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를 부탁해 1권
내 아이를 부탁해 1권
차 례


01.
02.
03.
04.
내 아이를 부탁해 1권
01.



‘사랑해.’
‘나도 사랑해. 하지만 우린 안 돼.’
‘!’

뜨겁게 사랑을 나눈 후 헤어짐의 아쉬움이 너무 커서 사랑하는 이의 몸을 끌어안고 정수리에 입을 맞출 때였다.

갑자기 싸늘한 표정으로 차가운 이별의 말을 내뱉는 여자를 품에서 꺼내어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하지만 흐릿한 이목구비는 아무리 눈을 비벼도 선명해지지 않았다. 제발 그 예쁜 얼굴을 한 번만 더 자세하게 보고 싶은데. 망막에 뿌연 안개라도 낀 것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신후는 두 눈을 비비고 또 비볐다. 하지만 그의 애틋한 마음과는 다르게 여자는 너무도 쉽게 이별을 고했다.

‘백신후, 인제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아.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안녕.’
‘안 돼! 가지 마!’

신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또 같은 꿈이다.

11년 전 첫사랑과의 이별은 오랫동안 신후를 괴롭혀 왔다.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할 때는 나타나지 않다가 이제는 정말 잊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마치 절대 나를 잊지 말라는 듯 느닷없이 꿈에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잘살고 있을 그녀를 잊어야 하는데. 11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한숨이 나온다.

침대에서 내려선 신후는 잠옷 가운을 여미며 창 쪽으로 걸었다. 안개가 뿌옇게 낀 런던 시가지를 내려다보는데 그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네, 여보세요?”

모친의 전화라는 것을 확인한 신후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신후야, 너 당장 귀국해야겠어.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런던지사에서의 근무가 아직 2년이 더 남았다. 그런데 갑자기 귀국을 하라니? 신후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모친의 대답을 기다렸다.

-네 아버지가 쓰러지셨어. 지금 혼수 상태시니까 얼른 와라.

깜짝 놀란 신후가 얼른 대답했다.

“정말입니까? 아버지는 괜찮으십니까?”

아버지는 평소에도 혈압이 높으신 분이셨다.

-그래, 위독한 상황은 넘겼어. 자세한 이야기는 와서 하자.
“네? 자세한 이야기라뇨?”

뭔지는 모르겠지만 모친의 말투에 다른 뜻이 담긴 듯하여 물었다.

-일단 와. 와서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모친 홍재희 여사는 이미 통화를 종료했다. 신후는 뭔가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버지가 혼수상태라는 말을 떠올리고는 한국행 비행기 티켓부터 예매했다.

***

대한민국 인천 국제공항.

신후가 입국장 문을 통과하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모친의 비서 최형준이 얼른 알은체를 하고는 달려왔다. 짐이 실린 카트를 미는 형준에게 신후가 물었다.

“회장님은 아직 혼수 상태십니까?”
“네, 아직은….”
“심각한 상태십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빨리 모시고 오라는 지시만 받았습니다.”

최형준 비서의 표정 또한 아리송했다. 뭔가 숨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신후는 꺼림칙한 기분을 떨치고 말했다.

“일단, 서두르죠.”
“네.”

신후는 달리기 시작했다.

190cm는 거뜬하게 넘을 것 같은 큰 키에 수려한 미남형의 남자가 슈트를 입은 채 달리는 모습은 가히 광고의 한 장면이었다.

쓰러진 아버지 걱정에 구겨진 미간과 깊은 눈빛이 이채롭다. 그의 두 다리가 빠르게 움직일 때마다 바람을 타고 은은한 향기가 퍼져 나갔다.

근처에 있던 여자들의 시선이 쏠렸다. 누군가는 그가 연예인인가 싶어 휴대 전화로 사진까지 촬영했다.

만찢남, 존잘남 등등의 온갖 수식어가 저절로 떠오르는 이목구비 또한 여자들의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신후는 여자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차장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1시간 30분 후.

신후는 VVIP용 병실 문 앞에 섰다. 아직 짐도 차에 그대로 실려 있는 상태였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선 신후는 모친인 재희에게 눈인사만 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 부친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신후에게 다가온 재희가 갑자기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강하게 때렸다.

“윽!”

신후가 깜짝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 맞은 등이 아프기도 했지만 놀란 마음이 더 컸다. 이제 막 귀국하여 쓰러진 아버지를 살피는데 등짝 스매싱이라니?

“어머니, 왜 그러십니까?”

남편이 쓰러져서 충격을 받은 건 알겠는데 왜 아들의 등을 이렇게 세게 때리는 걸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넌 더 맞아야 해. 이리 와 봐.”

재희가 신후의 팔을 붙들고 다시 등을 때리려 할 때, 신후가 그녀의 양쪽 손목을 잡았다.

“이거 놓지 못해?”
“어머니, 맞을 땐 맞더라도 이유나 알고 맞아야겠습니다. 아니 그보다 아버지는 괜찮으신 겁니까?”
“아버지는 괜찮으실 거야. 문제는 너야, 백신후.”

재희의 말에 안도하기는 했지만 어머니에게 속은 것 같아 살짝 화가 나기도 했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혹시 자신이 한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달리하실까 봐 하늘에 기도하고 또 했었다.

그런데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어머니, 도대체 무슨 일이냐니까요?”

신후의 궁금증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지자 재희가 입을 열었다.

“넌 너한테 열 살이나 먹은 아들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니?”
“!”

신후의 입이 벌어졌다. 열 살이나 되는 아들이 있다고?

놀란 눈빛으로 재희를 쳐다보던 신후가 뭔가를 떠올렸는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재희는 놓치지 않았다.