.”
“그럼. 그래야지. 자네도 알다시피 일식 때문에 난리가 나지 않았는가? 그것 때문에 명일 상참에서 결정을 내려야 해서.”
‘결정’이라는 단어에 선화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결정이라니. 대체 무슨 결정을 말하는 건가?
선화는 급하게 희동의 말을 끊었다.
“지금, 결정이라 하시었소?”
“그렇다네. 명일 상참이 열리니, 그때 조 직장에게 어떤 형을 내릴지 결정을 내려야 하네. 그래서 이 내관이 이곳에 오지 못하고 바쁜 거란 말일세.”
“명일이라니….”
선화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형이 결정될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까딱하다간 내일 당장 사형을 내리라 명이 떨어질지도 몰랐다.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뭐라도 해야 해. 뭐라도….”
“응? 뭐라고 그랬는가?”
선화가 중얼거리자, 희동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선화가 대뜸 희동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희동이 펄쩍 뛰었다.
“왜, 왜 이러느냐?”
“권 내관, 나 좀 도와주시오!”
“도와줘? 무얼? 이, 일단 이거 놓고 말하게.”
“옥에 갇혔다는 조 직장 나리를 만나게 해 주시오.”
“에엥?”
희한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희동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선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를 만나야겠소. 이 일을 해결하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알아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그를 꼭 만나야겠소. 권 내관이 나 좀 도와주시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옥에 갇힌 사람을 내가 어찌 만나게 해 줘?”
“맨날 나한테 종8품, 종8품 거리면서 무시하더니, 종4품이면서 그런 것도 못 도와주시오? 권 내관도 별수 없소. 품계가 높으면 뭘 하오? 꼭 필요할 때는 쓸모도 없구먼.”
선화가 입술을 삐죽였다. 희동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토했다. 희동은 선화를 노려보더니, 이를 갈며 말했다.
“여기서 딱 기다리게. 내 금방 갔다 올 테니.”
“응? 어딜 간다는 말이오?”
희동은 씩씩거리며 간의대를 내려갔다. 금방 갔다 온다는 말대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간의대에 나타났다. 뛰어서 다녀왔는지 무척 숨을 헐떡였다.
“자, 가세. 헉헉. 곧 자시니, 근무도 끝났고. 헉헉. 잘됐네.”
“어딜 말이오?”
“조 직장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나? 헉헉.”
“정말이오?”
“그럼, 내가 없는 말을 할까?”
“어떻게 한 거요? 권 내관이라도 그건 어렵다고 하지 않았소.”
“주상전하의 윤허를 받았지. 내가 이래 봬도, 주상전하의 곁을 지키는 수족이란 말일세!”
희동이 가슴을 탕탕 치며 거드름을 피웠다. 선화는 활짝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마침, 다음 근무를 할 관원이 간의대로 왔다. 선화는 그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간의대를 내려왔다.
“빨리 갑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소!”
선화가 희동을 재촉했다. 조현조가 갇혀 있다는 옥에 도착하자, 희동은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에게 어명이 있었음을 말했다. 그는 순순히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저기, 제일 끝이오. 금방 끝내고 나오시오.”
“나도 밖에 나가 있을 테니, 일 보고 나오시게.”
희동은 옥사를 둘러보며 얼굴을 찌푸린 채 말했다. 선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화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한여름일진데, 괜스레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일전에 포도청의 옥사에 갇혔던 적도 있었지만, 언제 봐도 무서운 공간이었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니, 한 사내가 눈을 감고 있었다. 선화는 몸을 낮춰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조 직장 나리.”
“…….”
“저 박 봉사입니다. 직장 나리!”
재차 부르자, 조현조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멍한 얼굴로 눈을 비볐다. 제가 찾아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꿈이 아닌가, 의심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괜찮으십니까? 직장 나리.”
“정녕… 박 봉사가 아닌가? 꿈인가 했네.”
“꿈이 아닙니다.”
“그래. 꿈이 아니네. 허허.”
그가 허허로이 웃었다. 선화는 잠시 그의 행색에 말을 잃었다. 그는 며칠 사이에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잔뜩 구겨진 관복에, 흐트러진 상투 머리까지.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초췌한 얼굴엔 핏기 하나 없었다.
“예까지, 어찌 왔나?”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전 회의에서… 어떤 변명도 하지 않으셨다고요.”
“그래. 그랬지.”
“왜 그러셨습니까? 아니, 어떻게 된 겁니까?”
선화가 답답하단 얼굴로 물었다. 조현조는 피식 웃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