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야, 그만하세요
8권
옥루인취 장편소설
제225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놀란 중양진인의 하얀 눈썹이 잔뜩 찌푸려졌다. 지금까지 수많은 의원에게 눈을 보였지만 그중 단 한 명도 중독되었다는 소견을 내놓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 하기엔 눈이 보이지 않은 것만 제외하면 다른 데는 멀쩡했다.
“네, 중독되셨어요. 만성 독약이라 진인께선 천천히 죽어갈 거예요.”
고천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중양진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자신이 중독되었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북대왕이 데려온 이 신의는 그가 중독되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중양진인은 북막 황제의 신임과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인데 누가 감히 그에게 독을 탔단 말인가! 북대왕이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진인의 독을 해독할 수 있겠느냐?”
고천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해독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약을 만들기가 아주 까다로워요. 봄에 피는 흰 모란 꽃술 스무 냥, 여름에 피는 흰 연꽃 꽃술 스무 냥, 가을에 피는 흰 부용 꽃술 스무 냥, 겨울에 피는 흰 매화 꽃술 스무 냥이 필요해요, 그 외에도 반드시 같은 해 내린 우수(雨水) 절기의 비, 백로(白露) 절기의 이슬, 상강(霜降) 절기의 서리, 소설(小雪) 절기의 눈이 각각 이십 전(錢)씩 있어야 해독약을 만들 수 있어요.”
고천주의 말에 중양진인은 크게 놀란 눈치였다.
“그렇게나 만들기 까다롭소?”
고천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많이 까다로워요. 만들기 쉬웠다면 진인께서도 세상천지를 다 돌아다녔는데 약을 찾지 못하셨을 리 없겠죠.”
북대왕이 조금 의심스러운 듯 서늘한 눈빛으로 고천주를 쳐다보았다.
“해독약을 만들기 까다로운 게 확실하냐?”
북대왕은 허튼수작이라도 부린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고천주는 전혀 겁먹지 않고 여전히 아주 건방진 태도로 대답했다.
“믿지 못하겠으면 저 말고 다른 의원을 찾으세요.”
사실 그 정도로 까다로운 건 아니었다. 북대왕의 요즘 행동을 보면 예사롭지 않았다. 처음엔 남대왕을 쓰러뜨리더니 지금은 또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직접 그녀를 데리고 숲속에 와서 중양진인의 병을 고쳐주려고 했다. 보아하니 그는 북막 황제의 환심을 사서 십만 대군을 얻으려는 모양이었다.
북막 황제가 그에게 정말 십만 대군을 내어준다면 그는 필시 대연을 향해 반격할 것이다. 이런 북대왕의 계획이 예상됐기 때문에 고천주는 절대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가며 그의 말에 순종하는 척하다가 기회를 엿봐 도망칠 생각이었다.
북대왕은 건방진 고천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을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의술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기에 그녀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게다가 중양진인이 온 천하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의원에게 병을 보였지만 단 한 명도 그의 병증을 정확하게 집어내지 못했다. 때문에 고천주가 의심된다고 해서 짧은 시간 내에 그녀보다 더 뛰어난 의원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북대왕 본인 역시 고천주의 뛰어난 의술 실력에 탄복하여 그녀를 데리고 이곳으로 왔으니 말이다.
고천주는 제 뛰어난 실력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고고하게 구는 그녀를 보고 얄미운 마음이 들었지만 북대왕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고천주의 까다로움을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그녀의 목을 치든가.
북대왕은 결국 전자를 선택했다. 그녀의 체내에 미행 고충이 있으니 그녀는 절대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마음의 결정을 한 북대왕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네가 말한 약재를 구해보마. 하지만 행여 허튼수작이라도 부렸다간 넌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북대왕이 드디어 미끼를 물었다는 생각에 고천주가 웃으며 말했다.
“제 목숨이 대왕의 손에 있는데 제가 어떻게 감히 수작을 부리겠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고.”
북대왕은 고천주에게 서슬 퍼런 경고를 날리고 중양진인을 향해 다시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신의에게 해독할 방법이 있다고 하니 진인께서도 저와 함께 하산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약재가 다 모아지면 신의가 최대한 빨리 진인의 독을 해독해 드릴 겁니다.”
중양진인이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비록 약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재료에 특별히 귀한 약재는 없으나 모두 운이 따라야 얻을 수 있는 까다로운 것이라 구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북대왕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을 후하게 내리면 반드시 용사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현상금을 크게 걸면 약재는 금방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하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중양진인은 의심을 거두고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그의 태도는 처음과 사뭇 달랐다. 남에게 신세를 지면 꼬리가 저절로 내려지는 법이었다. 북대왕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제게 예의를 차리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진인께서 폐하 앞에서 제 미담 몇 마디 해주시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중양진인이 북대왕의 뜻을 알았다는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맙습니다! 하하하….”
북대왕이 호탕하게 웃고는 하인더러 가마를 들어오라고 분부했다. 중양진인을 가마에 앉혀 하산시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가 앞을 못 보는 탓에 걸음걸이가 늦어 북대왕은 속이 답답해 화딱지가 났다. 일행은 그렇게 막성의 대저택으로 돌아갔다.
***
군묵침과 경운은 고천주를 찾기 위해 대저택에서 이틀 동안 하인 행세를 하며 저택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다. 북대왕이 고천주를 데리고 출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은 침착하게 저택에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틀 뒤, 아니나 다를까, 북대왕이 고천주를 데리고 돌아왔다. 군묵침은 하인의 복색을 하고 구석에 서 있었다. 그는 멀리서 고천주를 힐끔 쳐다보았다. 어디 다친 곳 없이 무사한 것을 보고서야 그는 내내 졸였던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는 모두가 잠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고천주를 데리고 나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긴 기다림 끝에 밤이 되었는데도 고천주는 북대왕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보아하니 북대왕이 고천주를 단단히 감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이미 먼 길을 온 군묵침은 여기까지 와서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북대왕의 방 밖에 불을 질렀다. 불길이 치솟으며 빠른 속도로 사방으로 퍼지자 그는 불이 났다고 외쳤다. 그러자 하인들이 여기저기서 허둥지둥 달려 나와 불을 꺼야 한다고 마구 소리쳤다. 군묵침의 계획대로 고요했던 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북대왕도 고천주를 데리고 밖으로 달려 나왔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자 북대왕은 너무 화가 나 낯빛이 퍼레졌다. 그는 곧바로 하인들에게 불을 끄라고 지시했다.
그때 혼란한 틈을 타 군묵침이 고천주를 와락 끌어당겼다. 고천주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려는데 군묵침이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군묵침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
“나요.”
익숙한 목소리에 놀란 고천주는 서둘러 군묵침을 데리고 가까운 물독 밑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군묵침은 숨고 싶지 않았다. 그가 고천주의 팔을 잡고 말했다.
“따라오시오. 가야 하오.”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에 고천주가 다시 군묵침을 잡아 그를 물독과 제 몸 사이에 가두었다. 그러고는 작게 말했다.
“북대왕이 제게 미행 고충을 먹여서 전 그에게서 십 보 이상 멀어질 수 없어요. 그 이상 멀어지면 북대왕이 눈치를 채거든요. 지금 도망가면 전 금방 북대왕에게 잡힐 거예요.“
막성은 경비가 삼엄해 북대왕이 고천주가 도망쳤다는 것을 눈치채기만 하면 막성의 전 병력을 동원해 그녀를 잡으려 할 것이다. 때문에 지금 도망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고천주는 다시 잡혀 와도 상관없었다. 북대왕은 남대왕을 조종하고 중양진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도 아직 쓸모가 있는 그녀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군묵침이 잡힌다면 북대왕은 좋다고 어깨춤을 추며 당장 그를 죽일 것이다. 주사(主帥)를 잃은 대연군을 공격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테니까.
고천주의 말에 군묵침의 표정이 순간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도 마침 북대왕이 고천주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고천주가 도망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단 말인가? 한데 알고 보니 이런 더러운 수작을 부렸을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북대왕이 서남 깊은 산속에 사는 묘족 여인을 첩으로 두었다고 한다. 묘족은 고충을 기르는데 능하다고 하니 북대왕이 특이한 고충을 이용하는 것도 납득이 갔다. 고천주는 계속해서 그의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
“북대왕이 저더러 남대왕을 조종하고 중양진인의 병을 치료하라고 했어요. 북막 황제에게서 십만 대군을 얻어 대연에 다시 반격할 생각인 것 같아요. 왕야께서 이미 이곳에 잠복하셨으니 며칠 더 있으시는 게 어때요? 북대왕의 계획을 망치고 나서 떠나도 늦지 않아요.”
대연은 이미 십이성을 수복하고 북막군을 변방 밖으로 쫓아냈기 때문에 이제 더는 전쟁을 치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대연은 국고가 텅텅 비어서 북막과의 전쟁이 길어지면 불리했다.
이 기회에 평화 협정을 맺어 서둘러 북쪽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재정비하는 게 급선무였다. 군묵침도 절대 북대왕이 십만 대군을 얻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대연은 필시 전쟁에서 패할 것이다. 게다가 이미 한계가 찾아온 대연은 긴 전쟁을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북쪽 십이성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휴식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왕 잠복했으니 이번 기회를 통해 반드시 북대왕의 야심과 계획을 무너뜨려야 했다. 군묵침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일단 이곳에서 조용히 지켜보겠소.”
“네.”
고천주는 응하고 군묵침에게 북대왕이 눈치챌지도 모르니 어서 떠나 숨으라고 말했다. 군묵침이 지른 불은 금세 꺼졌다.
북대왕이 갑자기 사라진 고천주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그녀가 구석 쪽의 물독 밑에 숨어있는 게 아니겠는가? 고천주는 머리 위에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겁에 질려 달달 떨고 있었다.
북대왕이 다가와 그녀의 머리 위에 있는 대야를 툭툭 치며 호통쳤다.
“쉽게 죽지 않으니 일어나거라.”
고천주가 대야를 던지고 일어섰다. 그녀는 죽다 살아난 사람처럼 연기를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나약하다고요. 죽는 건 한순간이에요. 그러니 방심해서는 안 되죠.”
북대왕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거라. 넌 재앙 같은 계집이라 오래오래 살 것이다.”
고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이긴 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북대왕은 어이가 없어 더는 그녀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고천주를 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 후 며칠 동안 북대왕은 현상금을 크게 걸어 고천주가 말한 약재를 구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약재가 너무 까다로워 전부 다 구하기는 너무 어려웠다.
약재가 빨리 구해지지 않아 답답해하고 있던 와중에 북대왕은 막성에서 가까운 한 마을에서 어떤 의원이 일 년 동안 그 약재들을 모아 한 여인에게 주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 여인은 그 약으로 목숨을 부지해야 했기에 죽어도 그 약을 팔려 하지 않았다.
그 소식을 들은 북대왕이 서늘하게 웃었다.
‘내가 갖고 싶다는데 그깟 계집이 팔고 말고가 어디 있단 말이냐?’
그 여인이 있는 마을은 막성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북대왕은 직접 고천주와 중양진인을 데리고 마을로 찾아가 여인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북대왕은 하루라도 빨리 중양진인의 병을 치료해서 그를 북막 황실에 보낼 생각이었다. 눈을 뜬 중양진인이 북대왕을 지지한다면 황제도 출병에 동의할 터.
중양진인은 점을 잘 치는 능력이 있어서 황제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황제는 남들의 열 마디 말보다 중양진인의 한 마디 말을 더 믿는 사람이었다.
북대왕은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여인에게서 그 약을 빼앗으려는 게 아니었다. 그는 상인으로 가장해서 여인을 잘 구슬려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하인들과 암위들을 잔뜩 데려갔다. 그는 마을에 도착해서 의원에게 그 여인의 거처를 물어 곧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암위들이 몰래 개미 새끼 한 마리 도망가지 못하도록 여인의 저택을 단단히 포위했다.
그 여인은 부모나 형제, 자매도 없이 혼자 살고 있었는데 집은 아주 컸다. 정자며 누각이며 안에 없는 게 없었다. 늠름하고 건장한 하인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는데 제법 정숙한 분위기였다.
여인은 몸매가 늘씬했다. 그녀는 면사포를 쓰고서 우락부락한 어멈들을 이끌고 직접 밖으로 나와 북대왕을 맞이했다.
북대왕은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금액이 얼마든 상관없으니 그녀의 환약을 사고 싶다고 했다. 여인은 태연자약하게 앉아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건 제 목숨을 부지하는 약이라 얼마를 주셔도 팔지 않는다고요.”
그 말에 잘 참고 있던 북대왕은 순간 폭발하고 말았다. 그가 당장 여인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정말 나에게 팔지 않겠느냐?”
여인이 냉소했다.
“예.”
제226화
그러자 북대왕이 순식간에 여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사람들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 덩치가 큰 어멈들이 곧바로 여인을 구하려고 나서자 북대왕이 서늘하게 말했다.
“다들 물러서거라. 한 발만 앞으로 더 나섰다간 이 년의 모가지를 부러뜨릴 것이다.”
그가 얼어붙은 목소리로 경고하자 겁을 먹은 어멈들은 더는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북대왕이 여인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환약은 어디 있느냐?”
목덜미를 잡힌 여인은 분하여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북대왕이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
“환약이 네 목숨을 살리는 약이긴 하나 그 약을 내놓지 않으면 넌 지금 당장 저승으로 가게 될 것이다.”
북대왕은 그렇게 말하며 여인의 목덜미를 움켜쥔 손에 갑자기 힘을 주었다. 순간 엄청난 힘에 질식한 여인은 눈앞의 악마같은 북대왕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제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북대왕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아랫것들더러 가져오라고 하거라.”
여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은밀한 곳에 숨겨뒀기 때문에 오직 저만이 가져올 수 있습니다.”
북대왕도 그 약이 진귀하다는 것을 알기에 소중히 보관한다고 해서 그것을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여인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곳으로 안내하거라!”
여인은 북대왕에게 목이 졸린 채 앞으로 걸어갔다. 고천주는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북대왕의 수종들도 두 사람을 따라갔다.
여인은 회랑과 아치형 문을 지나 한 전각에 도착했다. 여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이곳은 밀실이라 오직 세 명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북대왕이 뒤에 서 있는 수종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예!”
수종들은 응하고 문밖을 지켰다. 여인이 꽃병으로 만들어진 개폐 장치를 돌리자 밀실의 문이 열렸다. 그러자 순간 서늘한 공기가 덮쳐왔다. 여인이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환약은 반드시 차게 보관을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약효를 잃게 됩니다.”
북대왕은 고천주를 향해 함께 따라 들어가라고 눈짓했다. 오직 고천주만이 환약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차가운 냉골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북대왕의 명에 따라야 했다. 그녀는 냉기 때문에 두 팔로 제 자신을 끌어안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고천주가 다 들어오자 여인이 문을 닫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냉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되니 문을 닫아야 합니다.”
북대왕은 이번에도 딱히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여인을 들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안에 정말 작은 빙실이 있었는데 오직 세 명만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여인은 한 궤 앞에 멈춰 서더니 그 궤를 열었다. 바로 그때, 궤 안에서 무언가가 뿜어져 나왔다. 아주 고약한 냄새였다. 냄새가 퍼져 나오자 여인은 살짝 옆으로 피했다.
코를 찌르는 듯한 고약한 탁류가 북대왕의 얼굴을 덮쳤다. 북대왕은 냄새를 맡고 아!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는 본능적으로 여인의 목덜미를 놓고 제 얼굴을 감쌌다. 북대왕은 얼굴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그때 옆에 있던 고천주가 이때다 싶어 재빨리 북대왕의 뒷덜미에 침을 꽂았다. 그러자 그의 우람한 몸집이 옆으로 쿠웅! 하고 넘어지면서 순식간에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밀실 옆에 투명 문이 열리더니 군묵침이 안으로 들어왔다. 고천주는 북대왕의 옷을 벗겨 군묵침에게 건넸다. 군묵침은 순식간에 북대왕의 모습으로 변장했다. 반면 진짜 북대왕은 꽁꽁 묶인 채 투명 문밖으로 던져졌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나서야 세 사람은 밀실을 나갔다.
북대왕으로 변장한 군묵침은 고천주와 중양진인을 데리고 저택을 떠났다. 마차에 오른 ‘북대왕’은 호위들을 막성으로 돌려보낸 후 북대왕의 영패를 가지고 유유자적하게 마을을 빠져나갔다.
그리곤 미친 듯이 대연을 향해 달려갔다. 가는 길에 수시로 북막 병사들의 검문이 있었지만 영패 덕분에 아무 의심 없이 통과했다.
대연의 영역에 들어서서 그들을 마중 나온 인마들을 만나서야 고천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모든 일이 끝나자 긴장이 풀린 그녀는 지쳐서 마차에 늘어졌다.
고천주는 군묵침의 계획을 듣고 중도에 행여 무슨 착오라도 생길까 봐 며칠 내내 전전긍긍했었다. 그동안 봐온 북대왕은 워낙 치밀하고 남을 믿지 않는 성격이라 쉽게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군묵침의 계획은 완벽했고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북대왕에게 두 번이나 납치당한 고천주는 드디어 그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어서 너무 속이 후련했다.
군묵침은 얼굴에 붙이고 있던 인피 가면을 뜯어내고 난잡했던 옷도 갈아입었다. 그렇게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혼자서 헤벌쭉 웃고 있는 고천주를 보자 그가 물었다.
“왜 웃소?”
고천주가 군묵침을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왕야는 참 용맹하세요. 적들의 수장을 잡으셨잖아요.”
고천주의 칭찬에 군묵침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작게 말했다.
“다 그대 덕분이요.”
고천주가 남대왕을 조종하고 또 일부러 까다로운 약재들을 꾸며내서 북대왕이 백방으로 약재를 구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군묵침도 이 계획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고천주의 몸 안에 미행 고충이 있기 때문에 북대왕에게서 열 보 이상 멀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북대왕도 함께 잡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