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목차
18장. 드높은 곳까지 덮쳐드는 먹구름
(1)
19장. 핏빛의 길복에 깃든 인연은
(1)
(2)
(3)
(4)
20장. 깨어져 흩어지는 것은 다만 외로운 마음
(1)
(2)
21장. 작열하는 사막 속 기묘한 인연
(1)
(2)
18장
드높은 곳까지 덮쳐드는 먹구름
(1)
“그런··· 말도 안 된다. 그가 천계의 별들마저 인형으로 만들 수 있다니!”
백연이 소매 안으로 떨리는 주먹을 숨긴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때만큼은 모두가 두려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비담과 풍연은 넋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세상천지에 이런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낱 요괴 따위가 천계에 영향을 미친 적은 전무했다.
이쯤 되니 자신도 진혼사에게 조종당하는 인형이 아닌가 의심케 되었다.
안홍주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로 말했다.
“저 역시 방금 깨달아 머리가 어지럽군요. 그렇습니다, 폐하. 마침 여기 모인 자들이 모두 별이니, 한번 자세히 봐보십시오. 그녀의 기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 느껴질 겁니다.”
모두가 눈을 감고 홍비랑의 성력을 찾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성력이 느껴지기는 했으나 흡사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다.
매우 미약하고 흐린 촛불을 보는 듯했다.
풍연은 가장 먼저 눈을 뜨고서 곧장 울화통을 터뜨렸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여기 모인 자들 중에서 성력이 가장 낮은 것은 저희가 아닙니까? 아무리 홍비랑의 성력이 약해졌다 한들 이 정도일 수는 없습니다. 이건 마치···.”
“별들이 업경을 거치기 전 정도의 힘이지.”
비담이 풍연 다음으로 눈을 뜨며 한 마디를 보탰다.
이윽고 백연이 홍비랑을 보며 중얼거렸다.
“···성력을 지나치게 사용해 신체가 과부하 되어도 이러한 상태에 도달할 텐데. 안홍주. 그녀가 어떠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 더 상세히 말해 줬으면 한다.”
“여타 인형처럼 악령이 들어 있기는 합니다. 심장은 일단 무사하군요. 그래서 성력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하아. 심장을 적출 당하다니.”
별에게 있어 심장이 적출된다는 것은 통상적인 잔혹함과 다른 잔혹함이 있었다.
모두가 숙연해져 있는데 진운만이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백연이 진운을 보고 머뭇거리는 사이 풍연이 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주진운. 넌 별이면서 그것도 모르냐! 아무리 그래도 별 또한 목숨을 잃게 되면 혼백이 귀계로 가게 되는 건 알고 있지? 그 혼백이 귀계에서 일정한 단계를 거쳐 신기로 제련되어진다는 것도 말이야. 그러나 심장을 빼앗겨 목숨을 잃으면 그 단계를 거칠 수가 없어.”
진운은 그저 머리가 가려워 긁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풍연은 진운이 이 사실을 모른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해명하기에도 귀찮아 그는 풍연이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그러면 사존께서도 마찬가지인가?”
“그래. 이건 폐하께서도 마찬가지다. 전대 성왕도 마찬가지고. 예외는 없어.”
“흠. 그런데 아까 한 말 말이야. 심장을 빼앗기면 혼백이 구천을 떠돌기라도 한다는 건가?”
“그렇다면 차라리 낫겠지. 하지만 정확히 그 반대다. 혼백이 다음 생도 없이 영원히 소멸하게 돼. 인간의 혼백이 악령으로 타락한 뒤에 소멸하면 그게 끝이듯이 별도 예외는 아니지.”
별의 심장은 본디 육체가 소멸하면서 자연히 함께 소멸하는 것이다.
별의 심장은 당연하게도 육체의 일부라 육체가 죽으면 심장도 함께 죽게 된다.
머리가 잘린 사람의 심장이 끝까지 살아 있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심장이 파괴되면 머리 역시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만 혼백이 귀계로 온전히 이동하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 다른 별의 심장을 억지로 빼내어 그 별이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 혼백은 귀계로 가지도 못하고 구천을 떠돌지도 못하고 그대로 소멸해 버린다.
심장을 온전히 적출 당한다는 것은 별들에게 있어 대단히 끔찍한 일이었다.
귀하디귀한 별의 심장을 파괴해 죽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복수심을 품었다는 시점에서 혼백을 온전히 귀계로 돌려보내 준다는 것이 모순이었기에, 통상적으로 별이 별을 죽인다 함은 그 심장을 가로채 혼백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걸 의미한다.
홍비랑은 인형이 되어 그 껍데기 내부에 제 심장을 품게 되었으니···.
“말인즉슨 진혼사가 그녀의 심장을 적출하고, 그녀의 육신이 소멸되기 전에 인형으로 만든 다음 다시금 그 심장을 악령과 함께 인형 속에 넣어 움직이게끔 했다는 뜻이지. 이해했나?”
풍연의 말에 진운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귀계 쪽에서도 차질이 생기겠는데.
현계에서나 천계에서나 진혼사 때문에 문제가 많아.
어쩔 수 없이 그이가 힘 좀 쓰겠군.
“웬 영문 모를 요괴에게 죽임 당하다니. 정말 끝까지 민폐만 끼치는 여자야. 그러게 왜 쓸데없이 나서가지고는 이 사단을 만들어! 휴. 그나마 별이 사라지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녀의 별이 사라졌더라면 초선과 담진 측에서 진작 눈치를 챘을 것이다.
풍연은 퉁퉁 부어오른 뺨을 연신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나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정말 홍비랑이 인형이 되지 않고서 사지 멀쩡히 돌아왔다면 정신을 차렸을 때 어떻게 진술을 하겠습니까? 불 보듯 뻔한 일이지요.”
그의 말대로였다.
홍비랑은 자신이 진혼사에게 납치당했고, 함께 있던 인원들이 자신을 돌봄에 소홀함이 있었으며, 오자룡과 안홍주가 자신이 무사하다는 거짓을 고했다는 걸 가감 없이 드러낼 것이다.
비담은 태양혈을 지그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끄응. 인형이 된 그녀를 돌려보내면 천계 역시 진혼사의 감시하에 놓일 텐데.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로군. 무엇을 택하든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따를 테지만 이번 건 꽤 큰일이야.”
“하지만 마땅한 방비책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 비담.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풍연의 말에 비담은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어떻게 하고 말고도 없지. 우선 당장 눈앞에 있는 바퀴벌레 한 쌍부터 주의하는 수밖에.”
비담의 반응에 풍연뿐만 아니라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오자룡은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음. 진혼사는 신출귀몰하여 그 집요한 두 수호성조차 행방을 알지 못하지. 제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바람에 제 모습을 감춘 귀신을 어찌 이길까. 허허. 안홍주. 이것 좀 보시게. 우리 모습을 좀 봐. 처량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완전히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야.”
“···쯧! 답지 않게 청승 떨고 있어. 보아하니 네 제자보다 못하구나! 풍연. 네 스승께서는 아무래도 진혼사가 두려워 못 살겠다 하니 너라도 대신 사단전의 한 자리 차지하여라.”
“스승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과도한 언사가 아닌지···.”
풍연이 오자룡의 눈치를 보며 말하자 안홍주는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한 대륙의 수장 자리 정도 꿰차면 모름지기 간이 커야 하지 않겠느냐! 하여간 이 양반은 덩치만 컸지, 겁쟁이라니까. 간은 제 제자보다 콩알만 해 가지고. 폐하. 진혼사는···.”
“나도 알고 있다.”
백연은 안홍주의 말허리를 잘랐다.
안홍주가 입을 다물자 백연이 호흡을 고르고선 말을 이었다.
“다음을 기약하자. 지금은 그러는 수밖에 없다. 모두가 상당히 지쳐 있지 않느냐. 대신 늘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안홍주. 겁쟁이가 오래 산다는 얘기도 있지 않느냐. 오자룡. 잘 말해 주었다. 둘은 아무쪼록 홍비량의 향후 동향을 주시해 줬으면 한다. 해낼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물론입니다.”
오자룡과 안홍주가 즉각 대답해 보였다.
그러자 비담이 조심스레 끼어들어 말했다.
“폐하. 그럴 수도 있잖습니까. 만약 천계에서 홍비랑 외에 다른 별들이 인형이 되었다면? 그렇게 된다면 어찌하면 좋습니까? 진혼사가 천계를 제집 드나들 듯하지 않을런지요.”
“홍비랑의 향후 동향을 주시하다 보면 실마리가 잡힐 것이다.”
백연은 진퇴양난의 상황에서도 대단히 침착했다.
그는 이럴 때일수록 맡은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듯 보였다.
어찌할 수 없는 것에 연연해 보았자 피곤할 뿐이란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홍비랑을 돌려보내는 것은 타당한 선택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초선과 담진을 더 유념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현계의 모든 이들을 언제라도 선동할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그렇게 다들 이 상황을 납득하고 차츰 적응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분위기가 누그러졌으나 정작 진운은 사로잡힌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벗어나려고 해도 더욱 더 집요하게 그를 잡아 삼키는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성왕을 물리쳤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초선과 담진이 믿을 리 없어.
사실상 진혼사가 초선과 담진에게 자신들의 약점을 쥐여 준 셈이었다.
빌어먹을. 사존의 정체가 언젠가 발각된다면···!
이빨이 빠드득 갈리고 부르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일으킨 눈사태.
그가 보여 준 주선화의 인형.
그 존재가 일으킨 모든 것들이 불가항력적이었다.
안홍주는 쭈그려 앉았던 몸을 피고 일어나며 말했다.
“문지기와 은하단의 단장이 대신 홍비랑을 연행해야 하니 저희는 이만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아참. 폐하. 비담과 풍연에게 남연진이 초선과 담진을 궁지로 몰아넣는데 큰 공적을 세웠다 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홍비랑이 납치된 현장에 나타나 일행을 도왔다지요?”
“그렇습니다. 본의 아니게 도움을 여러 번 받았지요.”
백연이 대답했다.
오자룡은 어째선지 팔짱을 낀 채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홍주가 옆구리를 찌르자 그제야 그가 멋쩍은 듯 뺨을 긁으며 말했다.
“···하하. 이것 참 면목이 없군요. 제 손으로 그녀를 은하단의 단장 직분에서 쫓아냈는데. 인간의 몸으로 아직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아 복수를 하다니. 우리들도 분발해야 할 듯합니다.”
“스승님! 그 여자에게 고개를 숙이시다니요. 전혀 그럴 필요는···!”
풍연은 흥분하다 말고 오자룡에게 꿀밤을 쥐어박혔다.
“풍연! 넌 오늘 지은 죄가 크니 입 다물어라. 폐하. 저희는 이만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안홍주. 자리를 오래 비워두었으니 갈 때도 되었잖나. 폐하께서도 바쁘실 텐데 이만 가자고.”
“그래야겠군. 주 소협. 폐하. 두 분 모두 천계의 일에 적극 협조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기회가 있으면 다음에 뵙도록 하죠. 그때까지 아무쪼록 무탈하시길.”
오자룡과 안홍주가 차례로 공수하며 작별을 고했다.
백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그들의 모습이 곧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그러자 풍연이 쭈뼛쭈뼛 비담에게로 다가와 그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그··· 비담. 고맙다.”
“웬 감사인사?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
말은 퉁명스럽게 해도 비담은 기분이 제법 나쁘지 않은 듯 보였다.
백연은 그들을 지켜보다가 뒤늦게 진운에게 시선이 닿았다.
다들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나누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만 유독 말이 없었다.
대화에서 으레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분위기를 띄웠던 그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진운이 여전히 쭈그려 앉은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을 본 풍연이 말을 걸었다.
“주진운! 다들 가셨는데 뭐하는 거야? 안 일어나?”
그 말을 듣고서 진운은 무릎을 짚고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잠깐. 너 괜찮은 거야? 안색이 창백한데.”
“그러게 말이다. 무리했으니 쉬어야 하는 것 아니냐?”
비담과 풍연이 말을 보태자 진운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래도 그래야 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