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환
6권
겨울버들잎 장편소설
154화. 산채탕(2)
낙생을 둘러싼 이들이 시끌벅적하게 식사하자,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사람들도 그들이 먹는 음식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체 무얼 저리 맛있게 먹고 있는 것 같소?”
물론 그들이 있는 곳까지 음식 냄새가 전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입안 가득 물고 있는 찐빵이 술술 넘어가지도 않았다.
“방금 저쪽을 지나오는 길인데, 생선을 넣은 산채탕에 국수를 말아 먹는 것 같았소.”
“나도 본 것 같네. 산채탕이라… 솥에다가 생선을 넣고 파와 홍고추까지 함께 곁들여 끓이면… 냄새는 말할 것도 없이 좋겠군.”
“듣자 하니 한칸주점의 주방장을 데려왔다 하지 않았소?”
“아마 그럴 거요. 주점은 휴업했다고 하던데, 그곳 주인인 낙가의 셋째 여식이 이곳에 주방장을 데려왔다더군.”
“쯧쯧, 그 집 딸은 정말로 제멋대로구먼?”
“좀 제멋대로이면 어떤가? 여기서 제대로 된 음식을 얻어먹는 건 그 딸을 둔 낙 대도독인데.”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처음으로 낙생 같은 딸을 둔 낙 대도독에게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편 자극적인 산채탕 냄새가 퍼져나갈수록, 사람들은 본인이 챙겨온 음식이 맛없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위한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낙생이 가을 사냥에 주방장을 데려왔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이에 결국 참지 못하고 석일을 데리고 낙생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시각, 허겁지겁 산채탕을 먹고 있던 홍두는 위한 일행을 발견하고 낙생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아가씨, 분명 석삼화에게 집에 남아 백아를 돌보라고 하지 않았어요? 한데 어떻게 여기 있을 수가 있죠?”
‘석삼화 저놈, 여태까지 아주 꽁꽁 잘 숨어 있었잖아?’
흥분한 홍두와는 달리, 낙생은 다가오는 그들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저 사내는 석염이 아니니까.”
“그럼 누구예요?”
“석염의 동생 석일이다.”
“동생이요?”
석염과 똑같이 생긴 석일을 보며, 홍두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에 위한이 눈치채고 홍두가 석일을 제대로 볼 수 있게 약간 옆으로 비켜 주었다. 그리고는 곧장 낙생에게로 다가왔다.
“왕야, 무슨 일이세요?”
“낙 낭자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소. 혹시 음식을 팔 생각이 있소?”
위한의 말에 여러 사람이 동시에 귀를 쫑긋 세웠다.
‘맞아. 음식점 주방장이 왔으면 우리가 사 먹어도 되는 거잖아? 좀 비싸면 어때. 맛있는 걸 먹는 게 중요하지.’
그러자 낙 대도독이 국물을 홀짝이며 딸에게 눈치를 주었다.
‘생아, 팔기는 무슨! 우리 식구 먹기도 부족하구먼.’
낙생이 그런 낙 대도독의 마음을 읽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
“아니요. 주점 밖에서는 장사하지 않으려고요.”
그러자 곧 위한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가득해졌다. 이를 본 낙생이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왕야만 괜찮으시다면… 국수 한 그릇 하시겠어요?”
“나야 그래 준다면 아주 고맙겠소.”
“수고, 왕야와 호위에게 국수 한 그릇씩 해드리거라.”
낙생의 말에 수월이 산채탕에 면을 말아 긴 나무젓가락으로 휘휘 젓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얼마 안 가 다 삶아진 국수를 건져 준비한 그릇에 넣더니 가늘게 썬 파도 한 움큼 집어넣었다. 그러자 곧 시큼하고 칼칼한 산채탕 국수 두 그릇이 완성되었다.
눈치 빠른 석일은 곧장 앞으로 다가가 젓가락과 함께 국수 그릇을 받아 위한에게 전달했다. 이에 위한이 빠른 속도로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수월이 이어 한 그릇을 더 건넸다. 석일의 몫이었다.
하지만 석일은 자신을 쳐다보는 위한의 싸늘한 눈빛에 서둘러 그에게 자신의 국수마저 넘겨주었다.
흡족해진 위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돌아가면 석일과 석염, 이 둘이 하는 일을 바꾸어도 괜찮겠군.’
이렇듯 제 주인은 벌써 두 그릇째 국수를 해치우고 있는데, 가만히 서서 이를 지켜보기만 하는 석일의 모습은 주변에서 보기에도 참으로 불쌍해 보였다.
그 상황을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던 홍두 역시 눈앞의 사내가 석염이 아님을 그제야 확신했다.
‘석삼화였으면 분명 징징거리고도 남았을 거야. 한데 저리 조용한 걸 보니 정말로 석삼화가 아닌가 보네.’
이윽고 수월이 석일을 위해 한 그릇을 더 만들자, 홍두가 재빨리 이를 석일 앞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를 들고 웃으며 물었다.
“네가 석사화 맞지?”
“예, 그렇습니다.”
“자, 가져가.”
하지만 석일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홍두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어휴, 석삼화 동생은 착해 빠져서 우리 주점에서 일하기는 글렀네.’
한편, 근처에서 음식 냄새를 맡고 있던 누군가가 조용히 낙 대도독을 불렀다.
“낙 대도독…!”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낙 대도독은 이를 무시하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예 무리째로 다가와 그를 에워쌌다.
“흠흠, 대도독, 그 국수가 그렇게나 맛있는가? 내 기억하기로 저번에 그대가 한턱내기로 했던 것 같은데….”
그들의 말에 낙 대도독은 입을 삐죽거렸다.
‘이동 중에 이 많은 입을 책임질 양이 어디서 나온다고, 이 사람들 아주 낯짝이 두껍구먼?’
“다들 비켜주시게나!”
낙 대도독이 그 말만 남긴 채 쏜살같이 도망가버리자, 남겨진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망연자실해 했다.
‘역시 금린위의 수장답구먼. 저리 피도 눈물도 없다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낙생을 찾아가 부탁할 만큼 그들은 뻔뻔하지도 못했다.
‘한데 왕야께서는 대체 어떻게 저곳에 계신 거지? 낙 낭자에게 허리띠를 뜯겨 놓고도 음식을 얻어먹다니, 역시 사람 일이란 알다가도 모르겠군.’
먹지도 못하고 냄새만 맡아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결국 허기를 참지 못하고 찐빵을 든 채 자리를 떴다. 그러자 솥을 둘러싸고 있던 무리도 어느새 뿔뿔이 사라졌다.
한편, 국수를 두 그릇이나 해치우고 난 위한은 아쉬운 대로 허기를 면했다. 물론 충분히 먹었다고 느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덕스러운 낙생에게 조금 더 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그도 사냥터에 도착할 때까지는 식사를 부탁하지 않고 참아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낙생에게 자두도 받은 마당에, 국수 한 그릇 얻어먹는 것쯤이야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아 용기를 내 본 것이었다.
“배부르게 드셨나요? 아니면 한 그릇 더 드시겠어요?”
낙생의 차분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위한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좋소.”
마찬가지로 끝끝내 국수를 맛볼 수 있었던 석일 역시, 빈 그릇을 들고서 수월이 다시 그릇을 채워주기를 은근히 기다렸다.
솔직히 이전까지 그는 석염이 위한과 낙생 사이를 두고 호들갑을 떨 때면 뚱한 입장이었다.
‘석염 형님은 주인님이 낙 낭자와 이어지지 않을까 봐, 걱정하나 본데 나는 반대야. 이렇게 훌륭한 우리 주인님이 다른 명문가 규수도 아니고, 왜 하필 낙 낭자를 부인으로 맞이해야 해?’
하지만 그도 산채탕을 맛보고서는 이내 자신의 형제와 뜻을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사람들을 어렵게 따돌리고 다시 막사로 돌아온 낙 대도독은 위한이 들고 있는 그릇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내 셈이 맞는다면, 개양 왕은 벌써 국수를 세 그릇째 먹고 있는 거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식충이처럼 세 그릇씩이나 얻어먹을 수가 있어?’
그 즉시 위한에게로 가 따지려던 낙 대도독은 이내 다시 걸음을 멈췄다.
‘잠깐, 생이가 저렇게까지 개양 왕을 먹이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좋아, 우리 딸이 시집을 가겠다는데, 아비인 내가 이를 망쳐서는 안 되지!‘
이에 낙 대도독은 말없이 나무 아래로 걸어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국수를 세 그릇씩이나 먹고 나자 위한은 만족스러운 마음에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이에 차가웠던 눈매 또한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음식을 대접해줘서 정말로 고맙소.”
“별말씀을요.”
낙생은 친절하게 대답했지만, 사실 그녀도 국수를 아무 생각 없이 준 것은 아니었다.
가을 사냥에 참여한 이들 중에는 주점을 방문했던 손님도 꽤 있었다. 먹고 싶다는 사람이 많은데, 이를 이용하지 않고 모두 거절하는 것은 어리석은 낭비였다.
그녀는 그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조화를 꼭 좀 만나볼 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종적으로 위강을 끌어들여야만 했다.
하여 그녀가 공략하기로 한 첫 번째 사람이 바로 위한이었다. 낙생은 위한을 시작으로 위강을 넘어 조화에게까지 닿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위한은 자신이 낙생이 설계한 계획의 일부인지도 모르고, 그저 자신만이 국수를 얻어먹었다며 내심 우쭐해 하고 있었다.
“아, 그리고 아까 전 자두도 고마웠소.”
순간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열 오른 뺨을 시원하게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어진 낙생의 싸늘한 반응은, 그를 다시 민망하게 만들었다.
“아, 그건 저 말고 홍두에게 고마워하셔야 합니다.”
위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완성했다.
“자두는 홍두가 던진 거라서요.”
***
화려한 막사의 바닥에는 두툼하고 부드러운 융단이 깔려 있었고, 붉은색 나무 탁자 위에 진수성찬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황제 영안제가 그중 몇 젓가락을 먹고 일어나더니 소 귀비에게 말했다.
“천천히 먹고 있으시오. 짐은 밖을 둘러보고 오겠소.”
이윽고 그가 금색 장막을 열고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를 포함한 모두가 쉬는 시간이었기에, 사람들은 황제가 나와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함께 온 귀족이나 수행을 맡은 대신들도 따로 앉아서 한창 식사 중이었다.
여인들은 마차에 남아 식사를 하거나 답답한 경우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쐬기도 했는데, 이는 대주국의 문화가 비교적 자유로워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영안제와 가까운 막사에 있던 위강이 그를 부르며 다가왔다.
“부황.”
“식사는 했느냐?”
영안제의 물음에 위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방금 다 먹었습니다.”
“한데 네 숙부는 어째서 보이지 않는 것이냐?”
영안제가 위한에 관해 물었고, 위강이 낙생의 막사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까 저쪽으로 가시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한번 다녀와 보겠습니다.”
이에 영안제는 위강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을 바라보았으나,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 있어 그 속에서 위한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별생각 없이 물었던지라, 그는 곧 다른 주제로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낙치도 보이질 않는구나.”
낙치는 낙 대도독의 이름이었다. 그는 금린위의 수장이자 신하들 가운데서도 가장 최측근으로서, 황제의 이번 가을 사냥에도 동행했다.
영안제의 물음에 위강이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아직 음식이 나오질 않아서 숙부님이 계신 쪽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위한과 낙 대도독이 같은 곳에 있을 거라는 위강의 대답에 영안제는 의아해졌다.
“애초에 개양 왕이 왜 저길 간 것이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위강은 잠시 망설이며 말을 이었다.
“…아마 낙 낭자를 찾으러 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155화. 자두와 고명
“낙 낭자?”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던 영안제가 위강에게 되물었다.
“혹 낙치의 여식을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이에 영안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생각에 잠겼다. 그의 기억 속에 낙생은 여전히 위한을 희롱했던 천덕꾸러기 여인으로만 남아 있었다.
“혹시 네 숙부와 낙 낭자 사이에 또 무슨 문제가 생겨 낙치가 이를 해결하러 간 것이냐?”
“숙부님과 낙 대도독 모두 낙 낭자에게 갔을지는 그저 저의 추측일 뿐입니다.”
위강의 대답에 영안제가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하면 왜 그런 추측을 한 것이냐?”
“그건… 식사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안제가 더욱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위강이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이번 가을 사냥에, 낙 낭자가 요리 실력이 특출 난 요리사를 데려왔다고 합니다.”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영안제는 곧 그 뜻을 이해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낙치의 여식은 참으로 남다르구나.”
이어 그는 한마디를 더 얹으려다 이내 황제인 자신이 함부로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하려던 말을 삼켰다. 이를 눈치챈 위강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영안제의 곁을 지켰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쉬는 것이 곧 일정이었기에, 황제는 더는 묻지 않고 다시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