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대공가에 약혼자만 셋입니다 3권
지은이 : 여문
펴낸곳 : 디키 웹소설(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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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대공가에 약혼자만 셋입니다
3권
여문
목차
7장.
8장.
9장.
7장.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게 좋겠어요.”
메일리가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받은 날, 결국 해결방안을 찾아온 아에테가 말했다. 아직은 이해가 되지 않는 단계였다.
“익숙해지기. 좋아요. 그런데 어떻게요?”
“많이 해 버릇하면 익숙해지지 않을까 싶은데. 앉아요, 영애. 맞은편 말고 옆자리에요.”
마지막 문장에 멈칫하고 말았다. 억지로 발을 움직이기는 했으나 예민한 아에테가 못 알아챌 리 없었다.
‘오늘은 왜 자기 서재로 부르나 했더니.’
신중하게 거리를 잰 나는 조심스럽게 두 뺨 정도 떨어져서 앉았다.
“너무 먼 것 같은데. 가까이 와봐요, 영애. 아니면 내가 가는 게 좋아요?”
잠시 아에테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생리적인 거부감 때문에 더 붙기가 어려웠다.
잠깐 망설이다가 나나 아에테나 피차일반 바빴으므로 그만 입을 뗐다.
“아에테님이 와주시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그러죠.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아에테를 보자 취소하고 싶어졌다. 충동을 입을 꾹 다물어 참아냈다.
나는 살짝 닿은 무릎을 맹렬히 바라보았다. 다른 감각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를테면 산뜻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체취라든가, 신경이 따끔거릴 정도의 존재감이라든가.
내 손목을 가만히 감싸는 큰 손이라든가…….
“영애는 손이 너무 많이 가요.”
정신 건강에 너무 해로운데.
“그가 신경을 안 써줬다고 이렇게 원상태로 돌아오다니.”
손등과 손바닥을 어루만지더니 손가락 마디를 쓸어내린다. 결국 아에테는 그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워 단단히 맞잡았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
“……지금이 그 익숙해지기 위한 절차인 거죠?”
“그럼요. 우선 손 잡는 것부터 시작해요. 우리가 그래도 약혼한 사이인데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아야 하잖아요.”
아, 그런가? 겨우 손 하나 잡혔을 뿐인데도 사고력에 이상이 생겼다. 아에테도 사제의 힘을 물려받은 건가 싶었으나 사람을 매혹시키는 종류의 힘은 들어보지 못했다.
“나는 분명 영애를 소중히 다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요?”
무슨 키우는 짐승을 얘기하는 것처럼……. 아에테의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몸을 떨지 않으려고 모든 부위에 바짝 힘을 주었다.
“소중히, 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중하게 대해 주셨죠.”
“그래요.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영애가 틈만 나면 나한테 겁을 먹는지 모르겠네.”
정말 의아하다는 목소리였다. 마른침을 삼키면서도 오해라느니, 착각이라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짓말이라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으려고요? 사람 눈을 봐야죠, 영애.”
고개를 틀기가 무섭게 눈이 마주쳤다. 오묘한 잿빛 눈동자가 나를 꿰뚫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눈꺼풀이 느릿하게 움직이면서 동공이 확장되는 것이 아주 생생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황당하고 억울했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런가요?”
“네. 둔해서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만큼 굼뜨게 구는 것보다는, 민감해서 찌를 때마다 바르작거리는 게 낫죠.”
이건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아니, 의미를 파악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아에테가 내 반응을 즐기고 있다는 건 알겠다.
“춤 연습은 그만 해도 될 것 같아요. 앞으로 만나면 손부터 잡는 걸로 해요, 우리. 어떤 상황에서도 예외는 없어요.”
“알겠어요.”
달갑지 않으면서도 받아들인 이유.
어차피 같은 저택에 있으면서도 마주칠 일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었데…….
왜 방에서 나올 때마다 보게 되는 것 같지?
“잘하고 와요.”
시험 날까지 배웅하러 나온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나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착실하게 아에테가 내민 손을 잡았다. 결과적으로 그가 내놓은 대책이 정말로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아에테와 접촉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네, 다녀올게요.”
물론 그렇다고 아에테 자체가 편해진 건 또 아니지만.
내가 마차에 올라타고 문이 닫히자마자 라오트가 바로 말문을 열었다.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건데?”
슬쩍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새 안으로 들어간 건지 아에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게요. 오히려 제가 묻고 싶네요…….”
이게 친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싶었지만 뒷말을 삼켰다. 그간 마주쳤던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일거수일투족 파악하고 있다는 걸 확인받으니 기분이 참 묘하기는 했다.
“그런데 시험 당일에 가도 되는 거예요?”
아에테에 대한 감상은 라오트로 인해 끊어졌다.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하기는 했으나 영 불안했다. 아무리 가까워도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것 같았다.
경험이 있는 동행자가 있어도, 나는 초행이니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상태가 좋은데.
“어.”
그러거나 말거나 라오트의 대답은 퉁명스럽기만 했다. 따져 묻는 대신 나도 자세를 편하게 고쳤다.
‘어련히 다 방법이 있겠거니 해야지.’
등나무 숲을 한참이나 달려서 익숙한 번화가로 들어섰다. 기차역이나 관문으로 향할 줄 알았으나 마차는 도심 곳곳을 다니다 한 곳에 정차했다.
정신이 팔린 사이 라오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뭐 해? 안 내리고.”
“여기라고요?”
마탑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매우 평범했다. 내부는 어떨지 몰라도 겉보기에는 좀 오래된 노란 벽지의 2층 가정집이었다.
‘사람이 좀 몰려 있네.’
라오트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갈 정도였다.
“그럼 끝날 때쯤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마차가 떠나고 우리도 차례를 기다렸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발을 디디자마자 공기가 묵직하게 변했다.
오로지 마력에 익숙한 자들만이 눈치챌 수 있는 아주 미세한 감각이었다.
“여기는 17층.”
안은 다를 거라 얼추 예상은 했으나 더 놀라왔다. 빈약한 상상과 달리 완연히 다른 세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왁자지껄한 소음이 산들바람처럼 떠밀려 온다. 천장은 사라진 채 푸른 하늘만이 있었다. 만들어진 광경이 분명한데도 신기하게 인공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늘 밑으로 다양한 높이의 건물들이 쭉 늘어섰고, 그 한가운데에 나선형 계단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층마다 입구가 다른 지역에 세워져 있어.”
“총 몇 층이에요?”
“33층이었나.”
이런 공간이 서른 개나 더 있다고. 나는 감탄하거나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심드렁한 라오트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가 장차 이 탑의 지배자가 될 거라니…….’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감하게 되니 감흥이 사뭇 달랐다.
“시험장은 9층이야. 출발해.”
눈으로 봤을 때의 계단은 굉장히 길었다. 그런데 막상 내려가니 체감상 반 층도 되지 않았다. 마법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새로운 층으로 가면서 인공 도시들을 구경했으나 나중에는 멀미가 났다.
“……미로네요.”
시험장 층에 도달하고 나서 힘없이 중얼거렸다. 인공 도시를 지나오자 마지막으로 나타나는게 미로라니.
점점 어떤 식으로 시험을 치르게 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라오트에게 물어도 가 보면 알 거라고만 대답해서 잠자코 따라온 거긴 한데, 음.
작은 몸으로 인파를 겨우 뚫고 접수원을 찾아갔다.
“이름이요?”
“베르제네 에르디온이요.”
“네, 확인되셨습니다.”
인증 절차 한번 간단하다. 따로 뭔가 확인을 하는 거겠지?
“베르제네 님의 순번은 302번입니다. 다섯 명씩 한 팀으로 15분마다 입장하고 있어요.”
호출했을 때 나오지 않으면 자동 실격이라는 주의 사항까지 듣고서, 라오트에게로 돌아왔다.
“도착 지점은 7개야. 그중 다섯 곳에만 감독관이 있어. ‘마력 인지’로 따라가면 돼.”
“꽝을 고르면 어떡해요?”
“탈락.”
아주 허망한 답변이었다. 그래도 납득했다.
모두가 최종 시험까지 치를 수 있는 건 아니니 그런 장치도 필요하겠지.
“따라가다 보면 막다른 길이 나오는데 그건 네가 그냥 힘으로 열어도 돼.”
“그래도 실격되지는 않는 거죠?”
혹 그냥 꼼수를 알려 주는 건가 싶어서 물어봤다. 무조건 정면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의는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까.
상황을 알아 둬야 확실하게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 그것도 시험 과정이야.”
“좋아요. 알려 줘서 고마워요.”
나도 라오트를 따라 벽에 기댔다. 순번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동안 이렇다 할 만한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멍하니 다른 응시자들을 구경하다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라오트도 시험 쳤죠?”
“어.”
“몇 급 나왔어요?”
“몰라. 6급이었나.”
그 정도 등급밖에 안 나왔다고? 시험이 빡센 건지, 라오트가 설렁설렁한 건지.
내 표정이 묘해지자 라오트는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첫 시험은 최대 6급까지밖에 받을 수 없어. 그 이후로 시험을 안 봤을 뿐이야.”
“왜요? 귀찮아서요?”
라오트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긍정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마탑에는 랭킹 시스템이 있었다. 5급에서부터 책정되어 등수로 다시 등급이 분배되는 것이다.
‘마탑주라면 1급은 됐을 텐데 나중에 다시 갱신하는 거려나.’
궁금하기는 했으나 지금은 별 생각이 없을 확률이 더 높아 묻지는 않았다.
라오트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내 차례가 다가왔다.
“299번! 300번! 301번! 302번! 303번!”
“여기서 기다릴 거예요?”
“응.”
“알겠어요. 다녀올게요.”
가볍게 손을 흔들고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입구 앞에 있던 보조원은 다른 네 명의 응시자까지 다 모인 후에야 안내를 시작했다.
“입장하시면 자동으로 혼동 마법이 걸립니다.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지 말고 본인의 판단력으로 길을 찾으십시오. 억지로 혼동 마법을 풀거나, 제한 시간인 20분 내로 도착하지 못하면 탈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