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대공가에 약혼자만 셋입니다 4권
지은이 : 여문
펴낸곳 : 디키 웹소설(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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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대공가에 약혼자만 셋입니다
4권
여문
목차
10장.
11장.
12장.
10장.
사실 ‘대단하다’고만 그칠 수는 없었다. 가족을 잃고 나서는 가베온 가에서 숨어 지내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디헤나가 그 가문 밑에서 보호를 받는다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천덕꾸러기 신세였지. 툭하면 구박받고.’
이런 사정 속에서 주목해야 할 건 디헤나와 가베온 가의 차남 엘리엇 사이의 유대감이었다. 방해된다고 생각해 아에테가 엘리엇도 함께 치워버려서 디헤나가 복수심에 불타올랐었으니까.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단순히 아에테를 도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어.’
디헤나도 사로잡아야만 하는 것이다……. 정말 산 넘어 산이었다. 바로 다음 고난이 주어지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새로운 잔을 가지고 오는 리테마를 바라보았다.
“리테마는 친구 많지?”
“갑자기 웬 친구?”
리테마는 의아해하며 잔을 내 손에 쥐여주었다.
“그냥 그럭저럭?”
이 거짓말쟁이 같으니라고. 대놓고 거부 반응을 보이던 예전과는 달리 리테마는 이제 아카데미 내에서 누구와도 잘 지냈다. 학년이나 성별, 신분을 가리지 않고, ‘친구’라고 칭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안타깝게도 나는 여전히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능숙하지 않았다. 아카데미에 가서도 다들 하나같이 먼저 다가와 호감을 내보여준 덕분이었다. 하지만 사정이 달라졌으니 더는 그런 운에만 기댈 수 없었다.
“따로 방법 같은 게 있나 싶은데.”
이럴 수가. 내가 장난스럽게 야유하자 리테마가 마구 웃어댔다.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주 사소하더라도 접점이 있다거나.”
우리 둘 다 부모가 없는데 그것도 접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취미나 관심사가 겹치거나.”
이건 내가 알 도리가 없고.
“곤란한 일이 생기면 도와주면 친해졌던 것 같아.”
음, 그래도 이건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
우선 푸른 가지 모임부터 해결하고 말이다. 연회가 끝나자마자 바로 출발했는데 라오트가 먼저 별장에 도착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옷부터 갈아입고서 1층으로 내려갔다.
“어떻게 잘 되어가고 있어요?”
“대충.”
“대충?”
“……문제 없다는 소리야.”
하여간 화법 한 번 굉장히 특이했다. 최종 점검만 하면 된다고 해서 구역을 나누었다. 우선 나는 북쪽의 침실들과 주방, 도서관, 뒤뜰을 맡았다. 점검표도 받았기 때문에 그 과정도 무척이나 수월했다.
“그런데 분명 커튼은 다른 디자인이었던 것 같은데.”
“라오트님께서 지금 디자인이 화병과 더 잘 어울린다고 하셔서 교체했습니다.”
한 걸음 뒤로 떨어져서 커튼과 화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우리가 본래 정했던 디자인이라면 색은 같아도 채도가 달라서 묘하게 어긋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라오트는 정말 이 업무에 소홀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에테님이 왔으면 좋았을 거예요.”
다른 손님들이 도착할 날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 셋이서만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내 말에 라오트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슨 그런 이상한 말을 다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칭찬이었는데요. 아에테님도 별장 상태를 보면 만족스러워하실 것 같아서요.”
“몇 주간 형님을 못 봐서 베르제네 네가 헷갈리나 봐.”
리테마가 대번에 부정했다.
“큰 형님은 그 정도로 너그럽지 않으니까.”
“그런 말은 네가 하면 안 되지.”
“아야.”
테이블 밑에서 소동이 벌어지는 게 다 느껴졌다. 나는 그들을 말리는 대신 마저 식사를 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아에테의 기준에는 못 미칠 것 같기는 했다.
‘그래도 아예 기대조차 안 했을 테니 그럭저럭 합격점은 줄 것 같은데.’
이 또한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으므로 잠자코 있었다. 후식까지 즐기고서는 두 형제와 체스를 두었다.
“유독 집중을 못 하네.”
“……음.”
“체크메이트.”
아주 깔끔하게 패배해 버렸다. 깔끔하게 승복하고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리테마가 의자에 앉았다.
“걱정하지 마, 내 피앙세. 반드시 승리를 안겨 줄 테니까.”
안타깝게도 여태까지 리테마가 라오트를 이긴 역사는 없었다. 물론 나보다 더 오래 앉아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래서.”
말들이 원래 자기 위치로 돌아가는 사이 라오트가 말을 걸었다.
“뭔데?”
“별거 아닌데.”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오는 내내 정신이 딴 데 가 있었잖아, 베르제네.”
내 편이 이렇게나 빨리 남의 편이 되다니. 회색 눈동자 한 쌍과 푸른 눈동자 한 쌍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걔 때문이야? ……마가린인가.”
“마가렛인데, 형.”
“둘 다 틀렸어. 마가릿이야.”
“비슷했네. 그래서 전에 걔 초대할 필요가 있냐고 했잖아.”
아무래도 라오트는 내가 연민 때문에 마가릿을 손님 목록에 추가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애 때문은 아니고 생각해 봐야 되는 문제가 있어서요. 마침 해결 방법을 찾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쓸데없는 관심을 뿌리치기 위해 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마침내 내가 개입해도 되는 디헤나의 고난을 찾아냈으니까.
‘이런 얘기까지는 못 하지.’
라오트와 리테마는 계속 그러면 그만 방으로 올라가겠다는 협박을 하고 나서야 게임을 시작했다.
“분명 이기겠다고 하지 않았어?”
“마법은 반칙이야.”
“체크메이트. 안 썼고, 빨리 나와.”
리테마가 질린다고 해서 다른 보드게임과 체스 게임을 하나씩 즐겼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마침내 모임의 날이 되었다. 라오트는 손님을 맞이하는 간단한 절차에도 정말 최소한의 사교성을 보여주었다. 자신이 초대한 동기들이 도착하자 처음으로 표정이 자연스러워졌지만 말이다. 당연히 나와 리테마의 호기심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여러분들이 크로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오. 크로닌이면 환상의 동물 말하는 거죠?”
“네, 맞아요. 형이 누구를 초대하는 건 처음― 읍읍!”
라오트는 표정도 변하지 않고 간단하게 리테마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몸을 돌리고서 가까이에 있는 사용인들에게 말했다.
“방으로 안내해.”
더는 어떤 구경거리도 제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비록 리테마는 그 격렬한 반응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워했지만.
조금 더 기다리자 내가 그렇게나 기대하고 있던 마차가 정문 앞에 섰다. 마차에서 내린 건 평소보다 조촐한 차림새의 마가릿이었다.
“오랜만이네. 뭐라고 불러야 하지? 쥬네다? 아니면 이디에?”
아,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와서 큰일이었다.
“이해해 줘. 이런 적은 처음이라 실수를 하게 되네.”
“이러려고 나를 부른 거야?”
표독스러움도 덜해졌다. 확실히 마음고생을 꽤나 했나 보다.
“나보다는 네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착각하고 있는 거라면 돌아가도 좋아.”
내가 마가릿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로튼베일 저택에 있는 동안 서신을 스무 통 넘게 보내서 하는 말이었지. 마가릿은 나를 노려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할 말 있는 거, 맞아.”
“그럼 해야지.”
내용이야 뻔했다. 자기가 잘못했다느니, 그만 용서해 달라느니. 사실 그래서 질질 끌어온 거기도 했다.
“그래! 내가 너한테 못되게 군 거 인정해! 정말 반성하고 있다고.”
“아하. 그래?”
“진심이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고.”
참으로 진부하고, 지루하다. 고대하던 순간은 아니어서 그런가. 이렇다 할 감흥도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예 그대로 잊고 지냈을 테니까.
“알겠어.”
“그, 그럼 용서해 주는 거지?”
반쯤 죽었던 눈에 생기가 돈 순간이었다. 마가릿이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빠르고 쉽게 확인 되니까 영 기분이 지저분하네.
“내가 다시 쥬네다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줄 거지?”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하니?”
“뭐?”
“남의 집안 사정에 내가 어떻게 관여할 수 있겠냐고.”
내 냉대에 당황하던 마가릿은 곧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아? 너 때문이잖아! 네가! 네가 나를 내보내라고 아버지한테 얘기했던 거 다 알고 있어!”
곧장 나에게 달려들었지만 나를 건들 수는 없었다. 닿기도 전에 몸이 굳어버렸으니까. 내가 한 짓은 아니었고 아마 멀리서 라오트가 지켜보고 있었겠지.
“죽여버릴 거야! 이 괴물! 악마!”
아무것도 못 하고 저주만 하는 마가릿을 구경하는 건 그나마 좀 재밌었다. 이만하면 충분히 누렸지.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마가릿을 끌어안았다. 곧바로 거부 반응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나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마가릿, 사실 아직 믿기지 않기는 한데 나에게 죄인을 처단할 힘이 있다고 하더라.”
내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에 너는 죄인이 맞거든…….”
마가릿은 두고두고 누군가를 괴롭힐 테니까. 오래 지나지 않아 잠잠해졌다. 내가 그만 팔을 풀자 마가릿이 의식을 잃은 채로 풀썩 쓰러졌다.
“오는 길이 많이 피곤했나 보네.”
나는 주변에 있던 사용인을 불렀다.
“의사를 불러야겠어.”
***
마가릿의 사정이 어떻게 되든 간에 푸른 가지 모임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라오트는 주최자로서는 영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은 리테마가 맡았다. 다행히 라오트에 대해 말이 나돌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방으로 올라갈 거야?”
첫 일정도 끝났겠다 뒷일도 리테마에게 맡기고서 슬쩍 일어서는데 라오트가 졸졸 따라왔다. 뭐 때문에 이러나 했더니. 내가 가볍게 웃자 바로 부루퉁해진다.
“왜 웃어.”
“제가 안아주기를 바라는 거죠?”
삐딱하게 내려 보아도 부정은 하지 않는다. 내가 이토록 자연스럽게 라오트를 귀엽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다니. 이 현실에 놀라워 하면서 손을 뻗자 라오트가 알아서 내 품속으로 들어왔다.
“오늘 하루 수고 많았어요.”
“응.”
“일주일 더 힘내 봐요, 우리.”
“……알겠어.”
이후로도 라오트는 일정 하나가 끝날 때마다 나를 꼭 찾아왔다. 별말은 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지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충분히 잘해주고 있었다.
‘조금씩이지만 차차 나아지는 모습도 보여줬고.’
대부분의 손님들은 이미 친한 사이여서 분위기도 좋았다. 그럼 성공적이라고 해도 되겠지. 마지막 날까지 문제 없이 보낼 수 있었으나, 리테마는 도리어 이 점에 불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