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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1.
12.
13.
외전1. 제비꽃 소녀
외전2. Happy Birthday
외전3. 지금의 우리
외전4. 그때의 우리
외전5. 시간을 돌아 다시
 11.
이환을 다시 만난 것은 퍽 오랜만이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홍 교수와 지유가 내려왔을 때 본 이후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선배, 오랜만이네요.”
“응. 그렇네.”
“그동안 바빴어요?”
“왜? 내 생각 했어?”
“그간 워낙 자주 왔었으니까요. 이번엔 텀이 좀 길어서.”
은호는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엉뚱하게 묻는 이환의 얼굴도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글쎄. 알아보고 처리할 일도 있고 해서.”
“아아….”
“이젠 그것도 마무리됐으니, 네 기대에 부응해서 자주 얼굴 보여 줘야지.”
“네네. 그러세요.”
은호는 짐짓 눈을 접으며 웃어 보이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인쇄소에서 보낸 팸플릿이 도착했다고 해서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 며칠 남지 않은 전시라, 오탈자를 확인할 생각에 마음이 바빴다.
“그래. 수고.”
“네, 선배도요.”
이환이 관장실로 향하는 것을 언뜻 보고, 은호는 다시 발걸음을 서둘렀다.
이환을 다시 만난 것은 퇴근길에서였다. 마침 이환도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인 모양이었다.
청해에 와 있을 땐 어디서 머무는 걸까. 이제껏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호텔 같은 숙박업소를 이용하겠지, 막연히 생각했다. 
“퇴근하세요?”
“응. 너도?”
“네.”
그러다 보니 갤러리에서 걸어 내려오는 길을 어떻게 나란히 걷게 되었다. 
“이젠 저녁에도 날씨가 덥네요.”
“여름이니까.”
어쩐 일인지 함께 걷는 길이 길게 이어졌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건, 은호의 연립으로 올라가는 언덕의 초입에서였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은호는 걸음을 멈추고 이환을 쳐다보았다.
“선배, 지금 나 데려다주는 거예요?”
“아니. 나 집에 가는 길인데?”
“집…이요?”
“어. 청해에 집 구할 거라고 예전에 말했잖아. 홍 교수님 오셨을 때.”
그래, 그랬었다. 워낙 자주 드나드니, 돈 많으면 집 하나 구해 놓는 게 편하겠다는 생각도 언뜻 했었다. 그리고 이환은 돈을 참 잘 버는 사람이니까 못 할 것도 없었고.
그런데 집을 구한 것과 은호와 퇴근길이 겹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문득, 지호가 왔던 날 현관에 걸려 있던 팥시루떡이 떠올랐다.
“설마… 103호?”
“떡은 맛있었어?”
“허…….”
“잘 부탁해, 이웃사촌.”
이환의 표정은 평소처럼 담담했다. 은호는 멍하게 입만 벌린 채 이환을 바라보았다. 
문득 지유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야, 저 선배 청해에 밥 먹듯이 드나든다며. 내가 서울에서 와 봤잖아. 쉽게 올 곳이 아니라니까.”
“그거야 일 때문이지.”
“무슨 갤러리 일 혼자 다 하냐? 심지어 여기에 집도 구할 생각이라잖아. 혹시 여기 연립에 빈집 없니?”
공지유의 추측이 맞을 줄이야. 은호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
7월이 되자 비가 자주 내렸고, 은호는 이른 휴가를 냈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홍익이의 기일을 특별히 챙기려고 계획하거나, 하염없이 슬퍼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단지 기억하고 싶었다. 홍익이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날부터 입덧으로 매일 그 존재를 느끼고, 불러 가는 배를 어루만지며 인사하고, 제 배를 퉁퉁 두드리던 홍익이와 소통하던 시간을.
하지만 고요히 보내려 했던 시간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순간순간 밀려오는 애끓는 슬픔과 억울함, 분노와 죄책감을 피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몸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는 용암 같은 감정을 끌어안고, 은호는 괴롭게 몸부림쳤다.
그런 감정의 해일이 몰아치고 난 후면 모든 기운이 소진된 것 같은 허탈감과 무기력증이 찾아왔다.
은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파에 누워 하루를 보냈다. 먹지 않아도, 자지 않아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시간들.
이환이 찾아온 것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뜬금없이 울리는 초인종 소리를 무시하는 것도 수차례였다. 찾아올 사람이 없었지만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그저 귀가 따가울 정도로 계속 울리는 소리가 성가실 뿐이었다.
체인을 걸어 놓은 문 틈새로 보인 건 이환이었다. 이웃이 되기는 했지만 계속 청해에 머무는 것은 아니라, 이 주정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선배가 웬일이에요?”
은호가 힘없이 물었다. 이환은 은호의 텅 빈 얼굴을 잠자코 내려다보았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의 눈빛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휴가라면서.”
“네….”
“며칠 동안 밤마다 집에 불은 켜지는데, 내내 커튼이 한 번도 열리지 않아서. 궁금해서 와 봤어.”
“…….”
이환의 목소리는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담백한 무게였다. 다만 어떤 의도든 간에 지금의 은호에게는 그의 궁금증을 해소해 줄 의욕이 없었다.
“그냥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쉬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래, 그렇게 해. 이거 받아.”
여전히 체인이 걸린 한 뼘 정도의 문틈으로, 이환이 뭔가를 들어 보였다. 꽤 큰 크기의 종이 가방이었다. 
“그게 뭐예요?”
은호는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물끄러미 종이 가방을 바라보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은호가 문을 열어 줄 기미는 없었다.
그런데도 이환은 기분 상한 기색은 없었다. 잠자코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여기 두고 갈게. 휴가 잘 보내.”
미련 없이 돌아서서 나가는 이환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러고도 은호는 한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모든 게 성가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윽고 문을 열어 이환이 두고 간 가방을 집어 들었을 때,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무기력하게 거실로 돌아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입구가 벌어지며 안이 들여다보였다.
꽤 큰 크기의 꽃다발이었다. 
주이환이 아무 이유 없이 꽃다발을 사 들고 오다니. 그에게 어울리지도 않고, 생뚱맞은 상황이었다.
은호는 천천히 꽃다발을 꺼내 보았다. 초록 잎 사이에서 하늘빛 작은 꽃들이 빛나는 별 무리처럼 풍성했다. 물망초였다.
이걸 왜?
의아했던 것도 잠시. 꽃다발에 꽂힌 카드가 있었다.
[나도 기억하고 있어.]
물망초의 꽃말은 ‘나를 잊지 말아요’.
아마도 이환은 은호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은호가 휴가 기간 동안 추억하고 싶었던 시간을 저 역시도 기억하고 있다고. 
단지 기억해 주는 것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일 때가 있다.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지만, 홍익이와 함께한 시간은 분명 존재했다. 은호 자신만의 기억이 아니었다. 함께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동안 갇혀 있던 감정이 비로소 터져 나왔다. 은호는 소파에 엎드려 애끓는 소리로 한참을 울었다. 
***
갈 곳 없던 감정을 모두 소진하고 나니, 터질 것 같았던 가슴은 한결 후련해졌다. 하지만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기에, 체력적인 타격은 피할 수가 없었다.
딱히 어디가 아프다기보다, 몸살처럼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신열이 올랐다. 
다시 누군가 찾아온 것은 홍익이가 떠난 날이었다.
아침부터 활짝 갠 날이었다. 베란다를 온통 가린 커튼 너머로도 이글이글 타오르는 한여름의 햇빛이 느껴졌다.
불청객처럼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은호는 감정 없는 로봇처럼 몸을 일으켰다. 눈앞이 하얗게 부서지며 현기증이 났다. 잠시 이마를 짚었던 은호는 현관을 향해 비척비척 걸었다.
또 이환이 온 거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체인을 걸어 놓은 현관을 열었을 때, 은호는 오늘만큼은 절대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마주했다. 사실은 휴가 내내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해 노력했었다.
“문 좀 열어 봐.”
은호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유준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문틈으로 마구 들이닥치는 햇볕에 어지러웠다. 은호는 눈을 찡그렸다.
“여긴 왜 왔어?”
“들어가서 얘기할게. 일단 문을 열어.”
“출근 안 해?”
“휴가야.”
은호의 싸늘한 말투에도 유준은 침착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냥 돌아가라고 화를 낼 수도 있었고, 그냥 문을 닫아 버릴 수도 있었다. 아니면 미친 것처럼 분노하며 울부짖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은호는 그럴 기운이 없었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는 동안, 유준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은호는 문을 쿵, 닫았다가 체인을 풀어냈다. 그리고 다시 문을 열자, 유준이 성큼 현관으로 들어섰다.
“뭐 하는 거야?”
유준은 은호의 손목을 당겨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주방으로 가 쟁반을 찾더니, 들고 온 봉투에서 뭔가를 꺼내 담았다. 마치 제집처럼 행동하는 유준을 보며 은호가 뾰족하게 물었다.
“어, 미안해. 그런데 이대로 놔둘 순 없잖아.”
유준은 들고 온 쟁반을 은호에게 내밀었다. 쟁반 위에는 프로틴이 들어간 영양보충 음료와 이온음료, 알약 몇 가지가 놓여 있었다.
마치 은호의 체력이 바닥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이걸 왜?”
“일단 먹어. 너랑 갈 데가 있는데, 이대로는 힘들 거야.”
유준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저를 안타깝게 보는 시선에 위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은호의 마음을 모두 알고 있을 그가 미웠고, 한편으로는 눈앞에 나타난 그에게 위로를 구하고 싶기도 한 빌어먹을 양가 감정.
“어딜… 가는데?”
“조금 멀어. 그러니까 기운을 좀 차려야 해.”
유준은 은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은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 넘겼다. 은호는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손길을 느끼지 않으려 했다.
유준은 영양보충 음료의 입구를 따서 은호의 손에 들려 주었다. 은호는 마지못해 그걸 꾸역꾸역 마셨다. 그리고 뭔지 알 수도 없는 알약 몇 개도 삼켰다.
어딜 데려가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디든 가 보자는 알 수 없는 마음이 들었다. 뭔가가 끌어당기는 것처럼 말이다.
힘겹게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기자, 유준은 은호를 조심스럽게 데리고 나가 차에 태웠다.
“시간이 조금 걸릴 거야. 눈 좀 붙여.”
“…….”
은호는 대답 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약하게 틀어 놓은 에어컨 덕분에 차 안의 공기가 쾌적했다. 조심스럽게 운전하는 유준 덕에 차는 부드럽게 굴러갔다. 잔잔한 흔들림에 몸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은호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차가 멈추는 작은 진동에 은호는 눈을 떴다. 센터페시아의 시계를 보니 두 시간 반 정도가 지나 있었다. 잠깐 잠이 든 것 같았는데, 꽤 긴 시간이 흘러 있어 은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깼어? 컨디션은 좀 어때?”
“…여기가 어디야?”
“내려 보면 알아.”
유준의 표정이 왠지 가라앉아 있었다. 오래 운전해 피곤한 걸까. 은호는 목청을 가다듬으며 반쯤 잠긴 목을 풀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유준이 은호 쪽의 차 문을 열어 주고 손을 잡아 일으켰다.
“조금 걸어 올라가야 해. 괜찮겠어?”
“…가 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