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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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태가 영 엉망이군. 그분이 노하시겠어.”
“으…….”
물에라도 빠진 것처럼 귓가가 온통 먹먹했다. 정신을 다잡으려 애써봐도 의식이 빠르게 점멸하기만을 반복했다. 연신 힘주어 눈을 감았다가 떠도 시야가 흐릿했다. 코를 찌르던 피 냄새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직감했다.
‘이게 죽음이구나.’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뻗어 아리아의 손을 쥐려 했으나, 야속하게도 잘 쥐어지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주인공이 죽는 소설이 어딨어?’
내가 조금이라도 일찍 소설의 내용을 기억해 냈더라면 결말이 달라졌을까. 삼키지 못한 눈물이 얼굴 옆을 타고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어차피 곧 따라가게 될 텐데, 꼴값은.”
아리아는 물론, 나한테까지 검을 휘두른 남자가 우리를 비웃었다. 남자의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다시 내게 떨어지려던 찰나였다.
땅에서 옅은 진동이 느껴졌다. 이윽고 말발굽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창백하게 번뜩이던 검이 이내 바닥을 나뒹굴었다.
“커흑……!”
검을 겨누던 남자가 내 위로 엎어졌다. 상처를 짓누르는 고통에 기침이 흘러나왔다. 입에서 쏟아지는 피를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에 의해 상체가 들어 올려졌다.
검은 머리칼의 남자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벌써 죽었나.”
그러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가물가물한 눈을 한껏 찌푸렸으나, 얼굴조차 희미했다.
‘우릴 구하러 온 건가?’
왜 이렇게 늦었냐고 그를 힐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입을 열어도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삐져나올 뿐이었다. 원망을 담아 쏘아보는 내 눈초리에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죽음이 불러들인 한기 속에서도 유달리 빛나 보이는 칠흑 같은 머리칼, 기묘한 서늘함을 지닌 물 빠진 핏빛 눈동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이 이야기의 결말을 쥔 그가 내 눈가로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에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이렇게 금방 망가질 줄 알았으면, 그딴 거래는 하지 말걸.”
어둡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죽음이 내 세상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 * *
“헉……!”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온몸이 땀에 젖어 축축했다. 또 그 꿈이었다. 한숨을 폭 내쉰 나는 땀으로 젖은 얼굴을 쓸고 비척비척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윽!”
내 앉은키보다 한참 높은 침대 탓에 내려오다 발을 잘못 디딘 모양인지, 발목이 아팠다. 게다가 낡아 빠져 다 해진 잠옷은 그 기능을 못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젖은 몸에 한기가 그대로 스며들어 마른기침이 나왔다.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욕실에 도착한 나는 발목을 살짝 주물렀다. 저놈의 거지 같은 침대.
‘……뭐, 본질적인 문제를 따지자면 침대 하나 맞춰주지 못할 만큼 가난한 이 집구석부터가 문제지만.’
수도꼭지를 열자 차가운 물이 흘러나왔다. 손에 물을 받아 문대듯이 벅벅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내 모습을 다시 확인했다. 며칠 밤을 지나도 그대로였다. 관리하지 않아 흐린 거울 안에는, 거울의 채 반도 채우지 못한 꼬마가 자신을 노려보듯 서 있었다.
관리를 잘 받지 못했음에도 조금 푸석해지기만 했을 뿐 빛을 잃지 않은 금발에, 어둠 속에서도 형형히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 영양이 부족하여 또래보다 작은 몸집을 가지고 있던, 열한 살의 ‘엘레나 클린턴’이었다. 엘레나 클린턴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조연이었다. 이제는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단편 피폐 로맨스 소설.
로맨스라고는 해도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절절히 사랑하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제대로 대화한 적도 없는 여주를, 그저 몇 번 눈을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주변부터 차츰차츰 망가트려 고립시킨다.
이후는 집착, 집착, 또 집착이었다. 남주가 미친 짓 하는 내용밖에 없었다. 마지막에는 연고 없는 여주를 저택에 감금시키는 피폐의 끝을 달리는 소설.
「평생 이 집 밖으로는 나갈 생각도 하지 마.」
그런 대사로 끝이 났던 것 같았다.
‘진짜, 로맨스의 ‘ㄹ’자도 없는 소설.’
괴상한 취향의 친구가 제정신 아닌 남주가 짜릿하다며 추천해 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키워드도 안 보고 끝까지 달렸다가 느꼈던 그 배신감이란……!’
그리고 나, 엘레나는 엔딩 직전에 그런 여주의 도망을 돕다가 죽는 소꿉친구 조연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주인 아리아는 도망칠 의지를 지니고 있었으나, 친구인 내가 휘말려 죽게 되자 모든 걸 포기하고 절망해 버린다. 즉, 나는 여주인공의 마음이 완전히 꺾이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고 죽을 운명의 조연이었다. 심지어 내가 그 운명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바로 며칠 전, 이제는 없던 일이 되어 버린 전생에서 죽음을 앞두고서야 겨우 기억났으니까. 요즘 들어 반복되는 그 꿈은 악몽이었지만, 단순한 꿈은 아니었다. 내가 직접 겪었던 일이었다.
그날의 우리는 원작대로 도망쳤고, 그러던 중 추격자에게 살해당했다.
‘……그러고 보니.’
원작대로라면 내가 아리아를 구하며 죽고, 아리아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남주를 만났어야 했다. 그러나 내가 직접 겪은 전생에서는 조금 달랐다.
「레나!」
정체 모를 추격자가 우리에게 달려든 순간, 비명처럼 내 이름을 부르짖은 아리아가 나를 감싸고 죽어 버린 것이다. 그 순간 기억난 소설의 내용과 그보다 더 갑작스러운 친구의 죽음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추격자는 그런 나를 놓치지 않았고, 나 또한 빈사 상태에 이르렀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 누가 나타났던가…….’
시야가 까맣게 가라앉고, 눈 떠 보니 현재였다. 그러니까…….
‘빙의에다가, 회귀까지? 무슨 원 플러스 원 행사도 아니고.’
처음에 눈을 떴을 땐 내가 환각을 보는 줄 알았다. 그러나 며칠을 기다려도 이 환각에서 깨지를 않았다. 이제는 받아들일 때였다.
‘그따위 죽음은 절대 사양이야.’
앞으로 그려질 미래에 절망하던 찰나 뒤쪽에서 쾅! 하고 큰 소리가 났다. 놀라서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내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욕실 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렸다. 그리고 거울 안에서 눈이 마주쳤다.
“엘레나 클린턴.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아버지.”
날카롭게 떨어진 노성과 동시에, 나는 순식간에 팔이 잡혀 끌려 나갔다.
* * *
“빨리. 시간이 없다.”
재촉하는 목소리에 분칠하는 하녀들의 손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안 그래도 거칠던 손길이 더욱 조심성 없어졌다.
“콜록, 콜록!”
여기저기 하얀 가루가 날렸다. 약한 기관지가 또 고통을 호소했지만,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단장을 마친 나는 뒤에서 기다리던 아버지의 손에 끌리다시피 마차에 올랐다. 낡은 마차가 느리게 굴러가기 시작하자 주위가 겨우 조용해졌다.
‘드디어 입을 열 기회가 생겼네.’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끌려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쯧. 오늘은 겨우 초대장을 얻어 황궁에서 여는 큰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귀가 닳도록 말했건만. 준비도 하지 않고 그 꼴이 다 무어냐!”
“……아.”
나는 그제야 아버지가 이토록 분노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때쯤에 그런 연회에 참석했던 적이 있었지.’
다만 어이가 없긴 했다. 일정을 알려주는 사람조차 없는데, 회귀한 지 며칠도 안 된 내가 오늘이 어떤 날인지 어떻게 안단 말이야.
나는 내 나이도 내가 써 뒀던 일기를 보고 겨우 짐작해야 했다. 보통 회귀하면 하녀에게 오늘이 며칠인지 물어보고, 미친 사람 취급이라도 받던데. 난 주위에 물어볼 하녀나 하인조차 없었다. 요 며칠 몸살을 앓느라 방에 틀어박힌 내게 약 하나 던져 주지 않았기에, 사람을 본 게 오랜만일 수준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지, 식사는 문 앞에 꼬박꼬박 챙겨 주긴 했다.
‘죽으면 곤란할 테니까.’
그러나 딱 그 정도였다. 사용인도 제대로 고용하지 못하는 귀족가에서, 아버지에게 홀대당하는 딸이 받을 수 있는 것치곤 과분하지. 픽 비웃음을 삼킨 나는 눈앞의 아버지, 클린턴 자작을 불손한 눈으로 살폈다.
아버지는 늘 내게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가야 한다며 호소하곤 했다. 그러지 않으면 가문이 위험하다며 두려움을 심고, 다소 강압적인 언행을 일삼기도 했다. 전생의 나는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에 젖어 별 의심도 없이 그 말을 따랐다.
그리고, 착하게 굴면 짧게나마 다정한 아버지를 볼 수 있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헛수고지. 아버지라 부를 가치도 없고.’
즉 회귀했다는 건, 이런 일을 두 번이나 겪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냥 당장 도망칠까.’
불현듯 그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어디든 지금보다는 괜찮지 않을까?
2
‘그렇지만.’
동시에 절박한 얼굴로 나를 밀치던 아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 혼자 이곳에서 사라지면, 지난 생에 나를 감싸 주었던 아리아는 확실하게 불행한 미래를 맞이해야 하겠지.
차마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결국엔 우리 둘 다 죽고 말았지만, 아리아는 나를 구해 주려 한 은인이나 다름없다.
원작의 불행한 결말을 따라가게 내버려두는 건…….
‘내키지 않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는 그 규모가 엄청났다.
그건 즉, 높은 확률로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건…… 기회야.’
어린 나를 지켜 줄 힘이 있으면서, 나중에 원작 여주인 아리아를 만날 수도 있는 곳. 내게는 그런 곳이 필요했다.
그때, 덜컥거리며 마차가 움직임을 멈췄다. 연회장과는 꽤 먼 곳이었다.
그러나 연회장을 수놓은 불빛은 아주 강렬해서, 그 거리가 무색하게 눈을 찔러 왔다.
“잘할 수 있지? 레나.”
아버지가 기대감에 찬 미소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태연히 마주 웃어 주며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럼요.”
발목이 욱신거렸으나, 애써 똑바로 몸을 세웠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으니까.
* * *
아버지와 나는 연회장인 프리지어궁에 입장했다.
‘황궁은 황궁이네.’
화려한 생김새에 아버지와 나는 동시에 감탄했다.
‘뭐, 이 작자는 다른 데에 더 관심이 있는 모양이지만.’
내가 말을 이해하는 나이가 되고, 처음으로 외출할 때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단순히 칭찬인 줄 알았다.
「과연. 예쁘장한 게, 넌 네 엄마를 똑 닮았어. 다행이구나.」
그 이후로 아버지는 자신이 다니는 파티 자리에 나를 대동하고 다녔다. 낯선 어른들 사이로 아버지의 아첨하는 미소 뒤를 따라다니면서, 비로소 이해하게 된 그 말.
세대를 거듭하면서 사람들은 점차 새로운 진리를 깨닫기 시작했다. 귀족으로 존재하기 위해선 고귀한 피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간간이 돈을 굴리는 데에 성공한 평민들은 웬만한 귀족보다 훨씬 돈이 많았다. 그들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신분마저 사들였다.
몰락한 귀족에게서 작위를 얻고, 그 귀족은 지참금의 명목으로 돈을 챙기고. 지금은 그런 시대였다.
과거에 아무리 고명한 귀족이었어도 삼 대 이상을 말아먹으면 답이 없기 마련이었다. 그중 하나가 클린턴 자작 가문이었고, 나는 바로 그 집안의 첫째 딸이었다. 그러니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가야 한다’는 건 내 행복을 비는 말이라기보단, 그냥 지참금을 많이 챙기고 싶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다른 가문으로 완전히 적을 옮기는 것도 좋은 선택이야.’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은 많았다. 지금의 삶이 처음도 아니었으며, 이젠 소설 속의 내용까지 뚜렷하게 기억이 났으니까. 이 연회는 황궁에서 열렸다고는 하지만, 장소가 황궁일 뿐 연회의 주인공은 개국공신인 로든 변경백이었다.
워낙 사소한 설정이었던지라 자세한 건 기억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건 이 프리지어궁에 ‘그게’ 있다는 사실이었다. 또, 연회의 주인공인 로든 변경백의 인망이 두터워서, 힐베르크가에서 한 명쯤은 연회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까지.
‘남주의 가문인 힐베르크 공작가.’
그곳이 지금의 내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다소 위험은 따르더라도 가장 나았다. 옛말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더 안전하다는 말도 있고.
나와 아리아를 죽였던 자는 힐베르크에서 보냈다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혹시 정말 힐베르크의 사람이라면, 내부에서 알아보는 게 편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잘만 하면 그 집착 남주의 마음을 사전에 꺾을 수도 있었다.
마침 소설의 내용을 이용하면, 힐베르크에 들어가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언젠가 스쳐 지나갔던 싸가지 없는 미남을 떠올리며 웃었다.
‘미안하지만 그런 피폐물 엔딩? 나는 용납 못 한다.’
세상에서 가장 깐깐한, 장모님 같은 여주 친구가 되어 주마.
* * *
아버지는 나를 끌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구석진 곳에 앉아 술이나 진창 퍼마시고 있었다. 열심히 말을 붙여 봤자, 상대해 주는 사람이 애초에 몇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애초에 초대장을 얻은 것부터가 기적이었다.
“젠장, 망할 자식들. 우리 집안도 왕년에는…….”
아버지는 음침한 표정으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아버지를 힐끗거리며 우스워하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이러다 사고라도 치면 위험한데.’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최대한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아버지, 밖에서 과음하시면 안 좋…….”
“허, 이제는 너까지 내게 훈계질할 셈이냐?”
아버지는 비아냥거리며 내 팔을 거칠게 털어냈다. 몸이 흔들리면서 하필 상태가 좋지 못한 발목에 무게가 실렸다.
“윽…….”
결국 나는 완전히 중심을 잃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주위의 시선이 거세졌다.
나는 작게 실소했다. 남들 앞에서 해야 할 행동과 안 해야 할 행동을 구분하지도 못하면서, 이런 자리에 온다고 다인 줄 아는 꼴이 어이가 없었다.
‘오히려 잘 됐어.’
아무래도 자존심이 상한 탓에 내가 더 거슬리는 듯했다. 슬쩍 빠지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