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목차
1.
2.
3.
4.
5.
 1.
그날은 세상이 온통 거센 빗줄기에 갇힌 것 같았다.
초저녁이었지만, 두껍게 깔린 먹구름 탓에 창밖은 짙은 어둠이었다.
막 샤워를 하고 나온 은호는 거실 창밖으로 깜깜한 마당을 내다보았다.
채 다 말리지 못한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목덜미가 선득했다. 한여름이라는 계절이 무색하게도.
대학교 첫 여름방학이 시작하자마자 들려온 태풍 소식이었다. 이번 태풍은 바람이 세지 않은 대신, 폭우를 몰고 왔다고 했던가.
교수인 아버지가 학회 참석을 위해 어머니와 함께 스위스로 출국한 지 사흘째였다. 하필 이런 날씨에 텅 빈 집에 혼자 있으려니, 괜히 더 스산하게 느껴졌다.
드르륵. 드르르륵.
갑자기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은호는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폭우가 쏟아지는 저녁, 갑자기 걸려 오는 전화라니 왠지 불길했다.
“오빠?”
핸드폰 액정에 표시된 발신자는 오빠인 지호였다. 군대 전역 후 사진학과에 복학한 지호는 방학을 맞아 몽골로 출사 여행을 떠나 있었다.
원래도 워낙 사이가 좋았던 남매라, 특히 이런 날 걸려 온 오빠의 전화가 퍽 반가웠다.
“잘 지내고 있지? 사진은 많이 찍었어? 오빠, 여기 비 엄청 많이 온다. 태풍이래.”
- 은호야, 혹시 유준이 집에 안 왔지?
지호는 은호의 물음에는 대답도 없이 엉뚱한 질문을 했다. 며칠만의 통화인데도 지호의 목소리에 반가운 기색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습기를 잔뜩 머금은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 아니. 유준 오빠가 왜?”
은호는 의아하게 물었다. 유준은 지호의 고등학교 시절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다. 은호의 첫사랑이자 오랜 짝사랑 상대이기도 했고.
유준이 지호도 없는 집에 찾아올 이유가 뭐가 있을까. 스산한 기운이 좀 더 짙어졌다.
- 재희 어머니에게 연락을 받았는데, 재희가… 사고가 있었나 봐.
“뭐? 재희 언니가? 미국에서? 많이 다쳤대?”
- …떠났다.
어디선가 쿵, 하는 효과음이라도 난 것 같았다. 숨이 잠시 멈춘 것처럼, 은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재희는 유준과 마찬가지로 지호의 고교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였다. 지호와 유준, 재희는 미술부에서 친해져, 삼총사처럼 늘 붙어 다녔다.
그리고 재희는 유준의 연인이기도 했다. 2년 전, 재희가 어느 기업의 후원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며 헤어지기 전까지는.
그 후로 유준이 지금까지도 재희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은호는 알고 있었다.
너무나 비극적인 소식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매일같이 집을 드나들던 재희는 은호에게도 좋은 언니였다.
불시에 들이닥친 충격과 슬픔에 은호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친구를 잃은 지호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오빠… 어떡해. 마음 아파서 어떡해……. 괜찮은 거야? 장례식장은? 그럼 바로 들어와?”
- 장례는 미국에서 조용히 치르겠다고 하시네. 하긴, 어차피 한국에 돌아와 봐야 무슨 소용이겠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두서없이 중얼거리면서도, 은호는 저도 모르게 목이 메었다. 지호의 목소리는 넋을 잃은 사람 같았다.
재희의 친부는 초등학교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재희가 중학생일 때 재혼했다고 들었다.
재희는 무심한 의붓아버지의 가정에 적응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 내내 은호의 집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지호와 유준, 재희는 나란히 하교해 마당 한쪽에 있는 별채에 꾸며 놓은 화실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고, 공부했다.
세 사람의 돈독한 우정은 네 살이나 터울이 지는 은호에게는 늘 동경과 질투의 대상이었다.
그런 친구의 마지막을 지키지도 못하는 지호의 마음을, 은호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 유준이가 연락이 되지 않아. 은호야, 혹시 유준이 별채에 오거든… 아니다. 아무도 없는 데 갈 리가. 행여 오더라도 혼자 두는 게 낫겠지.
“…….”
은호는 유준의 ‘아무도’에 해당하지 않는 것에 문득 저릿한 아픔을 느꼈다. 제가 유준에게 위로가 되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지호의 말에도.
유준을 마음에 품으며 셀 수 없이 겪은 아픔인데도, 그런 종류의 통증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 은호야, 너도 오늘은 재희를 기억해 줘. 그만 끊을게.
지호의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은호는 핸드폰을 움켜쥔 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슴은 상처를 이지러뜨린 것처럼 아프게 울리는데, 머리로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너무나 아깝게 생을 마감한 재희를 생각하면 한없이 안타까웠지만, 은호는 유준 생각에 더 애가 탔다.
오랜 시간 사랑한 사람의 부고를 들은 그 마음을, 슬픔의 그림자조차 자신이 헤아릴 수 있을까.
이 밤, 태풍이 몰고 온 것은 폭우만이 아니었다.
멍하니 앉아 있던 은호는 한참 후에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뺨을 적신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방으로 향했다.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카디건을 꺼내 입는 손놀림이 점점 빨라졌다.
왠지 유준이 와 있을 것 같았다.
2년 전에도 그랬다. 미국으로 떠나는 재희를 다정히 배웅하고, 유준은 홀로 별채 화실에서 밤이 늦도록 세워 앉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근거는 없지만 분명한 예감. 유준에게 가 봐야 했다. 그에게 은호는 아무런 의미도, 위로도 되지 않는다 해도.
현관 수납장에서 커다란 골프 우산을 꺼내 들었다. 문을 나서자마자, 위협하듯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귀가 아플 정도였다.
잠깐 멈칫했던 은호는 오히려 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별채는 본채와 나란히 서 있었다. 고작 이십여 미터나 될까. 우산이 파라솔만큼이나 큰데도, 세차게 들이치는 빗줄기 탓에 몇 걸음 만에 옷이 흠뻑 젖었다.
겨우 도착한 별채에는 어둠뿐이었다. 하지만 살짝 열린 문을 발견하는 순간, 은호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젖은 손을 문에 대기만 했는데, 산토리니를 떠올리게 하는 파란색 문이 소리도 없이 천천히 열렸다.
은호는 어둠 속을 더듬어 걸음을 옮겼다. 빗물을 잔뜩 머금은 스니커즈가 질척거리는 소리를 냈다.
벽에 첩첩이 기대 놓은 나무 이젤과 크고 작은 캔버스들의 희끄무레한 형체를 피해 조금씩 안으로 들어갔다.
타닥타닥, 비 들이치는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나무 바닥에 점점이 찍히던 물 자국이 우뚝 멈췄다.
역시 이곳에 있었다. 밖으로 활짝 열린 여닫이창 앞에 유준이 서 있었다.
입고 있는 셔츠는 흠뻑 젖어 맨몸에 착 들러붙어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한 젖은 옆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오빠.”
몸 안 어딘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은호의 부름은 겨우 입술 주위를 연약하게 맴돌았다.
유준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은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머뭇거리던 발걸음이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유준에게 와락 다가갔다.
“유준 오빠.”
좀 더 분명한 목소리에도 꼼짝하지 않던 유준은, 은호가 팔을 잡고서야 뒤돌아보았다. 척척한 셔츠 아래, 단단한 팔목은 얼음장 같았다. 은호는 제 손을 타고 오르는 냉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유준 오빠… 괜찮아?”
“…….”
“너무… 많이 젖었어.”
몸으로 스며드는 한기 때문인지, 울음을 참기 위해서인지. 은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유준은 은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하얗게 질린 얼굴을 타고 흘렀다.
은호를 보는 것 같았지만, 그의 시선은 은호를 지나쳐 알 수 없는 어딘가를 응시했다. 그 눈빛이 닿은 곳에 있을 실체가 아니지만 분명한 존재.
“재희…….”
창백한 입술을 달싹이며, 유준이 속삭이듯 읊조렸다. 그 사람을 부르는 것도, 말을 거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를 가득 채운 감정이 어느 갈라진 틈으로 새어 나온 것이었다.
덧없는 목소리를 실은 입김에서 쌉싸름한 술 냄새가 났다. 언제부터 얼마나 마신 걸까.
유준의 시선은 여전히 허공을 더듬었다. 슬픔도 고통도 떠오르지 않은 텅 빈 눈동자. 모든 감정이 다 소진되어 버리고, 재마저 남지 않은 막막한 공허뿐이었다.
은호는 심장이 뚝 잘려 나가는 것 같았다. 기어이 눈물이 쏟아졌다. 은호는 정신없이 유준을 부여잡았다.
“오빠, 오빠. 왜 이래? 나 좀 봐 봐.”
경황없이 내민 손이 유준의 뺨을 감싸고 목을 그러안았다. 유준은 무감하게 은호에게 휘둘려 휘청거렸다. 마치 뿌리를 내릴 마음조차 잃은 나무 같았다.
어느 순간, 힘없이 흔들리던 유준이 갑자기 은호를 끌어안았다. 단단한 팔이 은호의 몸을 휘감고, 허리를 단단히 끌어당겼다.
흠뻑 젖은 옷을 사이에 두고, 몸과 몸이 틈 없이 맞닿았다. 분명 차갑게 식은 몸인데, 기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제발… 이렇게 떠나지 마, 재희야…….”
그 큰 몸을 웅크려 은호의 목덜미에 묻은 얼굴에서 흠뻑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멈칫했던 은호는 흐느낌을 참으려 뜨거운 덩어리를 되삼켰다. 유준의 목에 감았던 팔을 풀고, 떨리는 손으로 두 뺨을 감싸 들어 올렸다. 은호의 목덜미에 묻혀 있던 고개가 순순히 딸려 올라왔다.
은호는 이내 흐느끼며 다시 유준을 끌어안았다.
유준의 얼굴은 이제야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얼굴을 적신 빗물 위로 뜨거운 눈물이 소리도 없이 스몄다.
어떡하면 좋을까. 다 큰 남자가 이렇게 우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유준이었기에, 은호는 가슴이 올올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은호의 울음소리가 마치 신호가 된 것처럼, 유준은 은호를 껴안고 등과 팔을 쓸었다. 동그란 이마와 젖은 뺨, 그리고 입술에 정신없이 입을 맞췄다.
다른 어떤 의도도, 목적도 없었다. 무의식이 이끈 행위였다. 그저 가장 친밀하고 근원적인 위로를 받고 싶은 본능이었을 것이다.
은호는 순순히 그의 몸짓을 받아들였다. 지금 유준이 보고 있는 사람이 저가 아니라도 괜찮았다. 그가 혼자서 슬픔을 안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빈 마음을 채워 주지는 못할지라도, 곁에 함께 있어 줄 순 있다고. 그런 마음을 온전히 전하고 싶었다.
유준은 은호의 매끄러운 등과 허리를 어루만지며 소리 없이 울었다. 몇 번이나 맞닿은 입술이 어느 순간 깊이 얽히고 뜨거운 혀끝이 위로하듯 뒤엉켰다.
흠뻑 젖어 식었던 몸이 서로에게 체온을 전하며 점점 달아올랐다. 단단한 손가락이 옷자락을 속으로 파고들었다.
몸과 몸이 맞닿고, 젖은 살결이 부딪치는 소리, 뜨겁고 가쁜 숨을 내쉬는 소리만 빗소리 속으로 흩어졌다.
날카로운 통증이 기어이 몸 안을 파고들었을 때, 은호는 괴롭게 눈을 감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은호와 유준은 최선의 방법으로 위로를 나누고 있었다. 슬픔도, 고통도, 죄책감도 모두 지울 수 있도록.
***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도 아직은 이른 아침이었다. 어둠이 깔린 창밖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나 보다.
유준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빗소리는 재희의 부고를 듣던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그 어둑한 저녁의 음울함, 살갗을 어루만지던 차가운 공기, 젖은 뺨을 타고 내리던 뜨거운 눈물, 그리고 곁에 함께 있음을 필사적으로 전하려고 하던 작고 보드라웠던 몸의 감촉까지.
그날 유준을 압도했던 감정은 슬픔보다는 죄책감이었다. 유학을 떠나는 재희를 붙잡았어야 했다는.
사실 유준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해 주길 재희가 바랐다는 것을 말이다.
“어떻게 한 번을 안 말리냐. 나 없어도 괜찮나 보네.”
어느 기업의 후원으로 떠나는 유학. 축하해 주는 유준에게 재희는 어색하게 웃으며 장난처럼 말했다.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 집안의 원조를 바랄 수 없었던 재희에게 이렇게 좋은 기회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재희를 붙들어 놓는다 한들, 그것을 보상할 만큼 그녀의 마음을 충족시킬 자신이 없었다.
점점 더 바빠지는 본과 생활. 숨 막히는 학습량과 실습. 재희가 제게 원하는 그런 감정과 시간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헤어진 지 2년. 사랑의 추억은 희미해져 갔지만, 그래서 더욱 후회와 죄책감이 컸다. 마지막까지 손을 내밀어 주길 바랐던 재희의 눈빛을 외면했던 저였기에.
그날 은호의 존재가 제게 위로가 되었냐고 묻는다면, 분명 그랬다. 차갑게 식은 몸에 온기를 전해 주고, 갈 곳 잃은 거친 절망의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 주었다.
“괜찮아? 너, 처음이었……”
“응. 난 괜찮아.”
모든 격정의 파도가 지나간 후. 온통 후회와 슬픔으로 흐렸던 정신이 그제야 돌아왔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은호에게 머뭇거리며 물었다. 퍽 씩씩했던 은호의 대답 덕분이었을까. 험하게 요동치던 마음이 문득 가라앉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그 말이 은호에게 더 미안해지는 것이었기에.
“오빠, 몸 잘 추슬러. 밥도 챙겨 먹고.”
“…….”
“견딜 수 있을 만큼만… 슬퍼하고.”
저보다 네 살이나 어린 동생이 건넨 야무지면서도 소박한 위로. 유준은 겨우 희미하게나마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은호와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한 건, 본과 생활을 마치고 의사 자격 국가 고시의 합격 발표가 나던 날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4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돌아온 2월, 비가 내리는 아침.
담담한 손길로 스킨과 로션을 바르던 유준이 문득 침대 쪽을 돌아보았다. 이불이 흘러내려, 엎드린 은호의 가냘픈 어깨와 등이 드러나 있었다.
몇 번이나 절정에 올랐던 밤이 벅찼던지, 은호는 곤히 잠든 것 같았다.
퍽 오랜만에 함께 보낸 밤이었다.
동거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잠깐씩 마주하는 일상. 그나마 출퇴근 흉내라도 내게 된 것도 레지던트 4년 차에 들어선 덕분이었다.
여전히 긴급호출을 받고 뛰어가는 일도, 병원에서 밤을 새우는 일도 잦았다. 대학병원의 OS(정형외과) 레지던트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생활이었다.
지금의 생활에 불만이나 부족함은 없었다. 병원 일은 늘 바쁘고 고되었지만, 전문의를 향한 수련의 과정은 순조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