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야, 그만하세요
3권
옥루인취 장편소설
제55화
“죽여주시옵소서, 낭랑!”
어멈은 곧바로 엎드려 죄를 청했다.
“초왕은 영특한 놈이니 절제를 했을 것이다. 소상낙 그것이 참으로 쓸모없는 년이구나. 그렇게 독한 미약을 탔는데도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다니. 됐다. 산적 년만 죽으면 초왕도 그 죄를 면치 못할 터. 딸을 목숨처럼 아끼는 정안후가 이 일을 알게 되면 초왕 그놈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우린 그저 나가 구경만 하면 되니라.”
어쨌든 고천주가 죽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말을 마친 황후는 궁녀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황후였기에 당연히 천천히 나가야 했다. 그녀가 밖으로 나갔을 땐, 밖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들 모두 황제와 태황태후가 밖으로 나와 황궁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후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고천주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완전히 시름을 놓았다. 황제와 태황태후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밖으로 나왔다. 성 공공이 소리 높여 황궁으로 돌아가는 신호를 외치려는데, 황후가 갑자기 걱정스럽게 말했다.
“초왕과 초왕비가 보이지 않습니다. 먼 길을 가야 하는데 초왕비가 태황태후의 두통을 치료해야지 않겠습니까?”
태황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는 말이오. 어찌 천주 그 아이가 보이지 않는 것이오? 그 아이를 내 마차에 올려보내도록.”
황후가 곧바로 옆에 서 있는 어멈에게 명했다.
“어서 빨리 초왕비를 모셔 오지 않고 무얼 하느냐? 폐하와 태황태후를 기다리게 하다니, 오만방자하기 그지없구나!”
“송구하옵니다, 당장 초왕비를 모셔오겠습니다.”
어멈이 공손히 물러나 고천주를 찾으러 가려는데, 태황태후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천주가 저기 있구려. 금슬이 좋은 초왕 내외가 오늘 어쩌다 늦게 일어난 모양이오. 간만에 외출인데 황후도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
이제 곧 좋을 구경을 할 생각에 신이 났던 황후는 순간 표정이 돌덩이처럼 굳고 말았다.
‘초왕비? 초왕비라고? 어젯밤 불에 타 잿더미가 된 사람이 어떻게 이곳에 나타날 수 있어? 태황태후께서 잘못 보신 게 분명해!’
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을 하던 황후는 태황태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황후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있었다.
아침 햇살 아래, 그림 같은 한 쌍이 빛을 등지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군묵침과 고천주였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을 받은 황후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어찌…. 분명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고 했거늘! 이건 환각이야, 환각이 분명해!’
황후는 가까스로 힘껏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시선을 들었다. 고천주는 태황태후 앞에 다가와 공손을 예를 올렸다.
“태황태후를 뵈옵니다.”
태황태후가 인자하게 말했다.
“나와 함께 마차에 오르자꾸나.”
태황태후는 고천주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곧장 마차로 향했다. 두 사람 사이는 무척 친밀하게 느껴졌다. 멀쩡히 살아서 눈앞까지 걸어온 고천주를 보자, 황후는 충격에 휩싸여 하마터면 정신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산적 년의 목숨이 아홉 개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 왜 이렇게 목숨이 질긴 거야?’
군묵침이 황후를 매섭게 쳐다보더니 평소와 다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 안색이 좋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소자가 태의를 불러올까요?”
황후는 옆에 서 있는 어멈의 팔을 잡고서야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앙칼진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난 괜찮으니 초왕은 신경 쓸 필요 없네.”
군묵침이 그녀를 뚫어져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입니다.”
차가운 군묵침의 시선에 황후는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가 다시 자세히 확인했을 땐 군묵침은 이미 평소의 덤덤한 얼굴로 돌아간 뒤였다. 방금 차갑게 느껴졌던 그의 시선은 그녀만의 착각인 듯했다.
황후는 잠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설령 내가 한 짓이라는 걸 안다고 해서, 네까짓 놈이 무얼 할 수 있는데? 외가가 기운 왕야 따위가, 병권을 잡고 조정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엄국공부를 흔들 수 있을 것 같아? 심지어 폐하께서도 날 함부로 어찌하지 못하신다고!’
황후는 그렇게 머릿속에서 온갖 자기 합리화를 하고는 허리를 쭉 폈다. 황후는 제가 저지른 악행에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어멈의 부축을 받으며 이내 마차에 올랐다.
***
대부대가 위풍당당하게 황실 사냥터를 떠나 궁으로 향했다. 태황태후의 마차는 널찍하고 편안했다. 고천주는 마차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많이 피곤해하는 고천주를 보자 태황태후는 그녀에게 편히 자라고 말했다.
고천주는 연속 며칠 큰일을 겪은데다가 달거리까지 더해져 몸이 허약해졌다. 태황태후의 말에 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곧바로 깊은 잠에 들었다. 무람없이 잠이 든 고천주의 천진한 모습에 태황태후는 오히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털털한 아이란 말이지.’
마차에서 잠이 든 고천주는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 깨어나지 않았다. 태황태후는 깊이 잠든 고천주를 아끼는 마음에 그녀를 깨우지 않았다. 대신 군묵침을 불러오게 했다.
잠시 후 군묵침이 말을 타고 다가왔다. 태황태후의 마차에서 편히 잠을 자고 있는 고천주를 보자, 그는 예의도 격식도 모르는 아이 같은 그녀의 모습에 놀라서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대담하기 그지없군.’
태황태후가 당부했다.
“천주가 깊이 잠들었으니 깨우지 말고 조용히 안아가거라.”
군묵침은 달콤하게 잠을 자고 있는 고천주를 태황태후의 어깨 너머로 슬며시 보고는 작게 알겠다고 답했다. 그는 말에서 내려 고천주를 안아갔다. 태황태후가 그를 힐끔 보더니 탓하듯 한마디 했다.
“한창 신혼이라 이해는 한다만, 천주는 아직 어리지 않으냐? 네가 자제 좀 하거라. 네게 얼마나 시달렸으면 이렇게 피곤해하겠느냐?”
군묵침은 어이가 없었다.
‘망나니가 나한테 시달릴 위인인 줄 아십니까?’
하지만 도저히 해명할 수 없는 일이라, 군묵침은 그저 공손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태황태후는 그제야 흡족한 듯 군묵침을 향해 가보라는 의미로 손을 내저었다. 군묵침은 고천주를 안고 왕부의 마차에 올랐다.
그때 마침 군묵침에게 데려다 달라 부탁하려했던 소상낙은, 그가 고천주를 안고 마차에 오르는 것을 본 순간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왕야가 산적 년을 안다니…. 전에는 고천주를 보기만 해도 질색했으면서 왜 자꾸 안는 건데!’
소상낙은 군묵침의 품에 안겨있는 고천주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그의 품은 필시 단단하고 따뜻할 거라는 생각에, 소상낙은 결국 질투심이 폭발하고 말았다.
‘왕야의 따뜻한 품은 분명 내 것이었는데, 내 것이어야 한다고!’
소상낙이 고천주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은 질투심으로 잔뜩 일그러졌고, 꽉 움켜잡은 손수건은 그녀의 손톱으로 인해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고천주를 안고 왕부의 마차에 오른 군묵침은 비록 경각심 하나 없이 팔자 좋게 자고 있는 고천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동작만큼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때문에 마차를 바꿔 탔음에도 불구하고 고천주는 깨지 않았다.
너무 깊게 잠든 고천주를 보자 군묵침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고천주의 이마가 많이 뜨거웠다. 고천주는 그저 피곤해서 잠든 게 아니라 아파서 잠든 것이었다. 연속 몇 번이나 냉수에 몸을 담갔으니 병이 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군묵침은 미간을 찌푸린 채 마부에게 속도를 높이라 명했다.
왕부로 돌아오자마자 왕부의 의원이 그녀를 진찰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기로 인한 고뿔이었다. 의원은 서둘러 처방을 내려 약을 짓게 했다.
고천주는 마치 잠의 나락 속으로 추락한 사람처럼 계속해서 잠만 자고 싶었다. 그런데 자꾸 귓가에 대고 탕약을 마시라는 금이의 목소리에 짜증이 치밀었다. 그녀는 결국 탕약과 함께 금이를 쫒아내 버렸다.
고천주에 의해 연속 세 번이나 쫓겨난 금이는 탕약을 세 번 모두 엎질렀다. 달리 방도가 없었던 금이는 결국 울먹이며 군묵침을 모셔올 수밖에 없었다.
탕약을 들고 안으로 들어온 군묵침은 침상 끝에 걸터앉았다. 그가 고천주의 입술을 움켜잡고 억지로 약을 먹이려 하자, 고천주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주먹을 날렸다.
다행히 군묵침은 반응이 빨라 그녀의 주먹을 피할 수 있었다. 군묵침은 약사발을 내려놓고 고천주의 팔목을 아프지 않게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아예 고천주를 제 몸 아래에 가둬버렸다. 그가 한 손으로는 고천주의 두 팔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탕약을 들었다. 그리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천주, 약 먹어.”
군묵침에게 팔목을 잡힌 고천주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 졸려 그의 말을 그저 흘려들었다. 군묵침의 잘생긴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는 바닥에 쏟아진 탕약을 보더니 갑자기 약사발을 들고 한입에 탕약을 쭉 들이켰다.
군묵침이 고천주의 탕약을 마셔버리는 것을 본 금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울먹이며 마지막 한 사발이라고 애원하려던 순간, 왕야가 몸을 숙여 왕비에게 직접 탕약을 먹여주는 게 아니겠는가? 금이는 순간 놀란 토끼 눈이 되고 말았다.
‘이, 이런 방법도 있었어?’
쓰디쓴 탕약이 끊임없이 고천주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쓰고 괴롭고 질식할 것은 느낌에 고천주가 드디어 눈을 번쩍 떴다. 그런데 눈을 뜨자마자 군묵침의 요염한 얼굴이 눈앞에 가득 들어왔다. 게다가 이 부드러운 입술의 촉감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한참이 지나서야 뒤늦게 그가 무얼 하고 있는지 깨달은 고천주는, 순간 눈을 부라리며 펄쩍 뛰었다. 그녀는 군묵침을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군묵침에게 꽉 붙들려 아예 힘을 쓸 수 없었다. 이에 고천주는 어쩔 수 없이 그가 먹여주는 탕약을 그대로 받아 마셔야 했다.
마침내 고천주에게 탕약을 다 먹인 군묵침은 고천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아기 사자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일부러 그랬는지 아니면 실수로 그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고천주의 입술을 살짝 깨문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가 고천주의 입술을 꼬집으며 말했다.
“약 하나 먹는 것조차 얌전한 법이 없군,”
고천주는 어이가 없었다. 군묵침에게 깨물린 입술이 얼얼하게 아팠다. 그녀는 손으로 입술을 거칠게 몇 번이고 닦았다. 정말이지 화를 낼 수도, 그렇다고 내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고천주가 말없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군묵침을 노려보았다. 정신을 차린 고천주가 징그럽다는 듯이 가장 먼저 제 입술을 닦는 것을 보자 군묵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군묵침은 몸을 일으키며 금이에게 냉랭한 목소리로 분부했다.
“왕비를 잘 돌보거라.”
말을 마친 그는 곧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예.”
순간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군묵침의 모습에 금이는 서둘러 답했다. 그녀는 군묵침이 완전히 밖으로 나간 뒤에야 고천주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곤 고천주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울먹이며 말했다.
“왕비, 괜찮으세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고천주는 너무 졸리고 힘이 없었다. 그녀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괜찮다.”
“괜찮아서 다행입니다. 왕비께서 주먹으로 턍약을 세 번이나 엎으셨습니다. 다행히 왕야께서 오셨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오늘 탕약을 한 모금도 드시시 못하셨을 거예요.”
금이의 말을 들은 고천주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러니까 재수탱이 왕야가 일부러 희롱을 한 게 아니고, 금이가 도저히 그녀에게 약을 먹일 수 없어 군묵침이 임시방편으로나마 약을 먹인 것이었다.
입술엔 아직 그의 온도가 남아 있었다. 고천주는 순간 이게 무슨 느낌인지 말로 표현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이불을 머리까지 폭 뒤집어쓰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렇게 고천주는 족히 사흘을 내리 잔 뒤에야 기운을 차렸다. 거기에 더해 제가 만든 약까지 먹으니 드디어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런데 요 며칠 군묵침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봉황화는 여전히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아마 그날 군묵침이 그녀에게 약을 먹였을 때 빌린 기운 덕분일 것이다. 기운이 꽉 차자 심신에 안정감이 느껴졌다.
며칠 쭉 누워만 있었더니 몸이 뻐근했다. 그녀는 날씨가 좋으니 점포로 가볼 생각이었다. 점포에 도착하자마자 인심당의 시종이 찾아와 공손하게 말했다.
“협객 선생, 드디어 오셨군요. 인심당에 복잡한 환자 한 명이 왔는데, 척 의원께서 선생을 모셔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고천주는 나비 가면을 쓰고 약 가방까지 챙긴 뒤 인심당으로 향했다. 말로만 듣던 복잡한 환자를 본 고천주는 그 자리에서 뒤돌아 나가버렸다. 그런 고천주를 본 척 의원은 곧바로 쫓아와 물었다.
“선생, 어찌 그러시는 것이오? 아주 존귀한 신분의 환자라, 선생께 섭섭지 않은 진료비를 드리겠소.”
고천주가 느긋하게 말했다.
“저라고 아무 사람이나 치료하는 게 아닙니다.”
제56화
척 의원은 어리둥절했다.
‘혹 안에 있는 환자가 선생께 무슨 결례를 범하기라도 한 걸까?’
척 의원이 애원하며 말했다.
“선생, 내 이렇게 부탁드리겠소. 제발 치료해주시오. 인심당을 찾아오신 귀인께 무조건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소이다. 한데 선생께서 이리 가시면, 인심당의 명예가 실추될 게 아니오?”
고천주는 개의치 않다는 듯이 말했다.
“인심당의 명예가 실추되는 게 저랑 무슨 상관입니까?”
척 의원은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에 있는 귀인은 절대 밉보여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척 의원이 고천주가 솔깃할만한 제안을 했다.
“선생은 인심당의 큰 은인이니, 앞으로 인심당에서 벌어들인 수입의 일 할을 선생께 드리겠소.”
척 의원의 말에 고천주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눈꼬리를 살짝 휘어 올리더니 천천히 척 의원을 향해 다섯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사실 고천주는 의관(醫官)을 꾸리고 싶었다. 인심당에서 기꺼이 수입의 일부를 내주겠다고 하니, 인심당과 합작해도 나쁠 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심당엔 이미 점포도 마련되어 있고 일손도 많아 훨씬 편할 테니까.
척 의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떨리는 심장을 안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서, 선생, 무슨 뜻이오….”
고천주가 앵두 같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오 할.”
척 의원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오, 오 할? 오 할이면 인심당 절반을 내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선생의 요구가 너무 과한 게 아니오? 흑흑흑….’
“싫으면 관두십시오.”
고천주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이내 뒤를 돌았다. 척 의원은 조금의 미련도 없이 떠나가는 고천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고천주가 방문을 나서려는 순간, 척 의원은 고천주를 불러 세우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 그리 합시다.”
척 의원은 눈썹을 찌푸리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의술이 뛰어난 선생에게 수입의 반이나 되는 돈을 내주게 되었으니, 앞으로 선생을 인심당에 불러오는 일도 훨씬 수월할 거야. 게다가 방 안에 있는 환자는 내가 절대 밉보일 수 없는 높은 분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반드시 고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만약 선생이 못 고치겠다고 드러누워 버리면 내 입장이 난처해지게 될 터. 그럴 경우에 혹시라도 노한 귀인께서 점포를 부숴버리면 또 어찌한단 말인가?’
짧은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 척 의원은 대보단 소를 희생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 판단했다. 고천주는 척 의원의 부름에 다시 되돌아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럼 어디 한 번 잘해봅시다.”
즐거워 보이는 고천주와 상반되게 척 의원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하지만 제 기분만 좋으면 그만인 고천주에겐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녀는 느긋하게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다.
인심당에는 귀한 환자만 모시는 방이 따로 있었는데, 아늑한 분위기에 무척 운치 있게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방 침상에는 엄국공부의 대공자 엄광(嚴光)이 누워있었다.
엄광은 경성에 주둔하고 있는 다섯 군영의 대장군이자, 엄국공의 가장 자랑스러운 장자였다. 소문에 의하면 엄광은 힘이 장사인데다 뛰어난 무예 실력까지 갖추고 있어, 병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요즘 오른손이 갑자기 부어올라 주먹을 쥘 수도, 물건을 들 수도 없었다. 명의란 명의는 다 만나봤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중 엄광은 인심당이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한번 속는 셈치고 찾아온 것이었는데, 엄광의 인내심은 벌써 바닥이 나고 말았다.
방안으로 들어오는 고천주와 척 의원을 보자, 그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성질을 내었다.
“정말 고칠 수나 있긴 한 거요? 만약 못 고친다면 내 이 거지같은 의관을 당장 부숴버릴 것이오!”
그는 군인 출신이라 그런지 성격이 매우 거칠었다. 척 의원이 그를 달래듯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고칠 수 있고말고요. 무조건 고칠 수 있습니다. 신의께서 오셨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신의?”
엄광이 나비 가면을 쓰고 있는 고천주를 쳐다보았다. 고천주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약 가방을 풀어 옆에 내려놓았다. 척 의원이 웃으며 말했다.
“예, 이 분이 바로 저희 인심당의 신의십니다. 신의께선 못 고치는 병이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엄광이 고천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날 완치시키는 게 좋을 게요.”
고천주가 냉랭하게 말했다.
“완치시키는 데는 문제없지만, 약값이 비쌀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엄광은 슬쩍 비웃으며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이 하늘 아래 나 엄광이 내지 못할 돈은 없소.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치료나 시작하시오.”
그렇다. 만약 엄국공부에서 내지 못할 돈이라면 궁에 있는 황제도 내지 못할 것이다. 고천주는 사실 만 냥을 받으려 했으나, 거만하게 구는 엄광의 태도에 아예 곱절을 불렀다.
“진료비와 약값을 합쳐서 모두 이만 냥입니다. 치료는 먼저 돈을 지불하시면 그때 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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