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목차
27장. 외팔이와 절름발이
(1)
(2)
28장. 하늘에서 떨어진 별은 바다로 가라앉고
(1)
(2)
29장. 시체의 바다에 삼켜진 작은 배 한 척
(1)
(2)
30장. 떠나간 뒤에 찾아오는 인연
(1)
(2)
27장
외팔이와 절름발이
(1)
그다음 날은 운이 따라 주었다.
날씨는 바람이 잠잠했으며 가랑비가 가볍게 흩날렸다.
이는 순항의 징조였다.
백연의 운항 계획대로 선박은 선선한 새벽 무렵 동쪽 바다에서 벗어나 서쪽 바다로 향했다.
배는 남쪽으로 모여드는 해류를 타고 나아가다 신성산이 육안으로 관찰되는 해역에 도달했다.
백연의 힘이 배의 방향을 조금씩 바꿈과 동시에 조종간이 바삐 돌아갔다.
이 해역에서의 바람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분다.
장궁이 진운에게 향할 때는 순풍이었으나 진운이 장궁에게 향할 때는 역풍이 되었다.
마침 사위가 잠잠하였으니 수고를 한층 던 셈이었다.
진운은 직접 그리고 기록해 두었던 낡은 지도를 옆에 두고서 밤새도록 골몰했다.
어젯밤 항해실로 자리를 옮긴 백연은 향후 운항 계획을 수립하느라 잠을 설치고 말았다.
식량 배분 및 어획량, 돌발 요소에 따른 노선 정하기 등은 백연의 몫이었다.
마음가짐을 바로잡아야만 했다.
출항 전까지 누락되는 것 없이 운항 계획을 수립하여 진운에게 인계해 주어야만 했다.
진운이 검토할 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다.
그러다 백연은 항해실 바닥의 판자 하나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못질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는지 툭 튀어나와 있었고 밟을 때마다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하필이면 침상과 탁자 사이가 좁아 자칫 잘못했다간 밟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진운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들은 것은 조금 억울한 일이었다.
거기에다 더해 항해사로서 맡은 첫 임무로 인해 피로감이 남아 있었다.
미리 몸을 풀어 두었기에 그나마 피로감이 덜한 편이었다.
백연은 하루 내에서 어떻게든 빈틈을 내 검술을 연마했으며 이는 오래된 그의 습관이었다.
그가 하루치 수련을 마무리 지었을 때, 선원들은 이미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비전투 인원들은 제 할 일을 즉각 중단하고 예정대로 신속하게 선실 내부로 피신했다.
갑판 위는 금세 휑해졌다.
백연과 진운을 포함한 몇몇 기골이 장대한 선원들이 전부였다.
진운은 예리한 눈빛으로 육극반의 은빛 바늘을 봤다가 전방을 주시하기를 반복했다.
약 한 시진쯤 지났을까.
적란운이 관측되었다.
악천후가 예측됨에 따라 진운은 지시를 내렸다.
선원들은 서둘러 천막을 쳤으며 역풍에 대비해 일찌감치 돛을 접었다.
그러자 배는 오로지 백연의 힘으로 움직이는 해류에 의존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백연은 해류를 움직이며 동시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기상 상황을 주시했다.
부디 순조로운 항해의 징조가 이대로 그치지 않기를 바랐다.
마침내 신성산이 흐릿하게나마 윤곽을 서서히 드러내었다.
마지막으로 백연이 목격했을 때와는 달리 희뿌연 물안개가 차 있어 시야가 온통 흐릿했다.
진운이 백연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자 백연이 말했다.
“안개는 걷지 않는 게 좋다. 배가 부딪치지만 않도록 해. 내가 앞을 계속 보고 있을 테니.”
진운이 고개를 끄덕인 후 육극반을 들여다보더니, 뒤를 돌아 가볍게 손짓하며 말했다.
“조타수에게 좀 전해 줘. 방향은 이대로 가라고. 백연. 너는 속력을 조금씩 늦춰 줘.”
“예, 선장님!”
“알겠다.”
근처의 선원 한 명이 씩씩하게 대답한 후 조종간이 있는 뱃머리를 향해 부리나케 달려갔다.
백연은 손을 내저어 배의 속도를 조금씩 늦추었다.
조타수가 진운의 명대로 방향을 조정하면 백연은 그 방향대로 나아가게끔 속력을 조정했다.
진운은 그 선원에게서 눈을 돌려 백연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잠잠한 걸 보니 우리가 딱 적절한 때에 도착했네. 잘했어.”
“아직 아니다. 적절한 때인지는 아직 두고 봐야 해.”
“신중한 건지 쓸데없이 걱정이 많은 건지 원. 잘했다고 해도 받아들일 줄을 몰라.”
진운이 투덜거렸고, 백연은 그를 힐끗 보다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뱃머리가 물안개 속을 차차 파고들었다.
물안개가 갑판 위를 완전히 뒤덮고 나서야 백연은 가볍게 허공에다 손짓했고, 배가 멈췄다.
백연은 목소리를 낮추어 진운에게 말했다.
“암초가 있어 멈추라고 한 게 아니다. 장궁의 무리가 바로 코앞이야.”
진운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주변 선원들과 시선을 교환하며 검지를 입술에다 가져다 대었다.
선원들은 시야 내에서 진운이 보낸 수신호를 선원들에게 전달했다.
백연은 잰걸음으로 뱃머리를 향해 다가가 곳곳을 살폈다.
그의 눈에는 장궁이 거느린 네 척의 배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지척까지 다가온 장궁의 무리가 거리가 좁혀진 만큼 더욱 큰 위엄을 뽐냈다.
장궁 무리는 네 척의 대형 선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드넓은 적재 공간에다 약탈한 식량을 축적해 지금에서야 진운 측을 아득히 초월하기에 이르렀고, 또한 모든 선박이 흩어지고 모이기가 수월하니 성동격서의 전법에 유리했다.
적의 전력은 압도적이었고 현재 진운 측 경로는 탑골어의 이동 경로와 겹쳤다.
교전이 벌어질 시 승패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이 배에는 백연이 있었다.
모두가 그의 존재에 의존했기에 선원들은 겁먹은 기색이라고는 없이 당당했다.
다만 진운은 긴장한 채로 상황을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진운이 자그맣게 속삭였다.
“주변 상황은 어때? 우리가 접근한 걸 눈치챈 건 아니지?”
“장궁 측을 제외하면 다른 배들은 보이지 않는군. 일찌감치 떠난 것 같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우리가 접근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어. 그사이 확인할 게 있는데… 허락해 줄 수 있나?”
진운은 그가 자리를 비운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가벼운 한숨을 뱉은 뒤 고개를 끄덕였고 백연은 곧 제자리에서 도약해 망대로 향했다.
이미 망대에 있는 팔영이라는 사내가 백연을 위해 슬쩍 자리를 비켜 주었다.
백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망대에 서서 굳은 얼굴로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도 백성들의 시체라든지 죽음의 흔적들은 눈을 씻고 찾아 봐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 무사히 떠난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이 자연스레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신성산 측에서는 각 가문에서 파견된 자제들이 한 사내를 중심으로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장궁 무리를 앞두고 잔뜩 경계심을 곤두세운 모습이었다.
이내 빼곡히 늘어선 자제들 가운데 위치한 한 사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입 닥쳐라! 누가 누구한테 누명을 씌우려고 해! 휘씨 백성들로 위장해 식량을 죄다 털어 간 게 네놈들인 것은 땅이 알고 하늘이 아는데 어디서 감히 발뺌을 하느냐! 손이 닳도록 빌어도 모자랄 것을, 뭐? 식량 배급을 중단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어처구니가 없군. 당장 꺼져라. 은하단의 단장으로서 그리고 촉천 세가의 대변인으로서 우리는 오늘부로 너희들을 명백한 적으로서 규정하였으니 알아 두어라. 도둑놈들에게 줄 식량은 쌀 한 톨도 없다!”
확음술을 썼는지 그들의 뒤편에 있는 진운의 무리에게까지도 선명히 들려왔다.
식량 고갈의 문제는 대륙이 잠긴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외부 백성들에게 보급된 선박에는 몇 달 치 식량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몇 달은커녕 엿새도 채 못 가서 바닥을 드러내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 까닭은 장궁같이 제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자들에게 있다며 진운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장궁 무리는 가문 측의 배급 중단 조치에 대한 철회를 촉구한 모양이었다.
마치 자신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뻔뻔한 태도였다.
가문은 속아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최후통첩을 보냄으로써 적대적인 입장을 공고히 했다.
장궁과 가문 사이 갈등이 점차 고조되는 현장을 이들이 목격한 것이었다.
백연은 경멸에 찬 눈빛으로 장궁 무리를 한참 주시하다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확신에 가득 찬 진운의 얼굴을 떠올린 것이다.
그의 예측이 적중했다.
그러다 백연은 장궁 측 선박에서 작은 움직임을 하나 포착했다.
자그마한 두 점이 묵직한 나무 단지를 선미 방향으로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전신을 휘감았다.
백연은 곧바로 수면 위로 뛰어들었다.
자그마한 구슬 하나가 빠진 것처럼 아무도 그의 잠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묵직한 나무 단지를 굴리며 나아가던 선원들의 발아래가 얼어붙었다.
“어엇?!”
선원들은 미끄러졌고 곧장 나무 단지 두 개를 놓치고 말았다.
나무 단지는 데굴데굴 굴러가더니 난간을 부수며 수면 위로 떨어졌고 이내 가라앉았다.
백연은 수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곧 수면 아래로 떨어지는 두 개의 나무 단지를 낚아채어 사선으로 향했다.
진운은 백연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불쑥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응?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왜 망대가 아니라 물속에서 나와?”
“장궁의 선원들이 피를 가득 채운 단지들을 옮기려고 하는 것을 발견했다. 탑골어를 유인하려 했던 모양이야. 단지는 빼낸 다음 사선의 갑판에 실어 뒀으니 나중에 가서 확인해 봐라.”
백연이 물 한 방울 묻지 않은 채 사뿐히 갑판 위에 내려앉으며 말했다.
진운은 싱긋 웃은 채로 백연의 어깨를 토닥였다.
“수고했어. 덕분에 큰 사고는 면했네.”
백연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어쩐지 쭈뼛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왜 그래? 할 말이라도 있어?”
진운의 물음에 백연이 고개를 숙인 채로 답했다.
“네 의견을 의심해서 미안하다. 내가 걱정이 지나친 것 같군. 네 말이 맞았어.”
“풋. 그건 걱정이 지나친 게 아니라 신중한 거지. 나야말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해 놓고 아닐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적반하장으로 나왔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어쩔 뻔했어.”
“…그렇군.”
백연은 진운의 웃음을 보고 한층 안심한 듯했다.
진운은 백연의 어깨를 한 번 더 토닥여 준 이후 발걸음을 옮겨 뱃머리로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궁 측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네 이놈들! 너희들이 감히…!”
“가문 측은 시간 낭비하지 마시지요! 강도들과 입씨름 벌여 봤자 아무 소득도 없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