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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6.
7.
8.
9.
10.
6.
슬슬 여름이 실감 나는 무렵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배가 불러오는 은호는 그 어느 때보다 여름이 가까워지는 것을 강렬히 느끼며 늘어져 있을 때였다. 불쑥 전화가 걸려 왔다. 액정에 표시된 이름은 오빠인 지호였다.
“여보세요?”
-은호야, 오빠 한국 왔다.
“뭐? 미리 말이라도 해 주지. 언제 왔는데?”
-그저께. 말해도, 안 해도 들어오는 날은 똑같은데 뭐.
예고도 없는 귀국 소식에 깜짝 놀란 것도 잠시, 늘 마이웨이로 살아온 지호이기에 은호는 그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 작업은 다 끝내고 온 거야?”
-그래. 당분간은 한국에 있을 거야. 밥 한번 먹어야지?
마치 오랜 지인에게 권하는 것 같은 여상한 말투. 하지만 여동생을 향한 지호의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는 누구보다 은호가 잘 알았다.
지호의 귀국 소식에 유준도 반가워했지만, 아쉽게도 식사를 함께하지는 못했다.
약속한 날, 지호는 원피스 위로 볼록 도드라진 은호의 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몰랐던 것처럼 왜 이래.”
부모님과의 통화에서 분명 들었을 텐데 말이다. 은호는 좀 멋쩍은 기분이 들어, 주먹으로 지호의 어깨를 툭 쳤다.
내내 유럽을 돌며 사진 촬영을 한 지호는, 예전보다 좀 더 가무잡잡하고 몸이 단단해진 것 같았다.
“글쎄. 말로만 듣던 것과 직접 보는 게 이렇게 다르네. 내가 서유준 그 자식 좀 패 주면 되나? 어디 아직 시집도 안 간 귀한 내 동생을 배불뚝이로 만들어 놓고….”
지호의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은호는 깔깔 웃어 버렸다.
식당은 은호의 가족이 여름이면 종종 냉면을 먹으러 가던 냉면집이었다. 지호와 함께 먹은 회냉면은 면발이 매끈하고 쫀득했다. 매콤한 맛이 입맛을 돋워, 은호는 함께 주문한 손만두까지 배부르게 먹었다.
그 배가 사실은 먹어서 나온 배가 아니냐며, 지호가 놀릴 정도였다.
식사를 마친 지호는 같이 차를 마실 겨를도 없이 바로 제주도로 간다고 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부모님을 보기 위해서였다. 제주도에서 한동안 머물다 돌아오면, 유준과 함께 보자는 약속도 했다. 그때는 진짜 명치를 한 대 후려쳐 주겠다는 너스레도 함께.
침대를 선물해 주겠다는 지호의 전화를 받은 건, 그러고도 한 일주일 정도가 더 지나서였다.
“웬 침대?”
-결혼 선물이지.
“뭐 필요한지 물어보지도 않고?”
-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 아냐? 어차피 신혼집 따로 구할 것도 아니라면서. 이제 같이 쓸 침대가 필요하잖아.
유준의 아파트에 와 본 적이 있는 지호는 각자 방의 사정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 유준이 쓰는 작은 방이 곧 아기의 차지가 될 것이고 짐작도 했으리라.
-내가 네 취향을 모르겠니. 마음에 쏙 드는 침대가 도착할 거니까, 기대하고 있어. 배달 가기 전에 연락이 갈 거야.
통화는 산뜻하게 끊어졌다. 참 뜬금없고 엉뚱한 소식이었지만, 침대가 새로 장만할 살림살이 목록에 있는 것은 분명했다.
정말 며칠이 지나자 침대 배송의 일자를 정하는 전화가 왔다.
침대가 들어오면 유준도 이제 생활 공간을 본격적으로 옮기고, 동시에 슬슬 아기방도 꾸며야 할 때였다.
아기 침대며, 옷장, 기저귀와 여러 용품들을 보관할 수납함 등은 이미 유준과 함께 골라 놓았다. 업체에 일자만 통보하면 바로 배달이 될 터였다. 또 사람들이 선물해 준 배냇저고리나 우주복, 이불, 모빌 같은 소소한 아기 살림살이도 박스에 담아 팬트리에 보관 중이었다.
침대가 배달되기 전 유준의 방도 비우고 정리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휴무일인 월요일, 은호는 일단 유준의 방을 대청소하기로 마음먹었다.
유준이 잠만 자는 방이라 특별히 치울 건 없었다. 쓰던 이불은 빨아서 장에 넣고, 한쪽 벽을 차지한 커튼도 떼어 낼 참이었다. 아기방에 어울리는 귀여운 커튼을 달아 줄 계획이었으니 말이다.
유준의 공간이라 이제껏 가볍게 청소 정도만 했었는데, 오늘은 대청소 느낌으로 정리를 해 볼 작정이었다.
은호는 챙겨 온 진공청소기와 막대 걸레를 내려놓고, 유준의 침대에서 이불과 시트를 벗겨 냈다. 침대는 새 침대를 배송하러 오는 업체에서 처분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유준이 읽던 책과 저널, 자료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볼펜과 형광펜 따위를 역시 챙겨 온 리빙박스에 담았다.
“뭐가 이렇게 깨끗해. 치울 게 없네….”
은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잡동사니를 좀 정리하고 나니, 먼지 한 톨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생활감이 없는 방이었다. 마치 주인이 없는 방처럼.
그러고 보니 유준의 방을 이렇게 대대적으로 청소하는 것도 처음인 것 같았다. 그 방은 늘 유준만의 공간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청소하더라도 청소기만 밀고 나오곤 했었다.
큰 빨래를 세탁하는 김에, 커튼도 빨아서 넣어 둘까. 은호는 한쪽 벽을 완전히 가리고 있는 커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유준이 언제든 쉴 수 있게 달아 놓은 두툼한 암막커튼이었다.
환기를 위해 저 커튼을 반쯤 열고 창을 열어 둔 것은 보았지만, 커튼을 완전히 연 것을 본 기억은 없었다.
은호가 뭔가 홀린 것처럼 다가가 차라락, 커튼을 걷은 순간.
“허엇!”
흠칫 놀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가려져 있던 벽에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
쿵 내려앉은 심장이 도망가는 것처럼 빠르게 내달렸다. 저도 모르게 놀란 가슴을 꾹 누르고 있던 은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그림을 보았다.
그리 큰 그림은 아니었다. 20호 정도의 유화였다. 왜 그림을 보이지도 않는 곳에 걸어 놨을까.
한눈에 보아도 무엇을 그렸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남자의 초상화였다. 커다란 창가에 등을 기대고 창 너머 멀리 시선을 던지고 있는 아련한 옆얼굴.
유준이었다. 그리고 그 배경이 되는 장소는 은호의 본가, 화실이 있는 별채.
잠시 멍하니 있던 은호는 천천히 다가가 두 손으로 그림을 떼어 냈다. 그러고도 한참 망설이다, 캔버스를 뒤집었다.
예감했던 것처럼 뒷면에 적힌 사인의 필체는 너무나도 익숙했다.
XX년 6월 13일, Hee.
재희가 죽기 불과 한 달 전에 완성된 그림이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재희의 유작이겠지.
이 그림이 왜, 어떤 경로로 유준의 방에 걸려 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준이 왜 커튼 뒤에 숨겨 두고 있었는지도.
은호는 떼어 냈던 그림을 다시 벽에 걸었다. 그리고 잠자코 다시 그 위로 커튼을 쳤다.
괜히 오전부터 방 치우겠다고 설쳤나. 배가 살짝 당기는 것 같았다. 은호는 손바닥으로 아랫배를 살살 문지르며 거실로 나왔다. 조금 움직거렸다고 등에 진땀이 배어 나온 것 같았다. 이르지만 에어컨을 가동해야 할 것 같았다.
은호는 지친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든 것이 짙은 안개에 뒤덮인 것처럼, 지금 제 기분을 은호는 알 수가 없었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제 방으로 들어갔던 유준이 다시 거실로 나왔다.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방 정리했어?”
“어… 새 침대가 온다고 해서 그 전에 치워 놓으려고 했는데…. 좀 힘들어서 하다 말았어. …미안해.”
“미안하긴. 몸도 힘들 텐데, 내가 하면 되지. 놔둬. 내가 내일 좀 일찍 일어나든지, 틈틈이 마저 할게. 별로 치울 것도 없어.”
유준의 얼굴에는 전혀 거리끼는 기색이 없었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은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그림을 잊고 있는 걸까. 늘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을 정도로, 이젠 그에게 큰 의미는 없는 건가.
은호는 자신의 바람이 진실이라 여기기로 했다.
***
몇 주가 더 지나자 이제 슬슬 몸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저녁이면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뻐근했다. 그래도 지호가 선물해 준 침대는 그의 말대로 은호의 맘에 쏙 들었다.
|침대는 적당한 강도의 매트리스 덕에 허리가 편했다. 등을 기댈 수 있는 각도의 가죽 헤드와 은은한 조명도 마음에 들었고, 소소한 물품을 올려놓을 수 있는 선반이 달린 것도 좋았다.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기능과 디자인을 골고루 갖춘 가구를 찾았을까.
유준도 은근히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새 침대가 들어온 날, 유준과 은호가 각각 사용하던 침대를 처분했고, 자연스럽게 같은 방에서 생활이 시작되었다.
유준은 이 침대에서 처음으로 아기의 태동을 느꼈다. 모로 누운 은호의 허리와 다리를 마사지해 주기도 했다.
그날 이후 은호는 유준의 방에 들어가 보지 않았다. 아기방의 도배일을 정해 놓고, 유준이 짬짬이 방을 정리하는 눈치였다. 은호는 그림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젠 정말 부부처럼 생활하기 시작했지만, 그 새 침대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고 함께 잠잘 기회는 여전히 많지 않았다.
유준은 변함없이 바쁜 레지던트였고, 이제 전문의 시험 준비에 신경 써야 할 무렵이었다. 집에 들어오는 시간은 더 늦어졌고, 못 돌아오는 날이 더 많아졌다.
결혼과 출산. 다가오는 인생의 가장 큰 터닝 포인트를 앞두고 은호는 문득문득 외롭고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일까. 하루는 행복과 기쁨을, 또 하루는 실망과 불안을, 어제는 기대와 희망을, 오늘은 외로움과 슬픔을. 그런 감정들이 무늬를 이루며 일평생 자아내는 편직물 같았다.
오늘도 유준은 들어오지 못할 것 같다는 연락을 해 왔다.
오늘의 무늬는 우울.
거실 창밖으로 저물어 가는 오후의 하늘을 바라보던 은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럼 뭐 어때. 마지막에 완성되었을 때, 멋지기만 하면 되지. 어쩜 이 감정은 다 임산부의 호르몬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울함에 침잠하지 않기 위해, 유준을 보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젠 거리낌 없이 그럴 수 있는 사이니까.
그렇게 결심을 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은호는 서둘러 주방을 향했다.
유준을 위해 토스트를 만드는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늦은 시간 병원에 같이 남아 있을 다른 동료들을 생각해 식빵과 달걀부침도 넉넉히 구웠다.
토스트만 먹으면 심심할까, 양상추, 방울토마토, 오이에 삶은 닭가슴살을 찢어 넣고 상큼한 소스를 곁들인 샐러드도 만들었다.
유산지로 싼 토스트와 몇 개의 밀폐 용기에 나눠 담은 샐러드를 차곡차곡 챙겨 넣었다.
마지막으로 얼음을 잔뜩 넣은 커피를 담은 큼직한 보냉병까지 챙기자 준비가 끝났다.
한동안 서 있었더니 아랫배가 단단하게 당겼다. 은호는 습관처럼 두 손으로 불룩한 배를 감쌌다.
“홍익아, 미안해. 힘들었어? 이제 아빠 보러 가자. 조금 걸을 건데, 힘낼 수 있지?”
아기의 태명은 홍익이었다. 홍대에서 데이트를 한 날,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지만, ‘홍익’이라는 단어에 담긴 널리 이롭게 한다는 뜻도 좋았다.
홍익이는 은호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퉁퉁, 발길질을 했다. 여자아이치고는 씩씩한 태동이었다.
은호는 빙긋 웃으며 가방을 챙겨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여름, 초저녁의 묵직하고 뜨끈한 공기가 은호를 휘감았다. 하지만 은호는 난관을 이겨 내는 동화의 주인공처럼, 꿋꿋이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
진료 시간이 끝난 병원의 복도는 한산했다. 마지막 타임의 진료를 마치고 수납처를 향하는 환자와 보호자들 사이를 거슬러, 은호는 정형외과 너스 스테이션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정미소 간호사가 반색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어머, 배가 많이 불렀다. 산부인과 진료 올 때, 종종 들르지 그러셨어요.”
“에이, 바쁘실 텐데 자주 오면 안 되죠.”
“아기는 잘 크고 있죠? 이제 20주는 넘었죠? 와, 진짜 금방이다. 태명이 뭐예요?”
“홍익이요. 딸이래요.”
“홍익이! 와아! 태명 너무 귀여워요. 서 쌤 진짜 좋아하시겠다.”
정미소 간호사의 밝은 목소리에 은호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지는 것 같았다. 은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으며, 정 간호사의 수다에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와 보길 잘한 것 같았다. 저와 유준의 사이를 알고, 자신들의 소식을 기쁜 마음으로 궁금해하고 들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은호의 허전했던 마음을 채워 주는 것 같았다.
“아 참, 서 쌤 보러 오셨죠? 요새 집에 많이 못 들어가시죠? 4년 차 쌤들 전부 공부하느라 정신없으시더라고요.”
“아… 네. 밤에 출출할 것 같아서….”
“어머, 서 쌤은 너어무 좋으시겠다. 같이 시험 준비하는 쌤들도 좋아하시겠는데요.”
정 간호사는 은호의 손에 들린 커다란 종이봉투를 보며 오호호, 하는 웃음소리를 냈다.
은호는 조금 수줍으면서도 뿌듯하기도 했다. 유준이 좋아할 거란 말을 들어서였다. 워낙 점잖은 성격이니, 좋아도 티는 많이 내지 않겠지. 그래도 은호를 향해 슬쩍 미소 짓는 것만 봐도 좋을 것 같았다.
“잠시만요. 의국에 전화 한번 해 볼게요.”
정 간호사가 짧게 통화하는 동안 은호는 반쯤은 설레고, 또 반쯤은 조바심 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서유준 쌤 금방 나오신대요. 요기 잠깐만 앉아 계세요.”
“아, 아니에요. 그냥 서 있을게요.”
은호는 정 간호사에게 웃어 보이고, 의국이 있는 방향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잠깐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유준일까, 은호의 고개가 자꾸 복도를 향했다.
드디어 가운 자락을 펄럭이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유준의 모습이 보였다. 발길을 서성거리던 은호가 유준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오빠.”
“이 시간에 여기까지 웬일이야.”
유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왠지 그의 눈빛이 굳어 있었다. 반갑게 유준을 부르던 은호는 멈칫했다.
“밤에 출출할 것 같아서… 토스트 좀 만들어 왔어. 당 떨어지면 공부도 잘 안 되잖아.”
“그런 건 편의점에서 사다 먹어도 되는데.”
오늘은 더 바쁘고 힘든 하루였을까. 생각만큼 반겨 주지 않는 것도 섭섭했지만, 은호는 애써 명랑하게 대답하려 했다. 날씨도 덥고 임산부의 몸이 힘들어도, 그래도 얼굴 봐서 기쁜 내색은 할 줄 알았더니….
“매일 그렇게 먹으면 질릴 때도 있잖아. 오빠가 토스트 좋아하기도 하고.”
“날씨도 덥고 너 몸도 힘든데…. 괜히 여기까지 왔다 가면 내가 마음이 안 좋아서 그래.”
하지만 한숨까지 섞어 가며 하는 마지막 말에, 은호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미안해. 오빠 할 일이 많은데, 내가 괜히 눈치 없이 왔나 보다.”
“아니야, 은호야. 그런 게 아니라…… 너 데려다주지도 못하고 혼자 보내야 하는데, 내 마음이 편하겠니.”
“그런 거 바라고 온 거 아니야. 난, 그냥… 오빠 얼굴도 보고, 야식 챙겨 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집엔 혼자 갈 수 있어. 내가 애도 아니고.”
은호는 서운한 마음을 보이지 않게 애쓰며, 대꾸했다.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건네자, 유준은 말없이 받아 들었다.
레지던트의 일과도 고될 텐데, 잠자는 시간을 쪼개 시험 준비까지 해야 하는 일상. 거기다 유준은 결혼도 앞두고 있다. 그러니 신경이 곤두서고 지칠 만도 했다.
자신의 존재가 유준에게 기분 전환이 될 것이란 은호의 기대, 혹은 바람이 무색해졌다.
그래, 그럴 수 있다. 사람이 피곤하면 모든 게 다 성가시게 느껴질 수 있으니까.
“얼른 들어가 봐. 시간 아깝잖아. 그래도 먹는 건 잘 챙겨 먹으면서 해.”
“…집에 들어가면 전화해.”
“걱정 마. 엎어지면 코 닿을 데인데, 뭐. 그리고 의사 쌤도 너무 안 움직이면 안 된댔어. 적당히 걷는 게 좋대. 오빠가 더 잘 알 거 아냐. 나 가 볼게. 들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