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환
8권
겨울버들잎 장편소설
221화. 혼담(2)
‘한칸주점이 낙생의 소유라던데… 설마 거기 드나들면서 그 계집을 마음에 품은 건 아니겠지?’
평남 왕비는 아들이 사내에게 관심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대뜸 낙생부터 의심했다.
그러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심장이 내려앉으며 충격에 온몸이 떨려왔다. 낙생을 며느리로 삼는 것은 고사하고, 아들과 소문이라도 도는 날엔… 이 같은 상상만으로도 그녀는 몸서리가 쳐지도록 싫었다.
‘낙생이 어떤 아이인데! 제멋대로인 건 둘째 치고 어린 나이에 벌써 남첩을 들인 아이라고!’
하지만 제 아들보다 더 걱정되는 것이 바로 낙생의 태도였다. 만일 그녀가 평남왕부에 시집올 생각으로 정식으로 혼사를 제안하기라도 한다면, 왕부 차원에서 거절할 순 있지만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하려는 것까지 막을 방도는 없었다.
‘그 몹쓸 것이 우리 풍이의 명예까지 더럽히려는 것이야!’
“풍아, 일찍 장가드는 것이 뭐가 어때서 그러느냐? 우리 가문은 과거시험을 볼 필요도 없고, 군에 차출되어 전쟁에 나갈 필요도 없다. 너는 그저 왕부의 일을 배우고 아내를 들여 후계를 잇기만 하면 된단 말이다!”
평남 왕비의 반박에 위풍도 더는 그럴듯한 핑계를 떠올리지 못했다. 실제로 왕가의 후계자로서 그의 가장 막중한 책임은 조상의 제사를 챙기는 것이었다. 그러니 혼담을 거절할 만한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계속된 평남 왕비의 강렬한 시선에도, 위풍은 한 번 더 강경하게 나가기로 했다.
“아직 혼인할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 순서가 정해져 있거늘 대체 무슨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냐? 아니면 혹… 마음에 둔 여인이 있는 것이냐? 만약 그렇다면 누군지 말해 다오. 들어보고 괜찮은 상대면 나도 반대하지 않으마.”
평남 왕비의 큰 양보에 위풍은 깜짝 놀랐다. 그녀의 말인즉슨 그가 마음에 품은 여인이 있다면 허락해 주겠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사람은 여인이 아니었다.
‘아니, 잠깐만… 만일 내가 낙 낭자와 혼인을 하게 되면 부설을 데려올 수도 있지 않을까?’
순간 위풍의 마음이 조금은 흔들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생각이라 이내 재빨리 단념했다. 평남 왕비가 낙생을 마음에 들어 할 일은 그가 다시 태어나도 없을 것이었다.
“…따로 마음에 둔 여인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일 함께 태복사로 가자.”
“모비….”
말꼬리를 늘이자 평남 왕비가 한층 더 냉랭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름지기 사내라면 장가를 들고 여인이라면 시집을 가야 하는 법이다. 마음에 품은 사람도 없고 아직 왕부네 첫째 딸을 본 적도 없다면서 대체 왜 만나보지도 않겠다는 것이냐!”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위풍은 속으로 숨을 들이켜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내일 함께 분향을 드리러 가겠습니다.”
“그래,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하니 인제 그만 들어가 쉬어라.”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고 난 평남 왕비는 미소를 지었다.
방으로 돌아온 위풍은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뒤척거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혼인을 피할 수는 없을 거야. 첫째 왕 낭자는 어머니가 고르신 사람이니 분명 성격도 온순하고 혼인 상대로는 괜찮겠지. 차라리 장가를 들면 어머니의 참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 더군다나 성격이 여린 부인이라면 함부로 나를 간섭하지도 못할 거야. 그때가 되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수 있어.’
여기까지 생각이 든 위풍은 그제야 잠을 청할 수가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평남왕부에서 마차와 말을 준비해 태복사로 갈 준비에 한창일 무렵, 왕소경부 역시 평소답지 않게 부산했다.
둘째 왕 낭자는 첫째 왕 낭자와 함께 왕 노부인이 있는 곳으로 향하며 졸린 눈을 비볐다.
“할머니가 평소보다 일찍 분향을 드리러 가시네.”
덕분에 두 자매도 날이 밝아오기 전 미리 일어나서 씻고 몸치장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평소와 다른 준비를 하며 첫째 왕 낭자는 오늘 있을 일을 상상하느라 잔뜩 긴장했다.
첫째 왕 낭자가 애써 불안을 감춘 채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일찍 다녀오면 좋지.”
이틀 전, 왕 노부인이 따로 불러 오늘 태복사에 평남 왕세자도 올 것이라는 소식을 전한 뒤부터 그녀는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세자비가 되는 것은 분명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위풍과의 만남은 오랜 시간 그녀와 동생을 괴롭혀왔던 계모마저 태도를 달리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너무 잘 알았기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이 혼인이 더욱 망설여졌다. 권세 높은 평남 왕부로 시집을 간다고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답답했다.
그녀는 이미 지난 십팔 년 동안 살얼음판 걷듯 자유롭지 못한 생활을 해왔다. 그랬기에 더는 눈칫밥을 먹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 평남 왕부로 시집을 간다고 한들 마음 편히 지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특히나 혼인 같은 중대사는 왕 노부인이나 계모의 뜻에 따라야 했고, 무엇보다 계모에게 맡길 바에야 차라리 할머니인 왕 노부인의 말을 듣는 편이 나았다.
한편, 첫째 왕 낭자와 서로 의지하며 자라온 둘째 왕 낭자는 단박에 언니의 얼굴빛이 좋지 못한 것을 알아챘다. 언니에 비하면 활발한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천방지축인 것은 아니었다.
둘째 왕 낭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니, 무슨 걱정거리 있어?”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첫째 왕 낭자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자 둘째 왕 낭자가 걸음을 멈추고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첫째 왕 낭자는 하는 수없이 그녀와 약속했다.
“…나중에 마차에 타서 이야기해 줄게.”

그렇게 두 자매는 나란히 왕 노부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두 손녀에게 일찍 오라 당부했던 왕 노부인은 벌써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첫째 손녀를 본 왕 노부인은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왜 내가 말한 머리 장식은 하지 않았느냐?”
“할머니가 주신 건 너무 귀해 쓸 수가 없었어요.”
“좋은 물건은 써야 하는 법이다.”
“오늘은 분향하러 가는 날이니 소박하게 가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평남왕부와 선을 보는 자리인 만큼 첫째 왕 낭자는 지나치게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왕 노부인도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물론 그 의도는 전혀 달랐다.
‘그래, 큰애 말도 일리가 있어. 소박한 모습을 보이면 평남 왕비의 눈에 더 들 수 있을지도 몰라. 평남왕부는…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집안인데 첫째 아이를 마음에 두고 있을 줄이야. 요즘 평남 왕의 상태가 썩 좋지 않다고 하니 시집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애가 안주인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한편 할머니와 언니 사이에 오가는 알 수 없는 대화를 들으며 둘째 왕 낭자는 속으로 더욱더 궁금증을 키워갔다.
그때였다. 마차의 도착을 알리는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고, 왕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미모가 빼어난 부인이 소녀 하나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열네다섯쯤으로 보이는 소녀는 눈매가 반듯하고 피부가 하얘 왕소경부의 두 자매보다 훨씬 더 예뻐 보였다. 게다가 오늘은 특별히 신경을 써서 단장했는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느 하나 정교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셋째는 얼마 전에 감기에 걸렸다고 하지 않았느냐?”
왕 노부인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묻자 왕 부인이 황급히 대답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송구하게도 그동안 어머님께 문안 인사조차 드리지 못했는데, 마침 오늘 상태가 나아져 분향 드리러 가는 길에 따라겠다고 하네요. 부디 이 애의 마음을 헤아려주십시오.”

오늘따라 더욱 용모가 빼어난 셋째 손녀를 보며 왕 노부인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여유 부릴 시간 없으니 얼른 출발하자꾸나.”
‘큰애는 단정하면서도 참하고, 셋째는 미모가 뛰어나니 둘 중 누구라도 왕부의 눈에 차는 애가 있겠지.’
하지만 준비된 마차는 두 대뿐이었다. 한 대는 왕 노부인, 다른 한 대는 두 자매를 위한 마차로 셋째까지 합류하게 되자 상황이 난감해졌다.
그때, 셋째 왕 낭자가 왕 노부인을 향해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할머니, 언니들은 원래 둘이서만 마차를 타기로 되어 있는데 제가 끼어들면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요. 할머니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도 될까요?”
셋째 왕 낭자가 꽃처럼 예쁘게 웃으며 물으니 왕 노부인도 차마 이를 거절하지 못했다. 그렇게 모두가 올라타고, 마부가 채찍을 들어 올리자 마차 두 대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 부인은 문밖에 서서 이 모습을 지켜보다 안절부절못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만일 왕 노부인이 동행을 허락하기만 했다면 그녀도 곧바로 따라나섰을 것이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평남 왕세자를 만나는 이 좋은 기회를 첫째에게만 주시려 하다니!’
첫째 왕 낭자는 늘 그녀 밑에서 숨죽이며 살아왔다. 만일 그런 첫째가 평남왕부 같은 좋은 집안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면 속에서 천불이 날 것 같았다.
‘절대로 그런 일이 생겨선 안 돼! 내 딸이 제대로 분발해야 할 텐데.’
***
한편 태복사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둘째 왕 낭자는 첫째 왕 낭자의 손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언니, 생각할수록 이상해서 그래. 오늘 정말 분향만 하러 가는 거 맞아?”
‘응석받이 셋째가 재미도 없는 분향을, 그것도 자기가 직접 나서서 따라간다고? 평소 같았으면 핑계를 대서라도 안 가려고 했을 텐데, 아직 감기도 다 낫지 않은 몸으로 대체 왜 따라나서려는 거지?’
평소와 다른 셋째와 언니의 태도를 보며 둘째 왕 낭자는 불안했다. 이에 첫째 왕 낭자가 그녀를 안심시키듯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분향하러 가는 거지, 그게 아니면 뭐 하러 가겠어?”
“언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계속해서 추궁하듯 떠보는 동생의 말에, 결국 첫째 왕 낭자도 한숨을 내쉬며 털어놓았다.
“…사실 분향도 분향이지만, 맞선을 보러 가는 길이기도 해.”
“맞선? 무슨 맞선!”
둘째 왕 낭자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고, 첫째 왕 낭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분향을 구실로 실은 평남 왕세자와 맞선을 보기로 했어.”
둘째 왕 낭자는 충격에 말까지 더듬었다.
“평, 평남 왕세자?”
이어 고개를 끄덕이는 언니를 보며 그녀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어?”
“맞아. 생각지도 못한 좋은 기회인데, 이상하게 난 받아들일 엄두가 나질 않네….”
어렵게 털어놓은 그녀의 진심에 마차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겨우 정신을 차린 둘째 왕 낭자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언니는 원하지 않는 거야?”
“…할머니께서 원하셔.”
이제껏 살아오면서 그녀의 의사가 중요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둘째 왕 낭자가 이내 반짝이는 눈으로 언니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말했다.
“언니, 언니 말고도 할머니의 소원을 이루어줄 사람이 또 있잖아?”
222화. 계획된 선 자리
오늘 외출의 진짜 목적을 알게 된 둘째 왕 낭자는 그제야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왕 부인이 친딸인 셋째를 이 자리에 딸려 보낸 것도, 그녀를 평남 왕부의 눈에 들게 하기 위함이었다.
“언니와 달리 셋째는 원하고 있으니… 모두에게 잘된 일 아니야?”
둘째 왕 낭자의 말에 첫째 왕 낭자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한들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닌걸.”
그녀들의 운명은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 언니는 가만히 있고 셋째가 평남 왕세자의 눈에 띄도록 하는 건 어때?”
“만약 평남 왕비께서 성품 좋은 며느리를 원하시는 거라면?”
둘째의 물음에 첫째가 되물었다.
애초에 그쪽에서 여인의 용모와 가문을 중시했다면 오늘 같은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셋째 왕 낭자가 아무리 외적으로 돋보이더라도 평남 왕비의 눈에 들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고 봐야 했다.
결국, 차기 왕세자비를 선택하는 것은 평남 왕비의 몫이었다.
“정 안 되면 언니가 스스로 눈 밖에 날 일을 저지르면 되잖아!”
철없는 둘째 왕 낭자의 발언에, 첫째 왕 낭자는 황당해하다 이내 동생의 이마를 가볍게 툭 쳤다.
“동생아, 아무리 그래도 어찌 여인이 그런 방법을 선택할 수 있겠어.”
스스로 흠집을 내는 것과 숨어서 드러내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있으면 말주변 없다는 소리는 들을 순 있어도 나중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스스로 체면을 깎는 짓을 해버리면 평판 자체가 훼손되어 치명적일 수가 있었다.
지금 같은 처지에 소문까지 나빠진다면 계모인 왕 부인의 뜻대로 인생이 진흙탕에 빠져 버릴 것이 분명했다.
“가만히 있다고 안전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체면을 깎아 먹을 수도 없으니 어찌 하는 게 좋을까?”
둘째가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으나 첫째 왕 낭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내 마차 안에는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 들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둘째 왕 낭자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입을 열었다.
“언니, 나는 가끔 낙 낭자가 부러워…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을 수 있잖아? 게다가 하고 싶은 대로 주점도 차리고 남첩까지 들여도 대놓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걸.”
만일 든든한 버팀목만 있었더라면 이들 자매도 충분히 그녀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낙생의 자유분방한 모습은 두 자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동생보다 조금 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던 첫째 왕 낭자는, 그런 말을 꺼내는 것조차 버거워 애써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지난 이틀 동안 할머니께서 은화를 많이 주셨어. 내일 함께 주점에 가서 맛있는 걸 먹고 오자.”
“응.”
언니의 막중한 책임을 전부 헤아리지는 못한 둘째 왕 낭자는 다시금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마차가 태복사 앞에 도착했다.
깊은 역사와 분향하는 곳으로 유명한 이곳 태복사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 두 자매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고, 왕 노부인 또한 셋째 왕 낭자의 부축을 받으며 조용히 발걸음을 뗐다.
이윽고 마중 나온 스님을 따라 그들은 일찍이 약속된 장소인 방생 연못에 도착했다. 근처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연못 속에 물고기 떼가 헤엄치고 있었다. 왕 노부인은 세 손녀와 함께 미리 가져온 잉어 한 쌍을 방생해 주었다.
그때였다. 뒤편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왕 노부인 맞으시지요?”
그 소리에 줄곧 왕 노부인의 곁에 붙어 있던 셋째 왕 낭자가 즉시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감히 똑바로 바라보지는 못하고 슬쩍 곁눈질로만 훔쳐보았다.
집안의 우환 때문인지 평남 왕비는 수척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에 밴 온화하고 고귀한 기개까지 숨겨지지는 않았다. 그간 먼발치에서 본 적은 있어도 이토록 가까이에서의 만남은 처음이라, 셋째 왕 낭자는 속으로 감탄을 터트렸다.
평남 왕비의 뒤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시녀들과 함께 청색 옷을 입은 위풍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 자태가 어찌나 고고한지, 모두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순간 그를 발견한 셋째 왕 낭자도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청색 옷을 입은 사내가 평남 왕세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