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무게
지은이 | 아낙수나문
펴낸곳 | 신드롬
정 가 | 2500원
ISBN | 9791171358779
투고처 | syndromebook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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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목차
1장
2장
3장
1장
과장의 코훌쩍이는 소리와 부장의 잦은 흡연으로 가래 뱉는 소리가 키보드 소리 속에 불협화음을 넣고 있었다.
다들 조용히 모니터만 바라보는데 이서아는 손거울을 한번 유심히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턱 밑 살이 더 늘어난 것 같아 보였다.
서아는 가방에 거울을 넣고 주섬주섬 겉옷을 입고 퇴근 준비를 했다.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생들 하세요.”
“서아 씨, 요새 남친 생겼어? 반차를 자주 내네.”
부장이 일개 사원인 서아가 요즘 유난히 반차를 자주 쓰는 것이 거슬리는지 말에 가시가 있었다.
“에이, 제가 남자가 어디 있어요. 부장님이 좋은 사람 하나 소개해 주세요.”
서아는 부장의 뾰족한 말도 서글서글한 미소와 넉살로 받아치는 요령을 보였다.
말을 예쁘게 하는 서아에게 부장도 더는 싫은 소리를 못 하고 곱게 보내주었다.
서아는 아직도 한참을 일해야 하는 회사 사람들에게 허리 굽혀 작별 인사를 하고 인터넷 검색으로 봐 둔, 회사 주변에 있는 가정의학과로 향했다.
병원 문을 들어서자 과연 인터넷에서 명의라고 입소문이 자자한 의원이라 그런지 대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 진료 되죠?”
“저희 병원 오신 적 있으신가요?”
“아뇨. 처음이에요.”
“이거 작성해 주세요.”
데스크를 지키는 직원도 밀려드는 환자들 상대하기가 지쳤는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초진에 필요한 신상정보를 적는 용지와 볼펜을 내밀었다.
나이: 만 26세
주소: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체중:
신상정보를 술술 적어 내려가던 볼펜이 순간 멈칫한다.
사실 이게 고민이라서 이 의원을 찾은 참이었다.
숫자를 좀 줄일까 고민하다가 거짓말을 하는 건 좀 껄끄러워서 솔직하게 적어넣는다. 59kg
키가 169cm인 서아에게 과한 몸무게는 아니지만, 아이돌처럼 늘씬한 몸매도 아닌 몸무게다.
앞자리 숫자가 6으로 바뀌려는지 소수점 아래 숫자가 점점 커지고 있기에 다이어트로 검색해서 유명한 의원을 찾았고 회사 근처인 이곳에 왔다.
체중을 솔직하게 적고 나니 나머지 신상 정보란은 금방 채워졌다.
용지와 볼펜을 데스크에 반납하고 신분증을 내밀고 진료를 접수하고도 30분을 더 기다려서야 직원이 서아의 이름을 불렀다.
“이서아 님.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피로에 찌든 직원의 건성인 태도와 40분 가까이 기다린 탓에 서글서글하게 잘 웃는 서아도 짜증이 났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나요?”
인터넷에서의 명성에 비해 한참 젊어 보이는 남자 의사는 안경을 고쳐 쓰며 역시 서아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그리 물었다.
밀려드는 환자들로 인해 의사도 피로한지 미간에 옅게 주름져 있는 것이 첫인상이 성마르고 영 맘에 들지 않았다.
“다이어트약 처방 받으러 왔어요. 나비약 주세요.”
의사는 서아의 신상정보가 적힌 용지를 들여다보고 나서야 서아를 쳐다보았다.
“체중 59kg, 딱 봐도 키가 크신데 비만이 아닌데요?”
“아, 이 이중턱을 보세요. 그리고 제가 안 보이는 데에 살이 많아요. 식욕억제제가 절실하게 필요해요.”
서아가 억지를 부리자, 의사가 짜증이 났는지 뿔테 안경을 신경질적으로 한 손으로 낚아채듯이 벗어서 책상에 던지며 한숨을 쉬었다.
미간과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던 의사가 눈을 치켜뜨자, 순간 그의 홍채에서 이질적인 금빛이 감도는 것 같았다.
착각이었을까?
마치 야생 들짐승 같은 그 안광에 아직 그리 춥지 않은 날씨인데도 팔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맹수 앞의 토끼라도 된 듯이 지레 겁을 먹은 서아에게 의사가 선생이 학생을 혼내듯이 나무라기 시작했다.
“서아 씨, 요새 뉴스 안 보죠? 향정신성의약품 남용이 사회 문제가 되어서 당국에서 쥐 잡듯이 단속하고 있어요. 서아 씨처럼 정상 체중인 사람은 펜터민 드실 정도도 안 되고요.”
“저 그래도 다이어트약 먹고 싶은데요.”
말대꾸하는 서아의 목소리가 주눅 든 것이 티가 났는지 의사가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다른 질문을 했다.
“요새 잠은 잘 주무세요?”
“아뇨. 새벽에 한 번씩 깨서 다시 잠들기 힘들어요.”
“회사 업무에 집중도 잘 안 되죠?”
“네.”
“생각이 많아서 그렇죠?”
“네.”
어느덧 유순히 대답하는 서아를 보며 의사는 다시 안경을 쓰고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약 처방해 드릴게요.”
“나비약인가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서아를 바라보는 의사의 표정이 좀 전의 무심함이 아닌 흥미로움이 보였다.
의사의 입꼬리가 한쪽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 미소가 무척 야릇해 보였다.
“환자분 고집이 세네요. 지금 급하신 건 펜터민이 아니라 푸로작입니다. 그거 처방해 드릴 거예요.”
“푸로작이요? 그거 식욕억제제 중 가장 약한 거 아닌가요?”
“아, 환자분, 정말 안 되겠네. 끝까지 다이어트 생각만 하시나요? 지금 급한 건 가슴에 얹힌 화병부터 나으셔야 해요.”
“화병은 무슨. 저는 인생에서 고민이란 걸 해보고 산 적이 없거든요?”
서아가 짜증 섞인 말투로 의사의 선 넘는 발언에 말대답했다.
“또 바락바락 성질내시는 거 보니 속에 쌓인 게 많으신 거 같은데 입원하셔야겠어요. 마침 환자분 주소도 중곡동? 거기 큰 정신병원에 입원하시면 되겠네.”
“어머. 이 의사 양반 미쳤나 봐. 누굴 보고 정신병원에 가래? 내가 다신 여기 오나 봐라. 영수증 받아 가서 인터넷에 후기 쓸 거예요!”
“영수증 받아 가시면서 처방전도 꼭 받아 가세요.”
서아는 끝까지 속을 긁어놓는 의사의 당부를 뒤통수로 들으며 진료실의 문을 꽝 소리가 나게 닫았다.
클래식 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가운데 진료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서아에게 꽂혔다.
씩씩대며 얼굴이 상기된 서아의 얼굴을 직원은 무시하듯 바라보지 않고 덤덤히 이렇게만 물었다.
“진료비 만사 천원 나왔습니다. 결제는 카드이신가요, 현금이신가요?”
직원의 내리깐 눈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가 허탈해서 결제 후 다시 넘겨주는 카드를 받는 손이 무안할 지경이었다.
서아는 프린트된 처방전을 병원 영수증과 함께 받고서도 속에서 천불이 가시지 않아 카페를 찾아 나섰다.
대로변으로 나와 두리번거리니 유명한 프랜차이즈 카페들은 빈자리가 없어 보였다.
다들 노트북이나 태블릿PC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자리가 쉽게 나지 않을 분위기였다.
지도 앱을 켜고 검색해 보니 대로변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골목으로 들어가면 북카페가 하나 있었다.
북카페로 발걸음을 돌린 서아는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주문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큰 거 하나요.”
9월 중순의 어느 평일, 반차를 쓰고 고즈넉하게 커피 원두를 로스팅하는 냄새와 어우러진 책 냄새를 맡고 있으니 부글부글 끓던 속도 한결 가라앉았다.
서아는 커피가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면서 카페 곳곳에 놓인 책장을 구경했다.
작은 서점이라 그런지 베스트셀러 위주로 진열하는 대형서점의 서가에서는 볼 수 없는 책들이 많이 보였다.
이런 북카페에는 소위 인별그램에 올리는 감성 글귀 서적이나 있을 것이라는 편견과 달리 고미술과 여성학, 신화와 전설에 관한 책들이 많이 있었다.
서아는 책들의 제목을 보고 있자니 대학교 졸업 논문 쓰던 기억이 나서 쉽사리 손이 가질 않았다.
그러다 제목이 좀 이질적으로 인별그램의 감성 글귀 같은 책 하나를 발견했다.
[추억의 무게]
제목부터 어렵고 두꺼운 책들 속에 혼자 얇은 두께로 눈길을 끌어서 그 책을 꺼냈다.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서아가 커피를 건네받고 테이블에 [추억의 무게]라는 책도 올려놓으려 하니 카페 주인이 엄격한 어투로 만류했다.
“매장에 비치된 책은, 책도 결제하셔야 보실 수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책은 다시 꽂아 놓을게요.”
책 뒤표지에 적힌 금액이 무려 2만 원이었다.
요새 할머니를 돌봐주는 간병인 인건비가 월 300만 원이 나가는지라 서아의 월급은 늘 적자였고 마이너스통장까지 끌어다 쓰는 마당에 얇은 책 한 권에 돈을 함부로 쓸 수는 없었다.
서아가 그 책을 원래 꽂혀 있던 책장에 꽂으려는데 그녀의 손 위에 웬 커다란 손이 겹쳐지더니 책을 도로 꺼내 카운터로 가지고 갔다.
“어?”
그 사람이었다. 서아의 오늘 기분을 완전히 잡쳐놓은 그 가정의학과 의사.
의사 가운을 벗고 커피를 주문하는 그의 옆얼굴은 짜증 나리만치 편안해 보였다.
“늘 먹던 거요. 그리고 이 책도 계산해 주세요.”
자주 오는 카페인지 5음절의 주문에 카페 주인은 군말 없이 커피를 제조했다.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의사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병원 밖에서 보는 의사는 신경질적으로 말하지도 않고 옆눈으로 서아와 눈을 맞추며 빙그레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서아는 그의 넉살 좋은 모습에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진료실에서도 저렇게 서글서글하게 대해주면 좀 좋아.
“아까 병원에서는 제가 말이 너무 심했습니다. 이 책을 사과의 의미로 드리고 싶은데 받아 주실래요?”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그 무해해 보이는 미소 앞에서 또 버럭 화를 내며 뿌리치는 건 지나친 듯싶어서 서아는 못 이기는 척, 책을 건네받고 찜해놓은 테이블로 가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펼쳤다.
[추억의 무게]
십중팔구 이렇게 있어 보이는 제목의 책 내용은 시답잖은 추억팔이 에세이가 대부분이었다.
어라라라?
한 장, 한 장 넘겨볼수록 편견이 보기 좋게 틀렸다.
추억의 무게라는 책은 동양 오컬트 설화집이었다.
각 챕터마다 여우와 혼종이라는 수상한 소문이 있는 도사가 사건을 의뢰받는 것으로 시작했다.
의뢰인들은 저마다의 불행으로 저마다 다른 사연을 가지고 도사를 찾았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마음에 올라앉은 근심을 떨치기 위해 그를 찾았다는 것이다.
잠도 자지 못하고 살아 있으면서도 송장이 되어가는 마음의 화를 떨치기 위해 의뢰인들은 도사와 계약했다.
가득한 근심으로, 살아도 죽은 것만 못한 의뢰인들은 남양진주와 산호뒤꽂이 같은 패물과 금괴를 내놓았다.
하지만 도사는 수상하게도 그런 귀물들을 한사코 거절했다.
‘값은 당신의 마음에 간직한 추억으로 치르십시오. 당신의 근심 한 근당 당신의 추억도 한 근입니다.’
수상한 도사는 실력이 출중해서 그들의 심장에 뿌리박혀 삶을 갉아먹던 화의 이유를 신묘한 방법으로 해소해 주었다.
모든 것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결말들이었다.
제목과 달리 꽤 잘 쓴 설화집이라고 생각하며 저자 소개를 보려고 책날개를 들춰보았다.
[저자 : 서무이.
이메일 주소: foxmui@gmail.com
당신의 삶을 옥죄는 근심이 있으십니까? 그 근심을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대가는 당신의 추억으로 받고 있습니다. 당신의 근심 1g당 당신의 추억 1g을 받겠습니다. 연락 주시면 즉시 찾아가겠습니다.]
책이 생각보다 너무 흥미진진해서였을까.
서아는 어느새 휴대폰의 메일 앱을 켜고 있었다.
책날개에 쓰여 있는 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나자, 이런 허무맹랑한 것을 믿고 있는 자신이 우스워서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고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우스운 촌극을 누가 봤을까 봐 괜히 민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